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8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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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1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84화
184화
노태군은 허공을 지그시 응시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군호광의 죽음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다는 듯, 곧 눈을 가늘게 좁히고 입을 열었다.
“그 교활한 놈이 또 무슨 수를 쓰려고 그러는 거지?”
“사실 저희들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어차피 제왕성과 싸워서 이긴다 해도 그놈들에게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위지천백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걸 모르는 게 아니다. 위지천백이 뜬금없이 그런 제의를 했다는 게 문제지. 혹시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닐지 모르겠군.”
“위지성을 대표로 보내겠다는 걸로 봐서 그리 염려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단순히 대표로 보낸다는 게 아니다. 거기에는 인질이라는 뜻이 숨어 있었다.
내 아들을 보내니 믿어라! 거짓이라면 내 아들을 어떻게 해도 좋다! 그런 뜻이.
“위지성을 보낸다?”
노태군의 가늘어진 눈 깊은 곳에서 붉은 기운이 번뜩였다.
위지천백이 아무리 교활하다 해도, 제왕성의 후계자인 위지성의 목숨을 내놓았다면 적어도 반 정도는 믿어도 될 것 같았다.
설령 암천회를 친 후, 제왕성의 무사들과 싸움이 벌어진다 해도, 그것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연장선일 뿐이다.
‘싸움을 걸어온다면 그것도 괜찮겠군.’
어쩌면 상황에 따라 자신들이 먼저 싸움을 걸 수도 있다.
어차피 죽여야 할 적이 아닌가?
노태군은 조금 여유가 생긴 표정으로 몸을 의자에 깊숙이 묻었다.
“흐음, 결국은 암천사신이라는 놈이 위지천백의 신경을 건드릴 정도로 대단한 놈이다, 이 말인가?”
“그놈에게 제왕성의 이름난 고수들이 벌써 몇 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도 셋째 형과 홍백, 묵귀자가 그놈에게 죽었지 않습니까?”
노태군이 왜 그걸 모를까.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 적수천의 말로 인해 떠오르자 은근히 분노가 끓어올랐다.
“제왕성에선 몇 명이나 동원할 거라 하더냐?”
“암천회의 무사들 숫자가 오백 정도니, 양쪽에서 정예 삼백씩이면 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그럼 합이 육백이다. 더구나 서로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 강한 자들로 구성될 것이다.
반면 무천련의 잔당들은 숫자가 오백에 이르지만, 몇 빼고는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자들. 그들을 처리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암천회에서 암천사신 말고 주의해야 할 자들은 얼마나 되지?”
“저희가 파악한 대로라면, 북천삼괴와 육풍원, 우도진, 설자웅 등 초절정고수만 해도 열 명은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라면 이미 대문파의 세력을 형성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노태군은 위지천백이 왜 그리 그들을 신경 쓰는지 새삼 이해가 갔다.
“제법이군. 짧은 시간에 그러한 자들을 끌어 모으다니.”
“그래서 위지천백도 불안한가 봅니다. 물론 저희 역시 껄끄러운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만.”
“네 생각은 어떠하냐?”
“놔두면 제왕성과의 싸움에서 이긴다 해도 부담이 가는 놈들입니다. 위지천백이 판을 벌였을 때 놈들을 처리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자칫하면 위지천백의 술수에 휘말릴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두려워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암천회의 존재가 거슬리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위지천백에게 지고 들어간다는 게 더 싫었다.
“좋아. 못할 것도 없지.”
노태군은 결정을 내린 듯 싸늘한 한광을 흘리며 적수천을 바라보았다.
“저쪽에서 위지성을 내보냈다면, 우리 쪽의 수장은 네가 맡아라. 양양과 혈무단을 데려간다면 놈들이 누굴 데리고 와도 눌리지 않을 것이다.”
혈무단(血霧團)은 삼단 중 최강이다.
거기다 노태군이 양양이라 부른 추양양은 노태군의 비밀호법 중 하나로 귀천사사에 못지않은 고수다. 그의 정체를 알아보는 자가 있다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놈들이 움직인 것을 확실히 확인한 후에 움직여야 할 것이니라.”
“예, 아버님.”
적수천이 대답하며 고개를 숙일 때였다. 언뜻 노태군의 눈가에 살소가 떠올랐다.
노태군이 붉은 입술을 혀로 핥고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소한, 네가 혈왕을 데리고 따라가도록 해라.”
뒤에 조용히 서 있던 소한의 눈이 찰나 간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곧 허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주군.”
흠칫하며 고개를 든 적수천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혈왕을 보낼 줄이야.
“아버님…….”
노태군은 적수천의 의아한 표정에 아랑곳없이 찻잔을 잡으며 말했다.
“마음껏 피를 보고 즐기라고 해. 누구의 피든 상관없으니까.”
헌원조는 노태군의 말이 끝난 다음에야 말문을 열었다.
“아버님, 시간이 좀 있을 것 같으니 산장에 잠시 다녀올까 합니다.”
“호광이 때문이냐? 클, 마음이 그리 여려서야…….”
“그 아이를 제 손으로 보내주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시지요.”
노태군은 눈을 가늘게 뜨고 헌원조를 바라보았다.
부상이 아직 완쾌되지 않아서 얼굴이 창백했다. 어차피 있어도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터. 그의 뜻을 들어주기로 했다.
“하긴 호광이는 네가 키운 거나 다름없으니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하겠지. 좋다. 하지만 너무 오래 있어서는 안 된다. 일을 마치고 바로 돌아오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아버님.”
고개를 숙이는 헌원조의 눈에서 찰나 간 한광이 번뜩였다.
제2장 밀려드는 혈풍(血風)
불길처럼 타오르는 태양이 중천에 뜬 시각.
끼이이이!
대충 닫아놓은 진가철방의 정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리고, 뜨거운 열기를 동반한 황사바람이 철방 안쪽으로 거세게 밀려들었다.
진가철방의 젊은 야장인 추삼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정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제길, 누가 문을 열어놨…….”
그는 짜증을 내며 중얼거리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열린 정문으로 무사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언뜻 봐도 삼사십 명은 되어 보였다.
추삼이 바라보는 사이, 무사들은 그의 삼 장 앞까지 다가와서 걸음을 멈추었다.
오가던 철방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웅성거렸다.
추삼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보고 있다 생각했다.
겁에 질린 모습으로 물러나면 욕먹을지도 모르는 일.
그는 용기를 내어 앞장 선 두 사람에게 물었다.
“누, 누구요?”
백리환은 진가철방을 한번 둘러보고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제왕성에서 왔다. 안에 기별을 올려라.”
진관호는 제왕성의 사절을 명원(明院)으로 불러들였다.
백리환과 영호진광은 조금도 거리낌 없이 진관호의 청에 응했다.
두 사람이 일행과 함께 명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진원정을 비롯해 진가철방의 장로 다섯이 먼저 와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진원명은 보이지 않았다.
진관호는 명원으로 들어서는 백리환과 영호진광을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
연락을 받았을 때만 해도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온 사람이 제왕성에서 유명한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는 점, 그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직접 두 사람을 대한 진관호는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전에 왔던 제왕성의 장로 양무등보다 더 강한 고수!
자신이 감당하기 힘들지 모를 정도의 고수임을 첫눈에 알아본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데려온 삼십여 명이 모두 평범한 무사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작정하고 온 것 같군.’
진관호는 무거운 마음을 구석으로 밀어 넣고,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본인이 진가를 책임지고 있는 진관호요. 귀하는 뉘시오?”
백리환은 바로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백리 성을 쓰는 무부외다.”
진관호는 굳이 더 묻지 않고 자신의 뜻만 밝혔다.
“우리 뜻은 전한 것으로 아오만, 무슨 일로 또 오신 것이오? 만일 우리를 또 설득하려는 거라면 그냥 가주시면 좋겠소.”
백리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성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돈이 아니외다.”
진관호도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우리가 내줄 것은 그것밖에 없소.”
“제왕성은 지금 은룡산장과 전쟁을 치루는 중이지요. 내 듣기로 진가철방의 무기는 천하 어느 철방에서 만든 것보다 훌륭하다고 들었습니다. 굳이 여러 말 하지 않겠습니다. 서로 좋은 일, 얼굴 붉히는 일이 생기는 것보다 나을 것이니 승낙하시지요.”
은근한 협박.
진관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강호인에게 내줄만한 무기가 없소.”
“없으면 지금부터라도 만들면 되지요.”
“그건 불가하오. 우리는 선조의 말씀을 어길 생각이 없소.”
“불가하다? 거 좋게 말로 하려고 했더니 내 마음을 몰라주는군.”
백리환의 담담하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때였다. 진관호의 뒤쪽에 서 있던 중년인 하나가 버럭 소리치며 앞으로 나섰다. 진관호의 셋째 동생인 진관수였다.
“선조의 유명을 지키겠다는데 웬 억지인가!”
조용히 서 있던 영호진광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선조도 가문이 몰락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안 그렇소?”
“뭐라? 그대가 지금 우리를 협박하는 건가!”
진관수가 당장 달려들 것처럼 눈을 부라리자, 보다 못한 진원정이 나섰다.
“물러서라, 관수.”
“숙부님, 저자의 말을 듣지 못했습니까?”
“물러서라 하지 않더냐!”
진관수는 이를 지그시 악물고, 영호진광을 노려보며 한 걸음 물러섰다.
진원정은 진관수가 물러선 다음에야 영호진광을 바라보았다.
“선조께선 우리에게 강호에 뛰어들지 말 것을 명하셨네. 그리고 강호세력에게 무기를 팔지 말라고 했지. 우리로선 그분의 유명을 지키지 않을 수 없네. 알겠나?”
“유명을 지키려다 가문이 불행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유명에 연연하실 겁니까?”
“지킬 수 있는 데까지는 지켜야겠지.”
고집스런 표정.
진가의 뜻을 꺾기가 쉽지 않음을 안 영호진광은 싸늘한 표정으로 허리에 매달린 도를 잡았다.
“끝내 피를 보고 싶으신가 보군요.”
진원정은 한 점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영호진광을 노려보았다.
“본가의 사람이 선조의 유명을 어겨도 되는 경우는 오직 하나뿐이네. 그게 언제인지 아는가?”
영호진광은 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대답을 기다렸다.
진원정이 말했다.
“본가에 위기가 닥쳤을 때지. 그때는 집게나 망치가 아닌, 무기를 들어도 된다네.”
제왕성과의 정면격돌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
영호진광은 냉소를 떠올리는 한편으로 은근히 흥분이 되었다.
일개 철방이 제왕성의 뜻을 거부하는 것만도 의외이거늘, 이제는 정면대결마저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자신들이 누군지 알고도 과연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영호진광의 냉소가 짙어졌다.
“그렇게 말했는데도 친구가 되길 마다하고 적이 되겠다니, 부디 후회하지 마시길.”
진원정도 지지 않고 말했다.
“누가 후회할지는 두고 봐야겠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 백리환과 영호진광을 따라온 무사들이 거리를 벌리며 넓게 퍼졌다.
두 사람이 데려온 자들은 모두 서른한 명이었다.
백리환이 하남에서 데리고 온 아홉 명의 고수.
영호진광이 섬서에서 데려온 백천도문의 수하 일곱.
그리고 위지천백이 딸려 보낸 신무전의 무사 열다섯.
그들은 어떠한 명이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백리환과 영호진광을 호위했다.
그때 진가철방 사람들이 명원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백리환과 영호진광 일행을 에워쌌다.
일순간, 명원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때였다.
“흥! 어디 주둥이만큼 실력이 있는가 보자!”
진관수가 먼저 한 소리 내지르며 영호진광을 향해 달려들었다.
본래 빈손처럼 보였던 그의 손에는 어느새 석 자 길이의 곤이 들려 있었다.
진관수는 일 보에 삼 장을 나아가며 곤을 휘둘렀다.
금방이라도 영호진광의 머리를 터트릴 것만 같은 기세!
하지만 영호진광은 진관수가 달려드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그의 곤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도를 잡아 뽑았다.
찰나!
눈부신 백색 도광이 도집에서 폭출되며 곤을 후려쳤다.
쾅!
귀청을 울리는 일성 굉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시간도 없이, 진관수는 얼굴이 납빛으로 변한 채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진원정은 뒤로 밀려나는 진관수는 보지도 않고 영호진광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은빛으로 빛나는 하얀 도신.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도다.
문제는, 도 자체보다 그 도의 주인이었다.
‘위지천백이 작정을 하고 보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