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5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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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0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55화
155화
구양소현은 멍하니 독고무령의 모습을 주시했다.
문득 철혈이라 생각했던 독고무령의 눈 깊은 곳에서 습기가 일렁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점 거짓 없는 진실.
독고무령의 가슴에 맺혀 있는 사연이 뭐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가슴까지 답답한 걸까?
‘정말…… 회주는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회주의 가슴에 뭐가 쌓여 있는지 알려주면 안 되나요?’
독고무령은 구양소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별빛이 바람에 날린 은가루처럼 흐른다.
죽으면 혼이 별 사이로 날아다닌다는데, 아버지의 혼도 저기에서 흐르고 있을까? ……어머니는?
바로 그때 유성이 긴 꼬리를 남긴 채 떨어지는 게 보였다. 마치 아버지가 ‘무령아, 나 여기 있다!’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독고무령은 잔잔한 웃음으로 응답하고 고개를 돌렸다.
“사혁, 떠날 준비를 하지.”
“어. 저…… 누님, 내가 올 때까지 식사 잘하고…… 어디 아프지 말고…… 에, 또…… 혹시 어떤 놈이 건들면 나중에 나한테…….”
구양소현이 주절거리는 진사혁을 째려보며 툭 쏘아붙였다.
“너나 잘해. 여기저기 다쳐서 만나러 오면 가만 안 둘 거야!”
진사혁이 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양소현이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해준 것만으로도 없던 힘이 솟는 기분이었다.
“걱정 마쇼. 회주만 아니면 누구든 자신 있수!”
구양소현을 제외한 호위무사대 전원이 모이자, 독고무령은 곧바로 풍운장을 빠져나와 동문으로 향했다.
동문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장추는 이십여 명이 어둠을 뚫고 다가오자 재빨리 성문을 열어주었다.
독고무령은 호위무사대와 함께 동문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제10장 노태군, 혈왕(血王)과 함께 태행산맥(太行山脈)을 넘다
독고무령 일행이 태원의 동문을 나설 즈음.
일천에 이르는 은룡산장의 무사들이 달빛에 의지한 채 태행산 낭자관(娘子關)을 넘었다.
낭자관은 태행산맥을 넘어 하북에서 산서로 들어가는 군사적 요충지로, 석가장 쪽에서 올라오는 동쪽은 경사가 심했다.
하지만 평정, 양천으로 내려가는 서쪽은 경사가 완만해서 쉬어가기에 적당한 곳이 많았다.
은룡산장의 무사들은 낭자관에 머물지 않고 곧장 서쪽으로 전진해서 쉴만한 곳을 찾았다.
길을 따라 내려간 지 오 리, 완만하게 경사진 드넓은 풀밭이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일천이 아니라 일만 명이라 해도 품을 수 있을 만큼 넓은 풀밭이었다.
무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걸음을 멈추고는 넓게 포진했다.
곧 네 명의 거한이 멘 교자(轎子) 하나가 십여 명을 대동한 채 풀밭의 중앙으로 들어섰다.
지붕이 있는 교자는 크고도 화려했다.
거한들은 그러한 교자를 멘 채 산을 올랐는데도 얼굴 하나 붉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교자가 중앙에 도착하고 거한들이 걸음을 멈추자, 무사들을 이끌던 자들 중 하나가 교자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오늘은 이곳에서 쉬시고, 아침에 출발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화려한 교자 앞을 가리고 있던 주렴이 옆으로 걷히고, 노태군의 하얀 얼굴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그리하도록 하자. 내려놓아라.”
노태군의 나직한 명이 떨어지자, 거한들은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동시에 교자를 내려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자 앞에 모닥불이 하나 피어오르고, 몇 사람이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노태군은 교자에 몸을 묻은 채, 오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조용히 앉아 있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모닥불의 불빛을 받아 하얀 얼굴이 붉게 보였다. 그리고 두 눈은 더욱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완벽해. 아주 제대로 만들어졌어.’
그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좌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위지천백에 대한 소식은 아직 들어온 것이 없느냐?”
노태군의 좌측에 서 있던, 마치 여인처럼 얼굴에 하얀 분을 칠한 중년인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공자와 넷째 공자가 먼저 가셨으니, 귀원장에 도착할 즈음이면 정확한 소식을 알 수 있을 것이옵니다.”
“흠, 그래? 유경, 너는 그가 직접 나설 거라고 보느냐?”
노태군의 좌우시위 중 하나인 좌시위 방유경이 대답했다.
“공노명마저 죽은 마당이니 그가 직접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흐음…….”
노태군은 수염도 없는 턱을 버릇처럼 쓸며 눈을 가늘게 좁히고 우측을 바라보았다.
소한과 노인 넷이 앉아 있었다.
파랗고 빨간 옷감을 누더기처럼 덧댄 옷을 입은 노인. 먹처럼 검은 천으로 온몸을 두른 노인. 평범한 유생처럼 생긴 얼굴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사이한 광채가 번들거리는 노인. 그리고 해골에 가죽을 씌운 듯해서, 흐릿하나마 눈이 불빛에 반사되지 않았으면 영락없이 시신으로 보이는 노인까지.
노태군은 네 노인을 보며 혀를 내밀어서 입술을 핥았다.
‘호홋, 오랜만에 세상에 나오니 즐거운가 보군.’
그때 네 노인 중 파랗고 빨간 누더기 옷을 입은 노인이 고개를 돌리더니 노태군을 보고 씩 웃었다.
“놈들이 우리의 기대만큼 강하면 좋겠는데…….”
“걱정 말게, 홍백.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거네.”
누더기 옷을 입은 노인, 청혈사(靑血邪) 홍백의 입가에 맺힌 웃음이 짙어졌다.
“클클, 강한 놈의 심장은 그 맛이 다르다오. 정말 기대되는구려.”
“곧 맛을 볼 수 있을 테니 차분하게 기다리게나.”
홍백의 옆에 앉아 있던 사이한 눈빛의 노인, 사령귀안(邪靈鬼眼)의 입술이 주름을 만들며 한쪽으로 삐죽 올라갔다.
“위지천백이란 놈이 사대천왕 중에서도 제일 강하다고 하던데, 그놈의 심장을 맛보려다가 네놈의 심장이 부서지지나 않을지 모르겠군.”
“훗, 사대천왕이고 뭐고 내 눈에는 애송이일 뿐이야. 내 걱정 말고 네놈의 눈알이나 조심해라.”
“아마 놈은 나와 눈이 마주치면 그 자리에서 엎드릴 거다. 킬킬킬…….”
두 사람이 허세를 부리며 떠드는 동안에도 먹처럼 검은 천을 두른 노인, 묵귀자(墨鬼子)와 해골 노인, 백골마존(白骨魔尊)은 조용히 앉아서 어둠만 노려보았다.
노태군은 그런 네 사람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어리석은 놈들. 위지천백이 그리 쉬운 놈이었다면, 내 어찌 네놈들을 다 데리고 나왔겠느냐? 네놈들은 그저 귀찮은 것들만 정리해주면 된다. 그놈의 목숨은 내 귀염둥이 소천이가 해결해 줄 것이니까.’
하지만 그는 네 노인을 바라보느라, 한쪽에 앉아 있는 청년의 눈빛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변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여기는 어딜까?’
청년, 장소천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조금 전까지는 대낮이었거늘, 그새 밤이 되었다.
갑자기 어둠이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미처 몰랐을 뿐.
그가 자신의 정신에 문제가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낀 것은 연공을 마치기 하루 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연공의 당연한 과정으로 알았다.
하지만 사부가 원하는 대로 연공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 순간,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연공을 완성했는데도 기억이 끊기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하루가 지나자, 그는 하나의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자신이 두 개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그는 그에 대한 것을 소한이나 사부에게 묻지 않았다.
사형제들의 죽음을 무심하게 쳐다보기만 하던 사부가 아닌가.
게다가 소한의 말에 의하면, 자신과 자신의 사형제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연공을 하다가 죽어갔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말해서는 안 된다는 본능이 그의 입을 봉해버린 것이다.
결국 장소천은 자신의 상황을 철저히 비밀에 붙이고 태연하게 행동했다.
자신이 한 일을 기억하는 것은 약 한 시진씩 하루에 두 번, 두 시진 정도. 나머지 시간은 아무 것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혼신을 다해서 기억을 더듬어 봐도, 뿌연 안개가 머릿속에 끼어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열 시진의 시간. 그 시간에 자신은 과연 무슨 일을 하는 걸까?
궁금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두려웠다.
자신에게 어떠한 힘이 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또한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는 기운이 끔찍할 정도로 사악하다는 걸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녕 괴물이 된 건가?’
장소천은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그냥 이대로 이곳을 벗어나서 어디론가 훌훌 날아가 버리고 싶었다.
문제는 그 시간이 기껏해야 한 시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기억을 잃은 후에는 사부의 부름에 반응해서 되돌아올지도 모른다.
더 두려운 것은, 자신의 정신을 완전히 억압하지 못했다는 걸 사부가 알게 될 경우다.
그럴 경우 사부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정신을 제압하려고 조치를 취할 것이다.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조치를.
‘아직 절망할 때가 아니다. 정신이 완전히 억압당하지 않은 걸 보면 뭔가 방법이 있을 거다. 그래도 정 안 되면…….’
노태군을 응시하는 장소천의 눈 깊은 곳에서 혈광이 번뜩였다.
‘모두가 함께 죽는 수밖에…….’
* * *
독고무령이 백천산에 도착한 것은 해가 뜬 후였다.
백천산에 있던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독고무령은 암천회와 천룡방의 간부들을 소집시키고는, 간략하게 태원에서 벌어진 일을 말해주었다.
모두가 대경한 표정을 지으며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육풍원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무사들을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독고무령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했다.
“은룡산장과의 싸움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어서 무사들을 대규모로 움직일 수 없을 겁니다. 그들이 바로 움직이지 않은 것만 봐도 당분간 태원을 공격하지 않을 것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독고무령의 말에 몇 사람은 안심한 표정을 짓고, 몇 사람은 그래도 염려가 되는지 표정이 풀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것을 일일이 설명한다는 것도 별 의미가 없는 일. 독고무령은 밀호방의 이호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화제를 바꾸었다.
“귀원장에서 연락이 왔소?”
적수천을 말함이다. 이호가 대답했다.
“다행히 그가 먼저 귀원장에 도착해서 약속을 잡았습니다, 회주.”
그는 간단하게 보고하고는, 조금 더 굳은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은룡산장의 본진이 낭자관을 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회주께서 그를 만날 때쯤이면 본진도 귀원장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독고무령은 물론이고, 주위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침내 때가 다가오고 있다.
먹구름이 스멀거리며 밀려드는 기분!
신경을 바늘 끝으로 찌른 것 같은 짜릿한 느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 위에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독고무령은 싸늘한 한광을 번뜩이며 자세한 것을 물었다.
“그들의 숫자는?”
“모두 일천쯤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 중 심상치 않은 자들이 상당수 끼어있다고 합니다.”
“심상치 않은 자들?”
“예, 회주. 모두 백여 명 정도 된다고 하는데, 멀리서 봐도 일반무사들과는 확연히 다르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이호가 심상치 않은 자들이라 할 정도면 그만큼 강한 자들이라는 말. 그리고 그러한 고수들이 대규모로 나왔다면 그들을 이끄는 자 또한 그만한 자격이 있는 자일 터였다.
“수장에 대한 것은 알아냈소?”
이호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들의 중간에 커다란 교자 하나가 끼어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은룡산장의 주인인 노태군이 직접 나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독고무령의 눈빛이 깊게 침잠되었다.
“노태군이 나섰다는 소식을 들으면, 위지천백도 직접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겠군.”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회주.”
침잠된 독고무령의 눈빛 깊은 곳에서 무채색의 기광이 일렁였다.
‘드디어 악룡이 굴에서 기어 나왔군.’
과연 이번 싸움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승패가 갈리려면 얼마나 걸릴까?
천하를 좌우하는 자들이다. 서로를 잘 알고 있다. 무작정 치고받는 싸움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탐색하고 견제하며 상대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난 후에야 검을 뽑아들 게 분명하다.
그게 며칠이 될지, 몇 달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문제는 그것이다.
싸움이 너무 오래 가서는 안 된다.
시간이 걸릴수록 저들은 암천회를 의식하게 될 테니까. 어부지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암천회를 먼저 제거하려고 할 테니까.
‘장기전보다 단기전이 되어야 승산이 있어!’
독고무령은 고개를 돌려 장만익과 북리사웅을 바라보았다.
“귀방에선 별 다른 계획이 없소?”
노태군까지 움직였다면 은룡산장의 뒤를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천룡방이 그러한 기회를 놓칠 리 없을 거라 생각하고 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장만익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리는 게 아닌가?
“그게 좀…….”
독고무령의 시선이 북리사웅을 향했다.
항상 자신만만하고 암천회를 우습게 알던 그의 표정도 장만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