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8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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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86화
186화
“그대가 선화에서 벌인 일은 이십 년이 아니라 백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거요. 어쨌거나 미처 몰랐구려. 그대가 은룡산장에 있었다니.”
“클, 너는 누구냐? 누군데 내가 한 일을 알고 있는 거냐?”
“사마초. 친구들은 풍객이라 불러주고 있소.”
추양양의 가는 입술이 살짝 비틀어졌다.
과거 그는 북경 서북쪽 있는 한 장원의 사람 삼백오십 명을 처참하게 살해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죽인 자들의 머리를 베어 대나무에 꽂은 뒤 마을 입구에 세워두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들이 그의 가족을 몰살시킨 원수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사실은 알지 못한 채 그를 흉악무도한 살인마로 몰았다.
그는 굳이 변명하지 않고 자신에게 덤벼든 사람들은 무조건 죽였다.
그렇게 삼 년. 그에게 죽은 사람이 오백을 넘어갈 무렵 그의 모습이 강호에서 사라졌다. 노태군의 그늘 아래로 들어간 것이다.
“안다는 것이 때론 독이 될 때도 있는 법이지. 쓸데없는 생각으로 일을 그르치지 않았으면 좋겠군.”
“나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오. 그저 당신이 은룡산장에 있다는 것에 놀랐을 뿐.”
“클, 그건 다행이군.”
두 사람은 한 치도 밀리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때 위지성이 입을 열고 나섰다.
“우리는 과거 일을 논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과거 일은 접어놓고 오늘의 일을 논의합시다.”
적수천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적이었던 사이지만, 공동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손을 잡은 이상 최선을 다해야 했다.
“암천회를 제거할 때까지 쓸데없는 분란이 없었으면 좋겠소.”
위지성이 담담히 받아쳤다.
“그대들만 허튼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모든 일은 계획대로 될 것이오.”
적수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자신이 알고 있는 위지성보다 강하게 느껴진다.
그동안 우리 눈을 속인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
하지만 아무런 표도 내지 않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걱정 마시오. 그렇게 멍청한 생각을 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으니까.”
“다행이구려. 남자라면 자신이 한 말은 지켜야 하는 법. 귀하의 말을 믿겠소.”
적수천은 위지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 기분이 언짢았다.
‘건방진 놈! 어디 그 기분이 어디까지 가나 보자!’
그래도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놈들이 백천산에 숨어 있다고 했소?”
“그렇소. 물론 그들이 전부는 아니오. 태원에 잔당들이 더 있으니까. 하지만 백천산에 있는 자들만 처리하면 나머지는 그리 염려할 정도는 아니오. 암천사신을 비롯한 주력이 대부분 그곳에 있으니까 말이오.”
“그들 중에 천룡방의 무사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소?”
“당연히 알고 있소. 대충 이백 정도 된다고 하더군요.”
“그들은 우리가 맡겠소.”
아무래도 암천회보다는 천룡방의 이름이 더 무겁게 들릴 수밖에 없다.
위지성도 마다하지 않았다.
“좋으실 대로.”
* * *
“회주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호의 목소리다. 평소와 달리 평정이 깨진 다급한 목소리.
무심천지연(無心天地然)의 문을 열기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던 독고무령은 태천일심의 기운을 풀고 눈을 떴다.
“들어오시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이호는 앉을 시간도 없다는 듯 다급히 말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놈들의 행적이 수상합니다, 회주!”
이미 몇 가지에 대한 소식은 들었던 터다.
제왕성의 무사들이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것. 은룡산장의 무사들이 빠르게 남하하고 있다는 것 등등.
독고무령은 그들이 또 한 번의 격전을 위해 움직인 거라 생각했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움직임이었으니까.
그런데 이호의 표정으로 봐서 뭔가 변동이 생긴 것 같았다.
“자세히 말해 보시오.”
“놈들이 능정 쪽으로 가지 않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방향을 틀었다 합니다.”
“방향을 틀었다고? 어디로 말이오?”
이호가 입술을 씹으며 대답했다.
“남동쪽으로 향했다 했으니…… 아무래도 우리 쪽으로 오는 것 같습니다.”
그제야 독고무령의 표정도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함께 말이오?”
“지금까지 들어온 정보로 봐서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방향이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 세력이 결국 만나긴 했는데 싸우지 않고 함께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독고무령은 무심한 눈으로 이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호는 주먹을 움켜쥐고 소신껏 말했다.
“속하의 생각으로는, 어부지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 저희를 먼저 제거하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독고무령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끝내 손을 잡은 건가?”
앙숙처럼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던 자들이 손을 잡은 것 같다.
독고무령도 두 세력이 암천회를 없애기 위해 합작할지 모른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위지천백과 노태군은 효웅이라 할 수 있는 자들.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한시적으로 손을 잡을 수 있는 자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설마하니 이렇듯 전격적으로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너무 빨라.’
분명 위지천백이 먼저 제안했을 것이다.
뜻은 하나.
암천회를 먼저 제거하고 건곤일척의 결전을 벌이겠다는 것!
어쨌든 그들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건, 자신들이 있는 장소를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백의 인원이 생활했다. 식량만 해도 외부에서 적지 않게 들여왔다. 아무리 조심했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식으로든 정보가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상대는 산서의 절대자, 제왕성이 아닌가.
자신과 이호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시간이 없다.
독고무령은 단호한 표정으로 이호에게 명을 내렸다.
“당장 사람들을 모으도록 하시오. 긴급회의를 열어야겠소.”
“예, 회주!”
“그리고 사람을 태원으로 보내서, 혹시 모를 상황에 철저히 대비하라고 하시오.”
이호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암천회를 제거하기로 작정한 이상 태원 역시 위험했다.
“알겠습니다.”
사람들이 대충 모이자, 독고무령이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통나무집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삼괴마저 눈만 껌벅거리며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독고무령은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고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현재 파악된 숫자는 육백 정도. 또 다른 적이 움직였다는 말은 아직 없는 상탭니다.”
나호민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차라리 이곳을 비우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어떻겠소, 회주?”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놈들이 이미 백천산 근처까지 와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기에는 늦은 것 같습니다.”
육풍원이 다급히 물었다.
“놈들이 어디쯤 왔는데 늦었다고 하는 건가?”
이호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조금 전, 백천산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아마 지금쯤은 산을 넘어 이곳으로 접근하고 있을 겁니다.”
쾅!
통나무 탁자를 내리친 육풍원이 이를 갈았다.
“제길! 그 여우같은 놈들이……!”
하지만 지금은 그들을 욕하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독고무령이 빠르게 명을 내렸다.
“다행히 이곳의 지리는 누구보다 우리들이 잘 압니다. 흐트러지지 않고 각자 한 방위씩 맡아서 적을 상대한다면, 놈들은 결코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설자웅이 냉랭히 코웃음을 치며 한마디 했다.
“흥! 우리도 오백이 넘습니다. 적의 숫자가 육백 정도라는데, 까짓 거 이 기회에 놈들을 모조리 늑대 밥으로 만들어버립시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였다.
통나무집의 문이 덜컹 열리는가 싶더니, 한무종이 안에 대고 소리쳤다.
“놈들이 계곡 입구에 들어섰다 합니다, 회주!”
입구까지는 이십 리 정도.
강호의 고수들에게 그 정도 거리는 금방이었다.
그때 벌떡 일어난 북리사웅이 호기롭게 소리쳤다.
“우리가 동쪽을 맡겠소이다!”
독고무령은 고개를 끄덕이고 육풍원과 설자웅을 바라보았다.
“좋소. 그럼 동쪽은 천룡방이 맡고, 암천단이 북쪽을, 무천단과 전궁산장이 서쪽을 맡아주십시오. 제가 호위무사대와 함께 남쪽을 맡으면서 상황에 따라 대처하겠습니다. 즉시 수하들을 이끌고 각자 맡은 방위로 가 주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소, 회주!”
“빨리 가세!”
북리사웅은 일단 장만익과 함께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곧 범여종이 수하들을 집결시키고 안으로 들어와 보고했다.
“모두 모였습니다.”
장만익이 북리사웅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세!”
북리사웅은 냉소를 머금은 채 장만익을 바라보았다.
“이제 철수하지요.”
장만익의 눈이 커졌다.
“무슨 말인가?”
“어차피 철수 명령이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랬다. 북리사웅이 미루고 미루어서 여태 철수를 안 하고 있었을 뿐.
문제는 당장 적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놈들이 공격해올지 모른다는데, 지금 철수하면 어떡한단 말인가?”
하지만 북리사웅은 암천회의 사정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두 세력이 손을 잡고 쳐들어오면 승산은 희박합니다. 이기든 지든 본방으로선 이익 될 게 없지요. 적을 물리친다 해도 황궁의 압박이 더 심해질 테니까요. 암천회를 위해 우리가 곤란해질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혹시나 강호의 도의를 말하실 생각이라면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각자의 이익을 위해 손을 잡았을 뿐입니다. 우리가 직접 암천회를 친 것도 아닌데 왜 죄의식을 가진단 말입니까?”
“으음…….”
장만익이 눈살을 찌푸린 채 고뇌하는 표정을 짓자, 북리사웅이 더욱 기가 살아서 열변을 토했다.
“우리는 할 만큼 했습니다. 아버님께서도 후퇴하는 것을 옳다고 여기실 겁니다. 어쨌든 은룡산장의 세력을 줄이는데 노력했지 않습니까?”
은룡산장은 천 명이 넘는 무사들이 소실되었다. 엄청난 피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물론 대부분이 제왕성과 싸우느라 그리된 것이지만, 그래도 우현 서쪽 계곡의 싸움에서 한 팔을 거든 것만큼은 사실이 아닌가 말이다.
장만익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래도 말없이 이렇게 떠난다는 것은…….”
북리사웅은 장만익의 말을 끊고는 빈정거리듯이 반문했다.
“말하면 보내줄 것 같습니까?”
입술을 질겅이던 범여종이 북리사웅의 말을 거들었다.
그에게는 암천회보다 소방주인 북리사웅을 보호하는 게 더 중요했다.
“소방주께서 그리 생각하셨다면, 공연히 내부 분란이 일어나는 것보다는 조용히 떠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장로. 어차피 시일이 늦춰졌을 뿐, 떠날 것 아니었습니까?”
장만익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허어, 거참…….”
북리사웅이 더 말할 것 없다는 듯 자신의 계획을 밀어붙였다.
“일단 우리가 동쪽을 맡기로 했으니, 동쪽 숲에 몸을 숨기는 것처럼 하면서 그대로 산을 넘어가지요. 서두른다면 적의 얼굴도 보지 않고 떠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일만큼은 제 결정을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장로님.”
장만익이 비록 이번 일의 책임자라 해도 소방주인 북리사웅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무사의 자존심이 그를 쉽게 돌아서지 못하게 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장만익은 어깨가 무겁게 느껴졌다. 가슴에 뭔가가 꽉 들어찬 것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나 북리사웅의 결심이 확고한 이상 자신 혼자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할 수 없지. 소방주가 정 그리 생각한다면…….”
장만익마저 굽히자, 북리사웅이 몸을 돌렸다.
“가시지요.”
걸음을 옮기는 그의 입가에 짙은 조소가 떠올랐다.
‘독고무령, 저들은 분명 너에 대한 것을 모두 감안하고 사람을 보냈을 것이다. 네가 아무리 강해도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걸? 어디 한번 재주껏 살아나봐라. 후후후후, 네가 죽어도 모용설은 내가 최대한 아껴줄 것이니 걱정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