암천제 160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60화
160화
북리사웅은 아름드리나무 뒤에 숨어서, 독고무령의 통나무집을 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깟 놈이 뭐가 좋다고…….’
처음에는 모용설에게 별반 마음이 없었다.
천으로 목과 얼굴 아래를 가린데다, 말투도 남자처럼 거칠었다. 게다가 대충 묶어서 흐트러진 머리에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은 지저분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은룡산장의 사람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 천을 푼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그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실 자신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천룡방에는 그녀보다 훨씬 화려하고 아름답게 치장한 여인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의 부인 역시, 아이를 낳기 전만 해도 한단 제일의 미녀라는 말이 돌 정도로 아름다웠었다.
하지만 그 어떤 여인도 모용설과 같은 충격을 주지 못했다.
모래바람 속을 뛰어다니는 황야의 야생마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자신이 본래 그런 여인을 좋아했던가?’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분명한 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정숙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좋아했지, 남자처럼 거칠게 구는 여자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이 왜 그러는지 스스로 자문해도 답이 안 나올 정도로 의아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런 생각을 할수록 모용설의 얼굴이 더 떠올라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삼 일 고민하던 그는 자신의 마음에 순응하기로 하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눠보기 위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호위무사대가 있는 곳을 어슬렁거렸다.
그 덕에 모용설과는 자주 마주쳤다.
그는 평소와 달리 환하게 웃으며 모용설의 호감을 사려 했다.
“하하하, 어디 가는 길이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눈빛뿐이었다. 여인의 눈빛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싸늘한 눈빛. 그것은 강호 무사들의 눈빛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게다가 그렇게 묻는 목소리도 꺼칠한 남자의 말투였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떨렸다.
“하하하, 낭자와 잠시 이야기를 좀 나눠볼까 해서 왔소.”
“난 이야기 나눌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낭자라는 말,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요. 복수를 할 때까지 나는 남자니까.”
모용설은 그 말만 하고 홱 몸을 돌렸다.
그는 그녀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붙잡으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기분. 그렇게 날려 보낼 수 없다는 절박한 어떤 마음이 그의 손길을 막았다.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달아오른 그는 그때부터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파악하려 애썼다.
여인의 환심을 사려면, 여인이 좋아하는 것을 해주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 아니던가.
그는 이틀 동안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 마침내 알게 되었다.
모용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빌어먹게도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극도로 싫어하는 놈!
굳이 물어볼 것도 없었다. 한겨울 북풍처럼 싸늘하던 그녀의 눈빛이, 놈을 바라볼 때마다 부드러운 춘풍으로 변한다.
하거늘 무슨 말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그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짙은 살의가 꿈틀거렸다. 오늘처럼 개인적인 일로 독고무령의 통나무집에 들어가는 걸 보면 살의가 더욱 짙어졌다.
‘절대 당신을 저 거지 같은 놈에게 빼앗기지 않겠어!’
이를 악문 그는 독고무령이 거주하는 통나무집을 바라보며 아름드리나무를 짚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와직.
다섯 줄기 골이 나무에 깊게 파였다.
둘이 저 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설마……? 아니야, 아니야!’
가까이 가볼까?
그가 망설이고 있는데 통나무집 문이 열렸다.
그는 독고무령과 진사혁과 모용설이 나오는 것을 보고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나무에 등을 기댄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히 둘만 있었던 건 아니었군.’
바로 그때, 머리 위에서 전음이 벼락처럼 꽂혔다.
<허허허, 꼬마야, 거기서 뭐하냐?>
그는 번쩍 고개를 쳐들고 머리 위를 쳐다보았다.
나무꼭대기 저 위에 앉아 있는 치선이 보였다.
심장이 멈출 것처럼 놀란 그는 재빨리 되물었다.
<그, 그러는 선공께선 거기서 뭐하십니까?>
<나? 선단을 만들 벌레를 잡고 있지. 그런데 너는 왜 거기서 바람맞은 서방처럼 그러고 있는 거냐?>
가슴이 뜨끔한 북리사웅은 대충 둘러댔다.
<저, 저는 그냥 바람을 쐬고 있었을 뿐입니다.>
<왜? 몸이 안 좋아? 그럼, 이거 하나 먹어라. 입 벌려.>
대꾸할 새도 없이 작은 알약 하나가 정확히 북리사웅의 입을 향해 떨어졌다.
북리사웅은 알약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치선이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안 먹으면 소리 지른다.>
결국 북리사웅은 치선의 약을 받아먹는 수밖에 없었다.
꿀꺽.
고약한 냄새가 뱃속에서 목구멍으로 솟구쳤다.
‘크으, 냄새! 빌어먹을 늙은이!’
하지만 귀에서 울리는 소리 때문에 게워낼 수도 없었다.
<그거 좋은 약이야, 그러니 운기 잘해서 약기운을 최대한 흡수해라.>
정말일까?
* * *
새벽어스름이 밀려들 즈음, 독고무령은 모용설과 함께 백천산을 출발했다.
그는 바로 북경으로 가지 않고, 일전에 적수천을 만났던 장원으로 향했다. 북경으로 가기 전에 적수천을 만나 해결할 일이 있었다. 모용설을 위해서.
그렇게 세 시진, 우현으로 뻗은 관도를 따라 가는데 낭인무사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은룡산장에서 막대한 황금으로 산서의 무인들을 끌어들인다더니, 관망하던 산서의 무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듯했다.
‘적사보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고 있다고 했던가?’
자신이 보고받았을 때, 일천에 가까운 산서 무사들이 적사보에 집결했다고 했다. 제왕성 무사들까지 합하면 이천이 넘었다.
아마 은룡산장 쪽도 그 못지않은 사람들이 모일 터. 진정 전쟁이 따로 없었다.
‘산서가 붉게 물들겠군.’
어느 쪽이 이기든 상관없었다. 피가 많이 흐를수록 암천회에게는 득이 될 테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암천회는 안전하냐 하면 그도 아니었다.
한 발만 삐끗하면 수천 장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지 모르는 게 또한 암천회의 현 상황이었다.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보다는 양쪽이 함께 피해가 나야 한다. 그들의 전력이 현저하게 약화되기 전까지는 함부로 끼어들어선 안 돼.’
신시 무렵.
독고무령은 모용설과 함께 장원에 도착했다.
그가 정문을 향해 걸어가자, 전에 왔을 때보다 훨씬 더 삼엄한 감시의 눈길이 독고무령을 좇았다.
그러나 독고무령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장원의 문으로 다가갔다.
탕탕!
문을 두드리자 전에 봤던 중년인이 문을 열었다.
그는 인피면구를 쓴 독고무령을 알아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약속도 없이 무슨 일이오?”
“급히 만날 일이 있어서 왔소. 연락을 해주시오.”
“무슨 일인데 그러는 거요?”
“그건 귀하에게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오.”
“정확히 알아야 연락을 하든 말든 할 것…….”
독고무령은 중년인이 머뭇거릴 틈을 주지 않았다.
“연락을 해줄 수 없다면 돌아가겠소. 단, 이후에 벌어진 일은 귀하가 책임져야 할 거요.”
중년인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독고무령은 조금의 미련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싫다면 할 수 없지, 가자.”
미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는 듯 단호한 행동.
“잠깐!”
중년인은 다급히 독고무령을 불러 세웠다.
걸음을 멈춘 독고무령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중년인을 다그쳤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소. 그 대가로 만 냥을 더 받아낼 것이오. 물론 당신이 노력해서 그 시간을 줄인다면 한 번 더 생각해 보겠지만…….”
만 냥!
눈을 크게 뜬 중년인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내 즉시 사사자께 연락을 취하겠소.”
귀원장까지는 십오 리. 왕복으로는 삼십 리다. 그런데도 적수천은 정확히 삼 각 만에 도착했다.
그는 독고무령을 보고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악조응은 대체 뭘 하느라 연락이 없는 걸까?
암문의 뒤를 파헤친다며 떠난 지 나흘이 지났다. 그동안 연락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해서 독고무령에게 그에 대한 걸 물어볼 수도 없는 일.
그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로 이리 급하게 찾은 것인가?”
독고무령은 조금도 급할 게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왕성이 적사보로 간 이유를 알아냈소.”
적수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야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서연은 너무 거리가 가까워서 급전을 원치 않은 위지천백이 적사보를 택했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었다.
은룡산장 측에선 그 점을 이용할 수 있는 계책을 고심하는 중이었다. 전격적으로 전진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야금야금 밀고 들어갈 것인지.
하지만 독고무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게 이유의 전부라 생각하시오?”
“그럼 또 다른 이유가 있단 말인가?”
“저들이 적사보의 말 중 삼백 필을 골라서 남 몰래 훈련을 시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소?”
밀호방의 정보원에게서 들어온 소식 중 하나다.
남들이 보면 엉뚱한 짓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랐다. 강호의 고수들 싸움과 군병들의 전투는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위지천백이 그러한 일을 할 때는 그만한 목적이 있을 터.
적수천도 심상치 않은 일이라 생각했는지 눈매를 꿈틀거렸다.
삼백 필의 말은 적은 숫자가 아니다. 일류 이상의 무공을 지닌 고수에게 마상공격은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해도, 숫자가 삼백에 이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보게.”
“그 전에 먼저 거래를 할 것이 있소.”
독고무령이 중요한 대목에서 말을 돌리자, 적수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네 지금 나를 놀리려는 건가?”
“이미 한 번 이야기가 되어 있는 것이니, 다른 거래를 하기 전에 마무리를 짓자는 뜻이외다.”
“이야기가 되어 있다고?”
“모용소양이라는 아이 말이오.”
적수천은 화를 억누르고 차갑게 물었다.
“어떻게 마무리를 짓자는 말인가?”
독고무령은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청부자에게서 물건을 받았소. 귀하들이 원하는 게 이거라면, 거래를 이루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소만.”
적수천은 손을 뻗어 주머니를 당겼다. 그리고 매듭을 풀고 안에 든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손바닥 반쯤 되는 크기였는데, 가운데에는 푸르고 붉은 옥과 황금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봉황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적수천은 그걸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건…… 청홍봉황패?”
“나는 그게 뭔지 모르오. 다만 그걸로 아이를 구하고, 청부자로부터 이만 냥의 대가만 받으면 되오. 물론 돈을 주지 않는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줘야겠지만 말이오.”
적수천은 심각한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직시했다.
“자넨 너무 위험한 물건을 가져왔군.”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그게 뭔지 모르오. 그러니 거래를 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 그것만 말해주시오.”
여전히 똑같은 표정, 똑같은 말투다.
적수천은 바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죽이자니 암문의 정보가 필요하고, 살려두자니 위험이 뒤따른다.
“정말 이게 뭔지 모르나?”
“그대가 원한다면, 이 시간부로 그걸 본 적이 없는 걸로 하겠소.”
적수천은 이를 지그시 악물고 독고무령의 뒤에 서 있는 모용설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이 더 있군.”
“내가 잊으라면 잊을 것이오.”
“그래도 둘보다는 하나가 낫네.”
“나는 거래를 안 했으면 안 했지, 내 사람을 버리지는 않소.”
“꽤나 수하를 아끼는군. 단순한 수하가 아니던가?”
“그건 귀하가 알 바 아니오. 분명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이 사람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거요.”
적수천은 묘한 눈빛으로 독고무령을 쳐다보더니, 청홍봉황패를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좋아. 믿지.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알게. 만일 이 패에 대한 소문이 돌면, 나는 제일 먼저 그대를 의심할 거다.”
“좋을 대로.”
“그 아이는 어떻게 데려갈 생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