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8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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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8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85화
185화
눈살을 찌푸린 그가 영호진광의 도를 바라보는 동안, 십여 명의 진가철방 사람들이 앞으로 나섰다.
“저희가 상대하겠습니다, 가주! 물러서지요!”
형형한 안광을 번뜩이며 곤을 빼어드는 사람들.
그들은 대부분이 삼사십 대로, 진가철방의 중심을 이루는 중견야장들이었다.
하지만 우려해야 할 사람은 영호진광만이 아니었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자들이군.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반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는 수밖에!”
냉랭히 소리친 백리환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쌍장을 휘둘렀다.
고오오오!
백리환의 쌍장에서 웅혼한 기운이 흘러나오며 진가철방 사람들을 압박했다.
대경한 진관호가 다급히 소리쳤다.
“너희들이 상대할 자가 아니다! 뒤로 물러서라!”
하지만 이미 백리환의 장력은 진가철방 사람들을 향해 밀려가고 있었다.
우르릉!
응축된 대기가 뒤틀리며 벽력음이 울렸다.
직접적으로 부딪치지 않았는데도, 진가철방의 사람들은 바위에 짓눌린 사람처럼 이를 악물고 뒤로 밀려났다.
“물러서!”
안 되겠다 싶었는지, 진관호가 훌쩍 몸을 날리며 두 손을 다급하게 휘저었다.
콰릉!
굉음이 일며 백리환과 진관호의 장세가 다섯 자 간격을 두고서 정면으로 격돌했다.
진관호는 눈을 부릅뜬 채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두 팔이 시큰거리고, 가슴이 둔기로 얻어맞은 듯 답답했다.
엄청난 장력!
짐작했던 것보다 더 강하다.
대체 저자가 누군데 이리도 강하단 말인가?
‘좋지 않아. 아무래도 길보다는 흉이 많겠군.’
놀란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백리환도 진관호가 큰 충격을 받지 않은 듯 보이자 새삼 위지천백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법이군. 일개 철방의 주인이 나의 장력을 맞받고도 멀쩡하다니.”
진관호는 그의 말을 들으며 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뒤에 서 있던 청년 하나가 두 개의 곤을 진관호의 손에 얹어 주었다.
먹처럼 검은 곤은 길이가 각각 두 자 정도 되었는데, 오리 알보다 조금 굵었다.
진관호는 백리환을 바라보며 두 개의 곤을 연결했다.
“진가는 힘에 눌려 자존심을 꺾지 않는다. 천하의 누구에게도…….”
그가 곤을 연결하며 입을 열자, 진가철방의 장로들도 각자의 무기를 꺼내며 좌우로 거리를 벌렸다.
진원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영호진광의 손에 들린 도를 바라보며, 옆구리에 걸린 짧은 단곤(短棍)을 꺼내들었다.
길이는 두 자가 조금 못되는 정도. 시커먼 쇠로 만들어진 철곤이었다.
곤을 그러잡은 그는 영호진광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건 백령천도. 그렇다면 그대가 도왕 영호진광인가?”
포위하고 있던 진가철방의 모든 사람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진관수를 일도로 물리치는 걸 보고 엄청나게 강한 고수라는 것은 짐작했다.
그렇다 해도 설마 사대천왕 중 한 사람인 도왕일 줄이야!
영호진광은 도를 옆으로 늘어뜨린 채 진원정을 바라보았다.
“나를 알아보았다면, 오늘 당신들의 선택이 얼마나 잘못된 건지도 알겠구려. 아! 하나 더 말하자면, 저분은 백리환이라는 분이라오.”
“백리환? 붕천신장, 장왕 백리환?”
사대천왕 중 두 사람이 왔다. 위지천백이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는지 알 듯하다.
진원정은 돌덩이처럼 굳은 얼굴로 몇 마디 씹어 뱉었다.
“선택이 잘못되었다? 글쎄, 쉽지는 않을 게다.”
영호진광의 두 눈에서 한광이 쏟아졌다.
자신과 백리환의 정체를 알고도 별 다른 동요가 없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건가?
그는 자신들의 이름에도 수그러들지 않는 진가철방의 고집이 오만하게 느껴졌다.
은은히 끓어오르는 분노.
가슴이 뜨거워진 그는 백령진기를 끓어 올려 가슴을 차갑게 식혔다.
“두고 보면 알겠지.”
순간, 영호진광의 몸에서 백색 기운이 안개처럼 피어나고, 백령천도의 도신에서도 서릿발 같은 한광이 번뜩였다.
바로 그때, 한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억!”
진가철방의 청년 하나가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달려들었다가, 중년도객의 칼에 가슴이 갈라진 것이다.
심장어림에서 뿜어지는 피분수!
피를 보자 팽팽하게 당겨졌던 실이 갑자기 뚝 끊어졌다.
“사문아! 이놈들!”
진가철방의 원로 중 한 사람인 진원각이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피를 뿌리며 쓰러진 청년이 바로 그의 손자였던 것이다.
살얼음 위를 걷던 상황이 순식간에 혼돈으로 변해버렸다.
진가철방의 사람들은 진원각이 움직이자 반사적으로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자만에 젖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도왕과 장왕이 왔다.
그들과 함께 온 자들도 모두가 고수들이다.
자만은커녕 이기지 못하면 죽는다는 절박감에 혼신을 다해 손을 썼다.
영호진광이 도를 앞으로 내민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가 도를 그어 올리자, 도첨에서 백색도광이 폭사되었다.
이 장의 거리가 있는데도 살이 갈라지는 느낌이 들 정도의 날카로운 예기가 밀려든다.
진원정은 곤을 들어 빠르게 내리쳤다.
떠더덩!
귀청이 멍멍할 정도의 둔중한 타격음!
진원정은 바위처럼 굳은 표정으로 두 걸음을 물러섰다.
반걸음 정도 밀린 영호진광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도를 다시 들어 올렸다.
순간 백색도신을 타고 은은한 백광이 죽 뻗어나갔다.
도왕의 공세에 휘말리면 벗어나기 힘들 것은 자명한 일.
진원정은 도세를 벗어나기 위해 전 공력을 끌어 올렸다.
시커먼 묵광이 피어오른 철곤이 도세의 중심에 떨어졌다.
쾅! 콰광!
연속된 굉음에 귀청이 먹먹하고, 그 충격이 뼛속까지 울렸다.
‘과연 도왕!’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영호진광은 멈추지 않고 진원정을 몰아붙였다.
순식간에 사오 초가 흐르며 진원정의 안색이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그가 밀리자 조카인 진관악이 합세했다.
“숙부님! 조심하십시오!”
그가 합류한 덕에 찰나나마 숨 쉴 틈을 얻은 진원정은 내력을 모조리 끌어 올리고 영호진광을 공격했다.
그때 영호진광의 도에서 백광이 번쩍이며 허공을 길게 갈랐다.
허공을 둘로 가른 한 줄기 백선은 진관악마저 갈라버렸다.
“끄윽!”
대처할 틈도 없이 진관악의 가슴이 쩍 벌어지고, 피분수가 가슴어림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놈!”
진원정은 노호성을 내지르며 영호진광을 향해 곤을 내리쳤다.
철곤 끝에서 솟구친 묵광이 백색도광을 후려쳤다.
쾅!
그가 지난 십 수 년 간 정진한 무음관천이었다.
뒤로 두 걸음이나 밀린 영호진광은 뜻밖이라 할 정도로 강력한 일곤에 눈을 부릅떴다.
진원정은 무음진천을 펼치느라 격탕된 진기를 수습할 겨를도 없이 두 번째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영호진광은 흔들리긴 했어도 큰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진원정을 얕보지 못하고 구성의 내력으로 진원정의 공세에 역공을 퍼부었다.
쩌저정! 콰광!
“크으읍!”
삼 초 만에 진원정이 와락 일그러진 얼굴로 정신없이 물러섰다.
‘기회!’
영호진광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백령천도를 휘둘렀다.
한 마리 백룡이 포효하며 허공을 가로지르고, 찰나 간에 진원정을 휘감은 백룡은 진원정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콰아아아!
진원정이 위기에 처하자 서너 명의 진가철방 사람들이 영호진광에게 달려들었다.
“숙부님!”
“조부님! 위험합니다!”
영호진광의 도는 인정을 두지 않았다.
백룡이 용틀임을 하며 사방을 휘저을 때마다 피가 튀고 비명이 흘러나왔다.
“크윽!”
“흐억!”
한순간에 또 두 명의 목숨을 앗아간 영호진광의 도는 한시도 멈추지 않고 진원정을 핍박했다.
바로 그때였다.
“아우! 물러서게!”
다급한 경악성과 함께 웅혼한 기운이 영호진광을 뒤덮었다.
하늘이 그대로 내리누르는 것 같은 기운!
대경한 영호진광은 아쉬움을 접고 도세의 방향을 틀었다.
진원정을 할퀸 백색도강이 허공으로 솟구치며 가공할 기운에 정면으로 부딪쳐 갔다.
콰르릉!
“으음…….”
영호진광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이 옅게 흘러나왔다.
세 걸음 뒤로 물러선 그는 이를 악물고 전면을 바라보았다. 진원정을 공격하느라 기운이 분산되었다 해도 그렇지, 누가 자신을 이리 밀리게 한단 말인가.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위지천백이 말한 자.
자신들도 쉽게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고 했던 자가 마침내 나타났다는 것을.
“위지천백이 보냈다고 했더냐? 오냐! 이놈들! 어디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진원정 앞에 내려선 진원명은 노성을 내지르며 영호진광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굳이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명원의 마당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진가철방의 사람 수십 명이 죽고 또 수십 명이 부상을 입은 채 적과 싸우는 중이었다. 말할 시간이 없었다.
“아우는 가주를 도우라! 이놈은 내가 상대할 것이니라!”
진원정은 어깨가 붉게 물든 상태였다. 영호진광의 도강이 스쳐지나가며 어깨를 갈라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내색하지 않고 곤을 움켜쥐었다.
“조심하십시오, 형님! 놈이 바로 도왕 영호진광이란 잡니다!”
“걱정 마라! 우리 진가가 만만치 않음을 내 위지천백에게 알려줄 것이니라!”
오늘따라 유난히 뭐가 깨달아질 것 같아 명상의 시간을 길게 가졌다. 자신이 늦은 것은 기껏해야 반각 정도.
그 사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진가의 존망이 단 반각 만에 위험지경에 몰렸다.
제왕성의 요구를 거절하며 일이 이렇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현실로 나타나자 분노가 끓어올랐다.
“이놈! 이것이 진가의 곤이니라!”
진원명은 넉 자 길이의 곤을 뻗어 영호진광을 가리켰다.
순간, 대기가 진저리치며 휘돌았다.
영호진광은 조금도 방심하지 못하고 도를 쳐들었다.
그 역시 진원명이 강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자신은 사대천왕의 일 인, 도왕인 것이다.
“얼마든지 상대해주겠소! 오시오!”
* * *
저 멀리 뜨거운 바람을 뚫고 달려오는 자들이 보였다.
모두 삼백 정도.
자신들과 비슷한 숫자다.
위지성은 사마초를 비롯해 세 명의 장로와 나란히 서서 은룡산장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오는군요.”
“조심해야 할 거네. 저들은 언제든 돌변할 수 있는 자들이니까.”
사마초의 말에 위지성의 입가로 차디 찬 웃음이 번졌다.
강호에 나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생사를 거는 싸움을 몇 번이나 겪은 그였다.
나름 자신이 생긴 그는 호기롭게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저도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자신과 함께 온 삼백 무사들은 제왕성의 정예 반, 제왕성을 따르는 문파에서 보낸 무사 반으로 이루어졌다.
개중에는 장로 셋 외에도 장로급에 이르는 초절정고수만도 다섯 명 이상 되었다.
은룡산장이 아무리 고수들을 보냈다 해도 자신들 이상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하는 것은 그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 사람이 일반무사들 속에 은밀하게 끼어 있었다. 암천사신을 상대할, 자신을 지켜줄 절대고수가.
우려했던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그가 나설 터.
위지성은 그다지 큰 염려를 하지 않았다.
‘이번 일을 계기로 암천사신을 넘어서서 내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야 말 것이다.’
은룡산장의 삼백 무사가 위지성 앞에 도착한 것은 반각가량이 지나서였다.
선두는 적수천이었다.
그는 추양양과 혈무단주 완안격, 패령군주 구여청을 대동하고 위지성 앞으로 다가왔다.
이 장의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춘 그는 위지성과 세 명의 장로를 돌아다보며 오만한 태도로 물었다.
“나는 은룡산장의 적수천이라 하오. 어느 분이 대표시오?”
“본인은 위지성이라 하오. 본성의 무사들은 내가 이끌 것이오. 그리고 이쪽에 계신 분들은 본성의 장로들이시오.”
적수천은 어깨를 편 채, 오만한 태도로 사마초를 비롯한 세 명의 장로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적수천이오.”
그러고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한 사람을 소개시켰다.
“여기 이분은 추양양이란 분이외다.”
석회처럼 하얀 얼굴. 말라버린 피처럼 검붉은 적포를 걸친 오십 대 중반의 초로인. 그는 적수천이 이름을 말하는데도 차가운 눈으로 제왕성의 장로들을 둘러보기만 했다.
어찌 보면 오만하게 보이는 모습이었다.
“적혼신마(赤魂神魔) 추양양?”
사마초가 그답지 않게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추양양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추양양의 얼음처럼 차가운 눈이 사마초를 향했다.
“내 이름을 기억하는 자가 있을 줄은 몰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