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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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54화
154화
구양소현이 봤으면 비명을 질렀을지 모를 행동.
하지만 지금 침을 꽂은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꽂을 때와 조금 달랐다.
구양손의 가슴에 침을 꽂은 독고무령은 조심스럽게 구양손의 혈맥에 기운을 밀어 넣었다.
그렇게 일각이 지나자 창백하던 구양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독고무령은 구양손의 몸에서 손을 떼고, 검지를 꼿꼿이 세우고는 검이 관통된 부분을 죽 그었다.
“헛!”
뒤에서 바라보던 막위지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독고무령은 망설이지 않고 구양손의 복부에 진기를 주입했다.
순간 갈라진 부분에서 시커멓게 죽은피가 쿨럭거리며 뿜어져 나왔다.
잠시 후.
뿜어져 나오던 죽은피가 거의 멈추자, 독고무령은 재빨리 가죽주머니에서 돌돌 말린 가느다란 줄을 꺼냈다.
투영생사결(透映生死結)이라는 이름이 붙은 그 줄은 아버지가 매우 아끼던 것으로, 자신이 위급한 경우에 쓰기 위해 챙겨둔 것이었다.
독고무령은 투영생사결을 엉키지 않게 잘 풀어서 옆에 놓고, 두 손가락으로 구양손의 갈라진 복부를 벌렸다.
그러고는 죽은피가 빠진 곳에 잘린 내장이 보이자, 반투명한 줄에 진기를 주입하고는 잘린 내장을 빠르게 꿰맸다.
그리고 곧 바깥의 상처마저 꿰매고는, 다시 진기를 주입했다.
그 모든 게 끝이 날 때까지 막위지는 숨도 쉬지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독고무령이 구양손에게서 손을 떼자, 막위지가 자신도 모르게 더듬으며 물었다.
“괘, 괜찮겠느냐?”
“아직 모르겠습니다. 일단 급한 대로 조치는 했습니다만…… 남은 것은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요.”
“네가 그런 의술까지 지녔을 줄은 몰랐구나.”
진정 놀랍다는 말투.
하지만 독고무령은 쓰고 남은 줄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의술이 아닙니다.”
“의술이 아니라고?”
“죄수의 죽음을 연장하는 기술일 뿐이지요.”
그제야 막위지는 독고무령의 말뜻을 알아듣고 주름진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그때 주머니를 품속에 넣은 독고무령이 막위지에게 물었다.
“왜 저를 만나려 하신 겁니까?”
‘후우우, 불쌍한 녀석.’
막위지는 속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고 입을 열었다.
“우리…… 제왕성을 나오기로 했다.”
우리? 오로 모두를 말하는 듯하다.
“제왕성을 나오는데 왜 저를 찾으신 겁니까?”
“괜찮다면 너와 함께 있었으면 싶은데…….”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다.
독고무령은 막위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신 이유가 뭔지 모르겠군요.”
“아직 지팡이 짚고 다닐 정도는 아니니, 적으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다.”
적은 게 아니라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독고무령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지기만 했다.
부모의 죽음을 방관한 자들. 아무리 불가항력이었다 해도, 훗날을 위해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해도 그 모든 걸 수용하기에는 아픔이 너무 컸다.
“미안해서 그러는 거라면, 굳이 불편한 길을 택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막위지는 주름진 얼굴을 씰룩거리며 거친 숨을 뱉어냈다.
하지만 어쩌랴, 자신들의 업보인 것을.
그는 다시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황혼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후우우……. 오냐, 미안해서 그런다. 하지만 그보다는,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아서 나서려는 거다.”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니요?”
“이번 일은 무림에서 벌어지는 일반적인 상황과 다르다.”
“은룡산장이 동창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꼭 그들 때문만이 아니다.”
짧게 대답한 막위지는 착잡한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위지천백의 배후에 은룡산장이 있었다는 것은 너도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은룡산장이 왜 위지천백을 조종해서 전대 성주님을 몰아낸 줄 아느냐?”
솔직히 독고무령도 궁금한 사안이었다.
독고무령이 가만히 있자, 막위지가 자신이 아는 바를 이야기해주었다.
“북경의 서쪽을 산서가 틀어막고 있다 보니, 권력자들은 항상 산서에서 강호의 힘이 뭉치는 것을 우려하고 견제해 왔다.”
그것이 산서가 전사들의 대지임에도,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 강호의 대세력이 생기지 않은 이유였다.
그 이전에는 외세의 침공을 대신 막아줬기에 오히려 왕의 칭호까지 주었거늘.
“그런데 제왕성이 견제할 틈도 없이 급작스럽게 커져 버리니까, 당황한 그들은 어차피 견제하기에는 늦었다 생각하고 제왕성을 자신들의 수족으로 만들려 했지. 하지만 성주님께서는 일언지하에 그들의 뜻을 거절해 버렸다. 하아, 성주님께서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렇게 성주님이 자신들의 뜻을 거스르니 황궁의 수족인 은룡산장이 위지천백을 포섭했던 거다. 그리고 결국…… 지금 이렇게 된 거지…….”
황궁의 수족?
“그럼, 은룡산장 자체가 황궁의 세력이란 말씀입니까?”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다. 하북제일세라는 천룡방이 은룡산장을 지금까지 그대로 놔두고 있었던 이유도 아마 그걸 알았기 때문일 거다.”
독고무령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은룡산장이 황궁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하니 그 정도로 밀접할 줄이야.
‘어쩐지 적수천이라는 자가 관직을 아무렇지도 않게 운운하더라니.’
단순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과, 아예 황궁의 세력이라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들과 적대하면 역모로 몰릴 수 있다. 자칫하면 제왕성을 상대하기도 전에 암천회가 풍비박산 날지도 모른다. 어느 누가 역모에 끼어들려 할 것인가 말이다.
‘조심해야겠군. 잘못하면 엉뚱한 곳에서 일이 틀어지겠어.’
그러나 독고무령의 생각과 달리, 막위지가 걱정하는 것은 은룡산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은룡산장이 아니라 위지천백 이다.”
독고무령은 이마를 좁힌 채 막위지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입니까?”
“위지천백이 은룡산장과 전면적인 전쟁을 벌였다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그가 은룡산장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있을 리 없거늘…….”
만일 알고도 전쟁을 벌인 것이라면, 전대의 성주처럼 황궁과 거리를 두겠다는 걸까?
독고무령이 아는 위지천백이라면 당연히 그런 생각을 가질 터였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진정한 제왕이 되는 것!
그거야말로 패도를 걷는 자의 꿈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과연 그게 전부냐 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다른 욕심이 있다는 겁니까?”
“아직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몇 년 전부터 의심해왔던 건데, 그가 황궁의 어떤 세력과 모종의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위지천백이 황궁의 세력과?’
독고무령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막위지가 침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만약 우려가 사실로 드러나면 산서 무림이 통째로 위험에 처할지 모른다. 반대세력이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니까.”
정말 제왕성이 황궁과 관련되어 있다면, 반대세력은 대군을 동원해서라도 산서의 강호무림을 피로 씻으려 할 것이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막위지가 염려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독고무령은 그런 막위지를 똑바로 바라본 채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에…… 제왕성과 은룡산장이 동시에 무너진다면 어떻겠습니까?”
막위지의 눈이 한껏 커졌다.
너무나 엄청난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두 거대세력이 정면으로 맞붙은 상황에선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과연 그리되면 황궁이 조용할까?
“그래도 저들은 산서 무림에 어느 정도 책임추궁을 할 거다.”
“그럼 이러나저러나 그들의 분노가 산서를 휩쓸 거라는 말이군요.”
“양쪽이 이 상태에서 멈춘다면 그들도 손을 쓰지 않겠지.”
“그건 제가 원치 않습니다. 만일 그걸 원하신다면 더 이야기 할 것이 없습니다.”
단호한 어조. 한 점 동요 없는 눈빛.
막위지는 입을 다문 독고무령을 직시하고는, 넌지시 입을 열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독고무령의 심해처럼 깊어진 두 눈이 막위지를 향했다.
묘한 느낌.
왠지 몰라도, 막위지가 자신을 찾아온 목적 중 하나는 이어질 말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방법이 뭡니까?”
“네가 직접 북경에 가서 한 사람을 만나봐라. 그를 만나면 뭔가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막위지가 먼저 제왕성으로 떠났다. 시기를 봐서 나머지 네 노인과 함께 찾아가겠다는 말만 남긴 채.
독고무령은 구양손을 조심스럽게 안아들고 밀호방으로 옮겼다. 그때까지도 구양손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맙소사…….”
운양과 구양조 부부는 숨만 겨우 쉬고 있는 구양손을 보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된 거요, 회주?”
구양조가 다급히 물었다. 그도 내상이 심했지만 어찌 구양손에 비할 수 있을까.
막위지에 대한 것을 말하면 이야기가 길어질 터, 독고무령은 막위지의 정체는 밝히지 않고, 강호의 이인이 다 죽어가는 구양손을 구했다고만 했다.
“그분이 풍운장에 연락해서 다행히 최악의 경우만은 면했습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려서 향후의 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죽지는…… 않겠지?”
구양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나왔다.
구양학은 죽음을 당하고, 보주인 구양은은 행방이 묘연한 상태. 친형제들 중 자신의 옆에 남은 사람은 구양손뿐이다.
구양조는 하나 남은 동생을 잃는다는 게 두려웠다.
하지만 독고무령도 그에 대해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 당장 죽지 않게끔 손을 쓰고 내력으로 탁기를 태우긴 했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그가 생각할 때, 구양손의 생사는 닷새가 지나봐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마 자신이 닷새 동안 보살핀다면 살 수 있는 확률이 조금은 더 높아질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닷새가 너무나 중요한 시기라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독고무령은 진정으로 미안했다.
유백하의 주검을 내려다보던 그날처럼.
“일단 의원을 불러서 며칠 동안은 구양 대협의 치료에만 집중하게 해야겠습니다.”
독고무령은 그렇게만 말하고 운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지금 태원을 떠나야 하니, 자네가 좀 돌봐드리게.”
운양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우리가 들어간 비밀통로를 구양 대협이 탁자로 막지 않았다면 모두 죽었을 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쏟아 부어서 반드시 밝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네, 운양.”
* * *
풍운장으로 돌아온 독고무령은 진사혁을 찾았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라도 튀어나올 거라 생각했던 그가 보이지 않았다.
유원위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눈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있는 것 같던데요.”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더니, 유원위가 말하자마자 진사혁이 구양소현과 함께 건물 뒤쪽에서 돌아 나오는 게 보였다.
왠지 어깨가 축 처진 모습이었다.
독고무령은 진사혁과 구양소현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어보았다.
“무슨 일 있었나?”
“아니 뭐, 그건 아닌데……. 누님이 당분간 밀호방에 계신다고 해서…….”
진사혁이 우물거리자 구양소현이 진사혁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도 몸이 안 좋으시고 해서, 내가 아버지 곁에 있어드리려고요.”
그거야말로 오래 전부터 독고무령이 바라던 바였다.
“그렇게 하시오.”
구양소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독고무령을 흘겨보았다.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
물론 그런 면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독고무령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젖은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나에게 그럴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온다면, 나의 손에 세상이 쥐어지기 직전이라 해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