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58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58화
158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암천위는 자신들이 온 길을 따라 내려갔다.
그들은 여섯 구의 시신을 찾아서 구석에 묻고, 핏물이 고인 곳은 흙을 덮어서 흔적을 없앴다.
가장 먼 곳의 시신은 오 리나 떨어진 곳에 있어서 그 일이 끝나는데 반시진이나 걸렸다.
그 사이 독고무령은 악조응의 흔적을 지웠다.
자신에 대한 것을 조사하기 위해 뒤따라온 자들이다. 하루 정도는 연락이 끊겨도 바로 찾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들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기까지 적어도 이삼 일은 걸릴 터. 그 시간이면 많은 것이 바뀌어 더욱 찾기가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다. 비가 또 온다면 더 오래 걸릴 것이고.
‘적수천, 너는 내 상대가 아니다. 노태군이라면 몰라도.’
독고무령은 차가운 조소를 지은 채 그 자리를 떠났다.
* * *
달빛이 구름 사이를 흐르고, 밤새가 짝을 부르며 울어대던 해시 무렵.
둥! 둥! 둥! 둥!
북소리가 관제산의 어둠을 뚫고 울려 퍼졌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 제왕성 정문이 활짝 열리더니, 검고 푸른 무복을 입은 무사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저벅, 저벅, 저벅…….
철걱, 철걱, 철걱…….
들리는 건 일정한 발자국 소리와 무기가 흔들리는 소리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고 침묵의 걸음을 옮겼다.
위지천백은 제왕전 삼 층에 오연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검은색에 가까운 감색 비단 피풍의를 두르고, 황금과 청옥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고검 한 자루를 옆구리에 찬 그는 선발대가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달빛이 구름에 가려지며 더욱 짙은 어둠이 제왕성을 뒤덮을 즈음, 위지천백의 입이 열렸다.
“강호는 피가 끓는 곳이다. 남자라면 누구든 야망을 품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곳이지.”
그는 나직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의 옆에는 입을 꾹 다문 위지성이 서 있었다.
그는 아들의 활활 타오르는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강호는 뜨거운 만큼 험하다. 때로는 고난이 닥칠 때도 있을 것이고, 목숨이 경각에 달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누가 너를 도와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라. 도움을 받든, 네 스스로 해결하든, 그 순간을 어떻게 이겨내느냐 하는 것은 오직 너에게 달려 있다는 점을 명심해라.”
위지성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가슴에 묻어두고 짧게 대답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아버님.”
위지천백은 그런 위지성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많은 피를 밟고 이 자리에 섰다. 그로 인해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고, 권력을 얻기 위해서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는 말도 들었다.”
위지천백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위지성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무겁게 말을 이었다.
“너에게 나와 같은 길을 가라고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것만은 명심해라. 군주의 자리는 가슴이 차가운 자만이 차지할 수 있다는 걸.”
“예, 아버님.”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들은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기분!
위지성은 목이 메여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저도 아버지처럼 되고 싶습니다!’
위지천백은 어깨를 잡은 손을 통해 위지성의 마음을 읽고는 몸을 돌렸다.
‘너는 모를 것이다. 내가 어떤 굴욕을 당하며 살아왔는지…….’
매질을 견디며 주인이 던져준 먹이를 받아먹던 시절이 있었다. 보다 큰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선택한 굴욕의 세월.
위지천백은 그 일을 아들이 아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일을 아는 사람은 셋이면 족했다.
‘내가 세상을 취하려는 것은 그러했던 과거를 보상받기 위해서다.’
그리고 또 하나…… 아무도 모르는 이유가 있다.
이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이 아는 이유가.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 거다, 아들아.’
잠시 후, 위지천백은 위지성과 함께 마차를 타고 수백 무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제왕성을 나섰다.
그들은 밤길을 달려 관제산을 내려온 후 곧장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축시가 지날 무렵, 분하를 건넜다.
* * *
전날에 내린 비 덕분인지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쾌청했다.
태양이 쪽빛 하늘을 가르며 중천을 향해 줄달음질 칠 무렵, 운양으로부터 제왕성의 움직임이 전해졌다.
“예상대로 위지천백이 직접 일천의 무사들을 이끌고 제왕성을 나섰다 합니다.”
독고무령의 말이 떨어지자 통나무집 안이 묵직한 긴장감에 짓눌렸다.
은룡산장도 그렇고, 제왕성도 전력을 거의 다 끌어냈다.
당장 서로를 향해 칼을 들이대지는 않겠지만, 언제 어느 때 건곤일척의 일전이 벌어질지 모른다.
싸움이 벌어지면 그 결과에 따라서 산서 무림의 향방이 좌우될 것이고, 암천회의 미래도 결정될 터. 긴장이 되지 않으면 그것이 이상했다.
먼저 육풍원이 코를 씰룩이며 입을 열었다.
“서연으로 가겠지?”
우도진이 한마디 거들었다.
“지금쯤 거의 다 도착했을지도 모르겠군.”
그 말에 다시 장내가 조용해졌다.
그때 이호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어쩌면 서연으로 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육풍원이 고개를 모로 꼬고 이호를 바라보았다.
“왜?”
“서연의 대풍장은 귀원장과 너무 가깝습니다. 무작정 힘으로 밀어붙일 생각이 아니라면 위치가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그곳으로 갔다면 지금쯤 어떤 연락이 왔어야 하는데, 본방의 정보원 누구도 그들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서연과 우현 사이에 수십 명의 정보원이 깔려 있다. 간단한 사안을 전하는 것은 백 리 떨어진 곳도 반시진이면 족하다.
제왕성이 서연으로 향했다면, 이호 말대로 지금쯤 그들의 위치가 밝혀졌어야 했다.
독고무령도 일리가 있다 생각했는지 이호에게 물었다.
“그럼 어디로 갔을 거라고 보시오?”
이호는 통나무를 잘라 만든 탁자에 손으로 죽죽 선을 긋고 찻물로 점을 찍었다.
“여기가 서연이고, 여기가 우현입니다. 서연으로 가지 않을 경우, 그들이 갈만한 곳은 두 군데뿐입니다. 이곳에 있는 적사보와 여기, 궁검문이지요.”
“그대가 봤을 땐 어느 쪽으로 갔을 것 같소?”
“궁검문은 태원과 너무 가깝습니다. 물자조달에는 이점이 있지만, 대신 본회에게 뒤통수를 맞을 염려가 있습니다. 해서 저는…….”
이호는 말을 길게 끌며 약간 북쪽으로 처진 곳을 손가락으로 찍었다.
“그들이 이곳, 대우의 적사보로 갔을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대우(大盂)의 적사보(赤沙堡).
제왕성과 무천련의 싸움에서 중립을 지킨 문파. 보주는 적응(赤鷹) 상관호였다.
대동에 철마방이 있다면 대우에 적사보가 있다 할 정도로, 그들은 무력보다 산서 중부 최대의 마장(馬場)을 운영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들의 마필은 관에서 관리했는데, 그들이 제왕성이나 무천련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고 중립을 지킨 것도 그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하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위지천백이 직접 장소 제공을 요청했다면 그들로선 감히 거부할 배짱이 없었을 것이다.
독고무령은 이호의 말을 수긍하고 명을 내렸다.
“즉시 그곳 상황을 알아보도록 하고, 귀원장에 현 상황을 전하시오.”
“예, 회주.”
이호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데, 북리사웅이 쓸데없는 일을 한다는 투로 말했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굳이 말해줄 필요가 있겠소?”
“아직은 모를 거요.”
“그래도 우리가 소식을 전할 때쯤이면 알게 되겠지.”
“그렇다면 결국 그들보다 우리가 먼저 알았다는 말이 되오.”
“그게 무슨 소용이라고…….”
“자신들보다 우리가 먼저 알았다는 걸 알게 되면, 저들은 앞으로도 암문을 계속 필요로 하게 될 거요. 전쟁에서는 약간의 시간 차이가 생사를 가른다는 걸 잘 알 테니까.”
북리사웅은 그제야 독고무령의 말뜻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육풍원이 속으로 혀를 차며 북리사웅을 째려보았다.
‘모르면 가만히 있기나 하지. 쯔쯔쯔…….’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북리사웅은 표정만 보고도 육풍원이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걸 대충 짐작했다.
‘흥! 저놈이 그렇게 똑똑하면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지도 알겠지.’
그는 속으로 냉소를 머금고 슬쩍 장만익을 바라보았다.
<장로님, 제가 말하기 전에는 절대 저들에게 방에서 온 소식을 말하지 마십시오.>
<무슨 말인가?>
<그냥 제 말대로 해 주십시오.>
자신이 책임자이긴 하지만 북리사웅은 천룡방의 후계자다. 장만익은 일단 북리사웅의 말을 들어주었다.
<알겠네.>
북리사웅은 장만익에게 다짐을 받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더 할 말 없으면 그만 나가 보겠소.”
“그렇게 하시오.”
북리사웅은 독고무령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그때 철검위 중 두 사람, 모용설과 표은종이 방문 양쪽에 서있는 게 보였다.
그는 방문을 향해 걸어가며 모용설을 주시했다.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부드러운 눈빛으로.
“수고가 많소.”
목소리도 부드러웠다.
하지만 모용설의 두 눈에선 눈이라도 내릴 것처럼 싸늘한 눈빛만 쏟아졌다.
“별말씀을.”
말투도 딱딱했다.
‘빌어먹을 계집…….’
북리사웅은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났지만, 입가의 웃음을 지우지 않고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수고하시오.”
제2장 동행(同行)
휘이이이잉!
메마른 황무지를 거센 바람이 할퀴고 지나갔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선 황사구름이 들불처럼 피어오르고, 삽시간에 드넓은 고원의 하늘이 누렇게 물들었다.
누런 안개가 낀 듯한 광야(廣野).
이글거리는 태양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햇살.
제왕성의 무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 황량하고 삭막한 광야를 가로질러 동북쪽으로 이동했다.
마차 안에 있던 위지천백은 위지성을 바라보았다.
“좀 걷자.”
위지성이 조금 망설이는 투로 대답했다.
“밖에 바람이 제법 세서 먼지가 많이 피어오릅니다, 아버님.”
“그래서 걷자는 거다. 그게 산서의 진짜 모습이니까.”
위지천백은 마차가 달리고 있는데도 서슴없이 주렴을 걷고 마차 밖으로 나갔다.
위지성도 별수 없이 위지천백을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내린 순간, 누런 먼지가 확 밀려들었다.
인상을 찌푸린 위지성은 고개를 돌려 위지천백을 바라보았다.
감색비단 피풍의가 머리카락과 수염과 함께 휘날린다.
제왕성에서 봤던 때와 완전히 다른 모습.
숨이 막힐 정도다.
그가 바라보는 것을 알았는지 위지천백이 말했다.
“봐라, 저게 산서의 대지다!”
위지성은 앞을 바라보았다.
완만한 언덕을 거의 다 오른 상태. 대여섯 걸음을 미끄러지듯이 걸어 언덕 위에 선 순간, 눈앞이 환하게 트였다.
동시에 수백 개의 야산을 품은 광활한 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위지성은 알 수 없는 격동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보이는 것은 산서의 일부일 뿐이다. 산서는 보이는 것보다 수백 배 아니, 수천 배나 더 넓다.
저 광활한 대지를 말 한마디로 짓누르는 절대의 세력.
그곳이 바로 제왕성이며, 그 제왕성의 주인이 바로 위지천백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아버지의 아들이지!’
하거늘 어찌 심장이 뛰지 않으랴!
그때 한 사람이 다가왔다.
오십 대 초반에 마늘쪽처럼 생긴 묘한 눈매를 지닌 중년인. 그는 제왕성 십이 장로 중 하나로, 위지천백의 명을 받아 위지성에게 강호를 가르칠 풍객(風客) 사마초라는 자였다.
그는 위지성 옆에 나란히 서더니 북쪽을 가리켰다.
“저 북쪽 너머에는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이 있네. 그리고 또 그 너머에는 초원과 숲이 펼쳐져 있지. 이 세상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넓다네. 그리고 그곳에는 저마다의 꿈을 꾸는 자들이 있지. 나는 대공자가 좀 더 넓은 꿈을 지녔으면 하네.”
“남쪽도 북쪽만큼 넓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넓지. 하지만 남쪽은 북쪽과 다르다네. 무엇이 다른지 아는가?”
위지성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사마초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북쪽은 패기와 의지로 다스릴 수 있지만, 남쪽은 그것만으로 다스릴 수 있는 곳이 아니라네. 그곳에는 추악한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 자들이 너무 많아. 그야말로 구정물 같은 곳이지. 나는 그것이 싫어서 산서로 올라왔고 성주를 만났다네.”
묵묵히 걷던 위지천백이 입을 열었다.
“산서는 거칠다. 저 북쪽은 더하지. 그렇기에 남자가 야망을 품기에는 최고의 땅이다. 너는 알아야 할 것이니라. 이 거친 대지에서 야망이 없는 남자는 굴러다니는 돌멩이에 불과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