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8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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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87화
187화
* * *
백천산에 접어든 위지성은 사마초와 함께 나란히 북서쪽 능선을 타고 달렸다.
‘암천사신 독고무령이 과연 그곳에 있을까?’
지금까지의 정보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그는 그곳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암천사신이라는 별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산서 제일의 풍운아. 무천련 잔당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 자. 도왕 영호진광조차 인정한 절대고수.
나이는 자신과 비슷하거나 조금 젊다고 했다. 그러한 나이에 그만한 위치에 오른 자가 몇이나 될 것인가?
조금은 부럽기도 하고, 조금은 질투도 났다.
일개 무천련의 무사가 제왕성의 소성주인 자신보다 더한 위명을 날리다니!
격한 호승심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그 혼자서 홍백과 묵귀자를 죽였다고 했으니, 자신보다 강한 것은 분명한 듯했다.
그러나 자신 역시 얼마 전의 위지성이 아니었다.
천고영약 제왕단을 복용하고, 그 기운을 아버지의 도움으로 온전히 흡수한 게 며칠 전이다.
그 덕분에 삼십 년 이상의 공력이 증진되면서, 도왕의 공격을 이십여 수 정도는 거뜬히 버텨낼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
지금이라면 암천사신을 이길 수는 없다 해도, 쉽게 패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장로님, 등 어르신은 어디 계십니까?”
위지성의 질문에 사마초가 대답했다.
“일반무사들 속에 끼어 있네. 필요할 때가 되면 나타날 것이니 걱정 말게.”
암천사신을 상대할 자는 따로 있다. 그 사람이 암천사신을 죽일 수 있을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 정도의 고수가 도주하려 마음먹는다면 천하의 누구도 쉽게 잡을 수 없으니까.
‘독고무령, 반드시 살아남아라. 너는 내 손에 무너져야 하니까!’
그를 이기고 천하에 새로운 별이 떴음을 알리리라!
위지성은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악다문 턱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같은 시각.
적수천은 서북쪽 능선을 타고 달렸다.
그는 위지성의 무위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강하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부상당한 상태의 헌원조에게 밀렸다는 말을 들었는데, 오늘 보니 온전한 헌원조라 해도 이길 수 있을지 모를 정도로 강해 보였다.
‘위지천백이 편법을 썼다면 가능한 일이다. 전쟁터에서 아들이 죽는 건 그도 원치 않을 테니까.’
영약을 복용시켰을 수도 있고, 몇몇 고수가 격체전력을 이용해서 공력을 높였을 가능성도 있다.
후계자인 위지성을 단시간 내에 강하게 만들 수 있다면 위지천백이 무엇을 마다하겠는가.
‘최대한 조심해서 작전을 펼쳐야 할 것 같군.’
적수천은 침중한 표정을 지은 채 추양양을 바라보았다.
“위지천백이 생각보다 강한 자들을 보낸 것 같소. 놈들과 마찰이 생길 경우 최대한 조심해서 상대하시오.”
“알고 있네. 하지만 너무 염려할 것은 없네. 혈왕이 합류하면 그걸로 놈들은 끝이니까.”
적수천의 눈빛이 깊어졌다. 혈왕의 진정한 무위를 본 적이 없는 그이기에, 혈왕이 얼마나 강한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노태군이 혈왕을 자신의 아래로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노태군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는 적수천으로선 실로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혈왕은 어디로 갔소?”
“모르겠네. 소한 말로는 적당한 때에 나타날 거라 하더군.”
적수천은 이마를 찌푸렸다.
어떤 작전이든 톱니처럼 맞물려 돌아가야 최대한의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법.
만에 하나 혈왕이 엉뚱한 짓이라도 한다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제길, 그가 있어야 암천사신을 막을 수 있을 텐데…….’
눈앞에서 셋째형인 황자악이 죽음을 당하고, 제왕성의 간부들 역시 그의 손에 목이 떨어졌다.
적수천은 지금도 가끔 그가 꿈에서 나타나면 몸서리를 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살기 위해서 도망치듯이.
사실 아무에게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에겐 위지천백보다 암천사신이 더욱 두려운 존재였다.
현재 은룡산장의 사람 중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혈왕뿐. 사정이 그러니 혈왕이 언제 나타나느냐에 따라 피해 정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혈왕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노태군과 소한뿐이어서, 그가 언제 나타날지 확실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이었다.
“정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일단 우리가 먼저 공격하는 수밖에. 내려가지요.”
제3장 혈풍은 백천산을 뒤덮고
“크크크크…….”
북리사웅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차피 암천회의 존망은 그에게 관심 밖이었다.
왜 천룡방이 그들을 위해 싸워야 한단 말인가?
‘암천회가 최대한 버텨주면 좋을 텐데…….’
암천회든, 제왕성과 은룡산장이든 상관없었다. 피해가 많이 날수록 천룡방에게는 이득이었다.
특히 암천사신! 그자가 죽으면 더없이 즐겁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있었다.
장만익은 땅에 달라붙은 다리를 억지로 떼어보지만, 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가슴에 잔가시가 박힌 기분. 귀에선 평생을 쌓아온 자신의 명성이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무인이라는 자존심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그였다. 신의를 저버린 무사는 흑도의 뒷골목 건달만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뒷골목 건달도 동료에 대한 의리만큼은 지키니까.
그런데 지금 자신은 어떠한가?
자신이 가장 경멸하는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대로는 안 돼!’
그는 저만치 앞서서 걸어가는 북리사웅을 향해 입을 열었다.
“소방주, 아무래도 안 되겠네. 내가 몇 사람을 데리고 가서 그곳의 상황을 좀 살펴봐야겠네.”
북리사웅은 자신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장만익에게 은근히 짜증이 났다.
그러나 팔대장로 중 한 사람인 장만익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
“몇 사람이 끼어들어봐야 달라질 상황이 아닙니다.”
“끼어들겠다는 게 아니네. 그냥 멀리서 상황이라도 보려고 그러는 거지. 적어도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정도는 알아야하지 않겠나?”
그렇다면 못 보내줄 것도 없었다.
“많은 사람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건 장로께서 이해해 주십시오.”
“알겠네.”
장만익은 처음에 자신과 함께 태원으로 갔던 사람들만 데려가기로 했다.
다행히 그들은 순순히 장만익의 말을 따라주었다.
“그럼 나중에 보세, 소방주.”
장만익이 굳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자, 북리사웅은 마지못한 듯 당부했다.
“조심하시고, 싸움이 대충 끝나는 거 같으면 바로 돌아오십시오.”
장만익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북리사웅은 길을 되돌아가는 장만익 일행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어차피 죽을 놈은 죽고, 살 놈들은 살 텐데, 왜 위험을 자처하겠다는 건지…….’
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움직이지 않자, 범여종이 나섰다.
“가시죠, 소방주.”
“그럽시다. 산을 완전히 빠져나가려면 아직 한참 가야 하니까.”
북리사웅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동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렇게 반각가량을 전진했을 때였다. 우거진 숲이 거의 끝나는가 싶더니 협곡이 나타났다.
깎아지른 절벽이 양쪽에 늘어선 협곡은 길이가 백여 장 정도 되어 보였는데, 그 사이로 소롯길이 나 있었다.
북리사웅은 협곡을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저 협곡만 빠져나가면 지겨운 산속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흠, 저곳만 빠져나가면 바로 평정 쪽으로 빠질 수 있겠군. 갑시다, 범 단주.”
“예, 소방주. 일조와 이조가 앞장서라!”
비룡단의 일조와 이조 사십여 명이 협곡으로 들어갔다.
북리사웅과 범여종은 그 뒤를 따라가고, 뒤쪽은 백이십여 명의 비룡단 무사들이 맡았다.
얼마를 갔을까. 그들이 협곡을 거의 빠져나갔을 때였다.
선두를 선 비룡단 일조이 무사들 중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너는 누구냐!”
메아리친 목소리가 잦아들 즈음, 북리사웅과 범여종이 일조와 이조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북리사웅은 전면을 바라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협곡이 끝나가는 지점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많이 봐줘야 이십 대 중반의 청년이었는데, 햇빛을 받아서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백의가 왠지 모르게 섬뜩했다.
아마도 일조와 이조가 걸음을 멈춘 것은 그의 기이한 분위기 때문인 것 같았다.
“다른 놈들은 없는 것 같은데, 적이 아닌가?”
북리사웅이 중얼거리자 범여종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매복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내가 봐도 그런 것 같군요. 치워버리고 가지요.”
“예, 소방주.”
살짝 고개를 끄덕인 범여종이 백의청년을 향해 소리쳤다.
“너는 뭐하는 놈이냐! 비키지 않으면 치도곤을 당할 것이니 썩 비켜서라!”
하지만 백의청년은 하얗게 웃기만 할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노경! 봐줄 것 없다! 막으면 죽이고 지나간다!”
일조 조장 노경이 힘차게 대답했다.
“예, 단주!”
그 순간, 백의청년의 입가에 매달린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훗, 죽이고 지나간다고? 그것도 재미있겠군.”
몰려오는 자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까, 아니면 죽여 버릴까?
하지만 범여종의 그 말을 듣자 고민이 말끔히 가셨다.
그는 기분 좋게, 앞에 있는 자들을 모조리 죽인 후 지나가기로 결정했다.
피로 물든 길을 따라서!
혈왕답게!
“백 명이 넘는군. 그럭저럭 손은 풀 수 있겠어. 후후후후!”
그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노경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찰나, 시뻘건 안개가 그의 전신에서 안개처럼 흘러나왔다.
“영광으로 알아라, 혈왕의 손에 죽는 것을! 크크크크크!”
* * *
스산한 기운이 양쪽 산줄기를 넘어 계곡 안으로 밀려들었다.
스으으으으…….
수억 마리 개미가 마른 낙엽 위를 달려가는 듯하다.
소름이 돋는 소리.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린지, 아니면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적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독고무령은 남쪽 산자락에 삐죽 솟은 바위 위에 서서, 계곡 안으로 밀려드는 자들을 바라보았다.
수백의 기운이 계곡 양쪽을 가득 메우고 밀려든다.
새소리도 바람소리도 죽어버린 백천산에 남은 것은 인간의 뜨거운 숨결과 살기뿐이다.
그가 바라보는 사이, 계곡 양쪽의 산자락에서 제왕성과 은룡산장의 무사들이 까마귀 떼처럼 날아들었다.
무려 육백에 이르는 무사들이 움직이는데도 그 소리가 바람소리보다도 작았다.
그들은 공지로 나오자마자 곧장 계곡 가장자리에 늘어선 통나무집을 향해 달려갔다.
통나무집 근처에는 삼십여 명의 무사가 태평스럽게 오가고 있었다. 아직 자신들의 공격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위지성은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흐름을 알고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첩첩산중 깊은 곳에 숨어 있다고 해도 그렇지, 경비조차 제대로 세우지 않다니.
저런 오합지졸을 염려한 부친을 생각하니 쓴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가 미처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적수천도, 은룡산장의 무사들도 몰랐다.
통나무집 앞에서 얼쩡거리던 사람들은, 집이 비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남아 있던 호위무사대와 일부 암천단의 단원들이었다.
통나무집 근처에서 오락가락하던 그들은 제왕성과 은룡산장의 무사들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적이다! 적이 쳐들어왔다!”
그리고 허둥대는 몸짓으로 남쪽을 향해 달려갔다. 독고무령이 있는 곳으로.
제왕성과 은룡산장의 무사들은 그들을 놔둔 채 통나무집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들이 통나무집 앞의 넓은 공터에 막 당도했을 때였다.
거의 동시에 추양양과 사마초가 소리쳤다.
“통나무집은 빈집이다!”
“속았다! 뒤를 조심해!”
바로 그때.
암천단과 무천단의 무사들이 숲속에서 튀어나왔다.
동시에 백여 발의 화살이 공터에 모여 있는 제왕성과 은룡산장 무사들을 덮쳤다.
쉬쉬쉬쉭!
전면에 있던 자들은 일일이 화살을 쳐냈다.
그러나 안쪽에 있던 사람들은 시야가 막혀서 화살을 걷어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활에 관한 한 모두가 일류라는 전궁산장의 무사들이 쏘아대는 화살이다. 더구나 활은 전궁산장에서 특별히 제조한 강궁이었고, 화살 자체도 모두 철시였다.
퍼버벅!
“크윽! 이런 빌어먹을…….”
“비켜! 컥!”
순식간에 이십여 명이 신음과 비명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제왕성과 은룡산장의 무사들은 악을 쓰며 화살을 쳐냈다.
“약은 놈들이 미리 알고 숨어 있었구나!”
“거리를 벌리고 대항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