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5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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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8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53화
153화
언젠가 자신을 찾아온 자가 있었다. 자신이 잘못 안 게 아니라면, 그놈이 바로 암천사신이다.
그러니 어찌 걱정이 되지 않을까? 암천사신이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암천사신이 엉뚱한 일을 벌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일단 그를 먼저 제거하는 게…….”
“그럴 거였다면 나에게 남호종의 상흔을 보여주지도 않았겠지. 자신의 힘을 숨겨야 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게. 본좌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였다는 것은, 그 역시 함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뜻이니까.”
그때 단리황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천룡방이 끼어들었다는 소문도 있더이다, 성주.”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소. 그들은 은룡산장 때문에 끼어든 것이지, 절대 우리와 적이 되기 위해서 끼어든 것은 아니니까. 천룡방이 우리를 쳐서 이득 볼 게 뭐 있겠소? 이러나저러나 은룡산장에게만 좋은 일일 텐데.”
“흐음, 그도 그렇구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소. 자잘한 일은 은룡산장을 먼저 무너뜨리고 나서 정리하면 되니까. 무천련의 잔당이든, 암천사신이든!”
강하게 말을 맺은 위지천백의 몸에서 은은하면서도 웅혼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는 장내의 간부들을 둘러보며 힘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천하를 얻기 위해선 그 어떤 고통도 감내해야 하는 법. 태원의 일은 잠시 접어두고, 내가 직접 나서서 은룡산장을 무너뜨리는 일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오! 모두 만전을 기해주시오!”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예, 성주!”
장로와 간부들이 나가고, 남호종과 이정효는 업히다시피 한 상태로 치료를 받기 위해 의약당으로 옮겨졌다.
고요해진 제왕전에 홀로 남은 위지천백은 눈을 감았다.
눈앞에서 남호종의 가슴에 난 상흔이 어른거렸다.
‘대체 어떤 무공을 펼친 것인지 모르겠군. 능히 천벽의 무공에 비할 수 있는 높은 경지의 수법 같거늘. 으음…….’
그는 자신이 직접 보고, 남에게 듣고, 책에서 본 모든 상흔을 떠올려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남호종의 가슴에 난 상흔과 비슷한 무공을 찾을 수 없었다.
위지성이 찾아온 것은, 위지천백이 고개를 저으며 막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어쩐 일이냐?”
위지성은 단호한 표정으로 자신의 뜻을 밝혔다.
“은룡산장과의 싸움에 저도 출전하겠습니다, 아버님.”
위지천백은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위지성을 바라보았다.
피와 죽음만이 난무하는 전쟁터로 가겠다고?
아들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전에 아버지로서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너라도 있어야 네 어머니와 선유와 환아가 안심할 것이다. 허락할 수 없다.”
평소라면 물러났을 위지성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을 용납지 않고, 가족에게조차 냉정하게 대하는 분이다. 그나마 아버지에게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위지선유뿐.
이십수 년 간 명령식의 말만 듣고 자라온 그에겐 그런 아버지가 관제산의 거암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지기만 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러한 말이 나올 거라 각오하고 온 터. 이를 악문 그는 물러서지 않고 계속 자신의 뜻을 고집했다.
“소자의 나이 스물여섯입니다, 아버님. 언제까지 울타리 안에서만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신 역시 아들을 울타리 안에서 길러 키운 호랑이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험난한 산중의 대호!
그것이 바로 자신이 원하는 아들상이 아니던가.
그러나 염려가 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때 문득, 암천사신 독고무령의 나이가 아들과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너는 암천사신에 대해 아느냐?”
“예, 아버님. 본성에 있는 제 또래 청년들이 가장 꺾고 싶어 하는 이름이 바로 암천사신입니다. 심지어 선유도 알고 있으니까요.”
위지천백은 위지성을 직시했다.
‘제법 컸어.’
몰라보게 강해진 아들이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만큼 노력을 했다는 증거다.
언제 이렇게 큰 걸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다.
아마 남호종의 몸에 난 상흔을 보지 못했다면, 아들이 충분히 암천사신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아들은 암천사신보다 한 수, 아니 두 수는 아래였다.
“너는 그를 이길 수 없다. 아느냐?”
위지성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불만인 듯, 자존심이 상한 듯 그는 힘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아버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그러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고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그에게 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로선 부정하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억누르고 한 말이었다.
위지천백이 어찌 아들의 마음을 모를까. 그는 더 이상 아들의 기를 꺾지 않고 반 정도는 인정해 주었다.
“너는 천하의 수많은 네 또래 청년들 중에서 능히 손가락 안에 들 만큼 강하다. 그건 나도 인정하마. 하지만 세상에는 항상 예외란 게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위지성은 짧게 대답하고 위지천백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위지천백에게서 원하던 답을 얻어냈다.
“좋다. 네가 출전하는 걸 허락하겠다.”
위지성은 가슴에서 뜨거운 기운이 훅 솟구침을 느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버님……!”
“단, 네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야 하느니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위지성은 마치 신비의 세상으로 여행가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기껏해야 태원이나 임현, 흔주 등 관제산에서 하루거리 내에서만 돌아다닌 그다.
강호에 나가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어찌 흥분이 되지 않을까.
위지천백은 그런 위지성을 보고, 자신이 그동안 아들을 잘못 키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세상 멀리 나가서 온갖 풍파를 겪게 했어야 하는데…….’
그동안은 못했지만 이제부터라도 그리하면 될 일.
그는 아들에게 다짐을 받기 위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에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의 내용은 마음과 조금 달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함부로 개인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명을 어기면 그 즉시 성으로 돌려보낼 것이니라.”
“예, 아버님!”
아들이 힘차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인다.
위지천백은 자신이 말하고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일 수하였다면 ‘명을 어길 시 참형’이라는 말이 망설이지 않고 나왔을 것이었다. 그게 당연하니까.
‘허어, 아무래도 안 되겠어. 아주 고지식하면서도 강호의 경험이 풍부한 사람을 이놈 옆에 붙여놓아야지…….’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군, 그를 붙여놓으면 되겠어.’
* * *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독고무령은 검을 닦으며 완전히 어두워지기만 기다렸다.
동문의 위사가 등을 돌렸을지 모른다는 것은 오후에 확인했다. 위사장 장추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때의 상황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독고무령은 말만 듣고도, 장추가 그에게 속았음을 알 수 있었다.
회색 눈. 운양이 개눈깔이라 했던 자. 자신이 가슴에 손도장을 찍은 그가 고문을 했다고 했다.
상황으로 일단 겁을 주고, 그 후 약간의 고통을 주는 방법.
일반사람이라면 누구든 넘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독고무령은 그의 말을 다 듣고 나서, 한 번만 더 배신하면 동문의 성문 위에 머리가 걸릴 거라고 했다.
간밤의 사건을 알고 있는 장추는 독고무령의 바지자락이라도 잡을 것처럼 애걸하며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결국 장추는 두 번 다시 배신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동문으로 돌아갔다.
지금쯤 그는 초과근무를 자청한 채, 동문에서 자신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독고무령은 닦고 있던 검을 들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검집이나 검병이 평범해서 그렇지 철노가 신검이라 평한 검이다.
그토록 격한 싸움을 벌였는데도 검의 날은 한군데도 심하게 빠진 곳이 없었다. 날을 세우지 않아서 더 그런 것처럼 보였다.
독고무령은 면으로 감싼 채 검신을 쓰다듬으며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름을 지어줄까?’
이물이라 해도 자신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걷는 검이 아닌가. 그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수천(守天). 하늘을 지킨다? 그건 너무 거창한 것 같고……. 제마(制魔), 마를 멸한다? 내 자신이 정(正)이 아닌데, 그것도 좀……. 암령(暗靈)은? 흠, 암령이라……. 괜찮은 거 같은데?’
그때 밖에서 진사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령, 잠깐 나와 보게.”
독고무령은 암령이라는 이름을 속으로 되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는 꾀죄죄한 차림의 노인이 와 있었다.
“무슨 일인가?”
진사혁이 어깨를 으쓱 하고 눈짓으로 노인을 가리켰다.
“이 노인이 자네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네.”
독고무령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힐끔 독고무령을 보더니 품속에서 천으로 싸인 뭔가를 꺼냈다.
“어떤 분이 무령이란 분에게 이걸 전해주라고 해서…….”
독고무령은 노인이 건네준 물건을 받아보았다.
천을 풀자 작은 철패가 보였다.
순간 독고무령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이것은…… 구양 대주의 철패!’
철검보가 무너진 후 구양손에게 철패를 돌려주었다. 자신에게는 소용이 없지만, 구양손에게는 많은 사연이 있는 물건이 아니던가.
그 철패가 피 묻은 천에 싸여 다시 돌아왔다.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누가 준 거요?”
독고무령이 다급히 묻자 노인은 목을 자라처럼 쑥 집어넣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안에 글자가…….”
독고무령은 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을 활짝 펴보았다. 노인의 말대로 천의 안쪽에는 몇 개의 글자가 적혀 있었다.
[너 혼자 노인을 따라와라. 철패의 주인이 죽어간다.]
독고무령은 얼음장처럼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사혁,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 그때까지 출발을 미뤄주게나.”
“어? 어. 알았네.”
독고무령은 멀뚱하니 바라보는 진사혁을 놔둔 채 노인을 재촉했다.
“앞장서시오.”
* * *
노인은 독고무령을 북문 외곽으로 안내했다.
독고무령은 그곳이 어딘지 알고 눈살을 찌푸렸다.
‘여긴……?’
일전에 막위지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곳이다. 그럼 구양손을 데리고 있는 사람이 막위지란 말인가?
그의 의문에 답하듯 뒤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다.”
뒤돌아보자 막위지가 낡은 문을 열고 나오는 게 보였다.
독고무령은 막위지에게 다가가며 조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구양 대협은 어디 계십니까?”
“이 안에 있다. 들어와라.”
독고무령은 망설이지 않고 막위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따라오지 않고 문 앞에 퍼질러 앉았다.
그때 막위지가 허름한 방을 가리켰다.
“여기 있다.”
거적으로 대충 막아놓은 방 한쪽에 누워있는 사람이 보였다.
창백한 안색. 온통 피에 절은 옷.
구양손이었다.
다급히 구양손에게 다가간 독고무령은 구양손의 몸을 살피며 막위지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너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태원에 들어왔다가 제왕밀전의 놈들이 그 장원의 사람들을 도살하고 있는 걸 봤다. 내 정체가 들통 나면 일이 커질까봐 끼어들지도 못하고 지켜만 보는데, 마침 이 사람이 도망치려고 하더구나. 해서 일단 옷을 찢어 얼굴을 가리고 구하긴 했다만…… 설마 그곳이 너와 관계가 있는 곳인 줄은 몰랐다. 알았으면 조금 더 일찍 구했을 텐데…….”
검을 빼내는 충격에 정신을 차린 구양손이, 다시 정신을 잃기 전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독고무령을 찾기 위해 사방을 돌아다닌 막위지가 아닌가.
그가 구양손과 철검보 그리고 독고무령의 관계를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독고무령은 막위지의 말을 들으며 구양손의 옷을 벗겼다.
검에 관통된 상처가 한눈에 들어왔다.
막위지가 구양손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일단 관통된 검을 빼내고, 종일 내력으로 몸을 다스리긴 했다만, 너무 출혈이 많고 주요 혈맥이 손상되어서 살아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워낙 상태가 안 좋은 터라 어디로 옮길 수도 없고 해서 의원을 찾으러 나갔는데, 소문이 들리더구나. 암천사신이 나타났다고…….”
독고무령은 구양손의 상처 부근을 철저히 점검해 보았다.
막위지의 말대로 혈맥 몇 군데가 끊어져 있고, 내부 장기마저 몇 군데가 잘린 상태. 아직까지 숨을 쉬고 있다는 게 기적이라 할 정도의 상처였다.
아마 막위지가 계속 내공으로 다스리지 않았다면, 진즉 숨이 끊어졌을 게 분명했다.
품속에서 가죽주머니를 꺼낸 독고무령은 그중 몇 개의 침을 꺼내 서슴없이 구양손의 가슴에 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