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8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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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81화
181화
시간이 흐르면서 청의중년인의 몸이 기괴하게 비틀렸다.
얼굴과 손발도 핏물에 담가진 것처럼 벌게졌다. 소나기를 맞은 것처럼 흐르는 땀이 붉게 보일 지경이다.
덜덜 떨면서 몸이 비틀리는 모습과 입에서 흘러나오는 기괴한 신음소리는 보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혈도고문법이 예상보다 뛰어난 것인지, 아니면 고통을 이기는 의지가 약한 것인지는 몰랐다. 어쨌든 청의중년인은 혼신을 다해 고개를 쳐들고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끄어어어……. 제발…….”
독고무령은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는, 혈도를 풀어주고 다시 물었다.
“어느 쪽이지?”
전신이 땀으로 젖은 청의중년인은 넋이 반쯤 빠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왕…… 성.”
“지위는?”
“환무단 오대주.”
“여기까지 온 이유는?”
“은룡산장의 상황을 살피려고…….”
이십 명이 넘는다. 단순히 정찰하기 위해 왔다고 보기에는 사람의 수가 너무 많았다.
“이후의 목적이 있을 것 같은데, 뭐지?”
청의중년인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거야말로 대원들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죽더라도 그 비밀만큼은 지켜야 했다.
하지만 각오도 잠시, 그는 독고무령의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을 대하고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앞에 있는 놈은 사람이 아니다. 악마. 지옥의 사신이다.
대답하지 않으면 또다시 조금 전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자결도 할 수 없는 상태.
그는 더 이상 지옥에 빠진 경험을 겪고 싶지 않았다.
“본진 공격 시……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그대들이 다는 아닐 것 같은데, 몇이나 동원되었지?”
“정확히는 나도…… 모르오. 대충 백 정도…….”
단순한 일반무사들이 아니다. 모두가 일류 이상의 최고 정예들이다. 아마 지휘자는 장로급 이상의 고수들일 터. 백 명이라면 후방을 교란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공격시점이었다.
“언제 공격할 예정이지?”
청의중년인은 말하기도 힘든지 고개를 저었다. 정확한 시기는 그도 알지 못했다.
“그건 나도 모르오. 그저 며칠 동안 몸을 숨긴 채 연락을 기다리라고만 들어서…….”
정확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중요한 정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뜻밖의 정보를 얻었군.’
그때였다.
밀호방의 이십일호가 다급히 달려왔다.
“시신을 발견한 은룡산장의 순찰무사들이 일대를 뒤지고 있습니다, 회주.”
순찰무사들이 알았다면 대풍장에 연락을 취했을 게 분명하다. 곧 대풍장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반시진이면 천라지망이 펼쳐질 것이다.
저들과 정면으로 부딪쳐봐야 이익 될 게 없는 상황.
떠나기로 결정을 내린 독고무령은 청의중년인을 내려다보고는 중지를 튕겼다.
한 줄기 지력이 청의중년인의 뇌 속을 휘저었다.
“일단 돌아가도록 합시다.”
관조운과 전유곤의 내외상이 심한 상태.
진사혁과 한무종이 두 사람을 들쳐 업고 숲을 벗어났다.
* * *
위지천백은 창문을 통해 스며드는 햇빛을 가슴에 안고서 나직이 물었다.
“백리 아우는 언제 올 것 같은가?”
막 찻잔을 잡고 입으로 가져가던 영호진광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 도착할 겁니다.”
위지천백의 눈빛에서 은은한 광채가 번뜩였다.
붕천신장(崩天神掌) 백리환. 일명 장왕(掌王)이라고도 불리는 사대천왕의 일인. 안휘 제일 고수인 그만 오면 사대천왕 중 셋이 모인다. 그리고 곧 나머지 하나 역시.
그들만 오면 노태군이 누구를 끌어들였다 해도 문제될 게 없었다.
얼마 전, 우연히 알게 된 귀천사사가 모두 살아있다 해도.
“그래, 귀천사사와 붙어보니 어떻든가?”
영호진광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나면 별 문제가 없는데, 둘이 합공하니 만만치 않더군요.”
“흠, 그 정도란 말이지? 그 늙은이가 단단히 화났나 보군. 정체가 밝혀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면서도 그들을 세상에 내놓다니 말이야.”
“그나마도 암천사신이란 놈이 둘을 죽여서 다행입니다.”
위지천백의 이마에 그어진 주름이 깊어졌다.
“그건 그렇지. 비록 홍백과 묵귀자가 사령귀안이나 백골마존에 비해 약하다 해도 가벼운 상대가 아니거늘, 아무래도 놈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봐야 할 것 같군.”
당시의 일이 떠오르는지 영호진광의 두 눈에서 싸늘한 눈빛이 흘러나왔다.
“당시 부상을 입은 듯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최소한 저보다 약하지는 않을 거라 보고 있습니다.”
위지천백도 독고무령이 강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남호종의 가슴에 난 손자국. 모용회의 죽음. 절대의 경지에 오르지 않았다면 둘 다 불가능한 일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영호진광이 승부를 장담하지 못할 정도일 줄이야.
“흐음, 그 정도란 말이지?”
“괴물 같은 놈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나이에 그 정도로 강한 놈은 천하를 통틀어도 셋을 넘지 않을 겁니다.”
“위험한 놈이군.”
“형님의 생각보다 더 위험한 놈일 수도 있습니다.”
순간 위지천백의 눈 깊은 곳에서 은은한 홍광이 번들거렸다. 분노보다는 호승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문득 자신이 느낀 감정의 정체를 안 위지천백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호승심을 느낀 것이 얼마만인가.
생경한 감정.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기분이 그렇다고 해서 놈을 용서하고픈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다른 자들은 문제가 아닌데, 그놈이 아우 말대로 그렇게 위험하다면 생각을 달리해야겠군. 놈들을 그대로 놔둔 채 은룡산장과 전면전이 벌어지면 자칫 놈에게 어부지리를 줄지도 모르겠어.”
“놈이 이끄는 무천련의 잔당에 대해 조사한 것이 있습니까?”
위지천백의 입꼬리 한쪽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있지, 있고말고. 공 군사와 본성의 정예 수백을 죽인 놈들이거늘, 내 어찌 그놈들에 대한 조사를 소홀히 할 수 있겠나?”
“하면 왜 그냥 놔두시는 겁니까?”
“놈을 중심으로 제법 단단하게 뭉쳐 있거든. 암천회라는 이름으로 말이야. 깨끗하게 청소하려면 우리가 지닌 전력의 삼사할은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할 정도네. 더구나 최근에는 천룡방의 북리중현이 놈들을 돕는 모양이더군.”
영호진광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천룡방이 놈들을 돕는다고요?”
“사실 노태군을 쓸어버리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는 것도 놈들 때문이라 할 수 있지.”
말 한마디 한마디가 바위처럼 무겁게 떨어진다.
영호진광이 그 무게에 눌린 듯 표정이 무거워졌다.
“작은 문제가 아니군요.”
“너무 걱정할 것은 없네. 때가 문제일 뿐이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영호진광의 눈이 위지천백을 향했다.
위지천백은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눈으로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노태군을 아네. 그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거라면 부모를 죽인 원수와도 손을 잡을 사람이지. 그리고 무천련의 잔당은 우리뿐만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부담이 되는 자들이고 말이야.”
영호진광은 위지천백의 뜻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눈을 크게 떴다.
“혹시……?”
위지천백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더욱 차가워졌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무천련 역시 은룡산장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네. 아니, 안 좋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처럼 생각하지.”
묘한 뜻이 담긴 말.
재미는커녕 등줄기를 타고 기어오르는 한기에 몸이 오싹하다.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걸까?
영호진광은 굳은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보시죠.”
“그리 복잡하지 않네. 서로 엮인 관계를 적절히 이용하면, 힘을 덜 들이고도 쓰레기를 치울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지.”
영호진광은 문득 의형인 위지천백이 두렵게 느껴졌다.
위지천백은 알까?
그 역시 그런 면은 그가 싫어하는 노태군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때였다. 밖에서 호천위의 목소리가 울렸다.
“성주님께 아룁니다. 상관 보주께서 오셨습니다.”
“상관 보주가? 들어오라 하라.”
상관호는 짙은 갈색에 가까운 적포를 걸쳤는데, 나이 쉰둘로 조금 마른 체격이었다.
매부리코에 얇은 입술. 눈썹이 거의 없다시피 한 그의 인상은 날렵한 한 마리 독수리와도 같았다.
굳은 표정으로 들어온 그는 위지천백에게 허리를 숙이고 심각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성주,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군에서 사람들이 나왔는데, 마필을 이동치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뭐라? 그게 무슨 말인가?”
“강호의 상황이 흉흉하니 앞으로는 자신들이 직접 마필을 관리하겠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나 말인가?”
“본보의 모든 마필이 해당된다 합니다. 심지어 마장이 아닌 보내에 있는 말들도 허락 없이 함부로 움직일 경우 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합니다.”
그럴 경우 애써 키운 제왕기마군이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적지 않은 전력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이 갑자기 그러는 이유가 뭐라 하던가?”
“황궁에서 특명이 내려와서 어쩔 수 없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누군가의 입김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위지천백의 두 눈에서 싸늘한 혈광이 번뜩였다.
“설마, 노태군이?”
그가 아니면 그런 일을 벌일 사람이 없다.
군의 움직임을 제어해 놨더니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군병과 마필은 엄연히 다르다. 사람이 직접 강호의 일에 관여한 것이 아닌 만큼, 동창의 월권에 대해 금의위나 도찰원도 손을 대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군에서 관리하는 마필을 억지로 움직일 수도 없다. 천자의 명 운운하며 압박할 것이 분명하니까.
잘못하면 여태 공들여 막아놓은 군마저 자신들에게 등을 돌릴지 모르는 일. 결코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으음, 역시 노태군이야, 그 늙은이에게 한 방 맞았군. 역시 만만치가 않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성주?”
“보주의 재량으로 움직일 수 있는 말의 숫자는 얼마나 되는가?”
“저들이 보 내의 말까지 관리하게 된다면, 오십 필이 채 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백 필은 있어야 제왕기마군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 정도는 있으나마나였다.
“흥, 지금쯤 기고만장하겠군. 하지만 그대의 그런 기분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위지천백은 냉랭히 코웃음치고는, 밖을 향해 명을 내렸다.
“가서 신이당의 능효와 양무등 장로를 들라 하라!”
곧 능효와 양무등이 전각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위지천백이 서신을 작성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위지천백의 손이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신을 다 쓴 위지천백은 거두절미하고 능효에게 명을 내렸다.
“능효, 북경에 사람을 보내라. 한시도 지체해서는 안 될 일이니 서두르도록 하라.”
“예, 성주!”
위지천백은 능효가 서신을 받아들고 나가자, 양무등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진가철방에 좀 다녀와야겠네.”
* * *
망치소리가 잦아든 오후 늦은 시각.
한 무리의 무사들이 진가철방을 찾아왔다.
모두 열두 명. 제왕성의 무사들이었다.
진가철방의 사람들은 그들의 정체를 알고는, 일손을 멈춘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제왕성의 무사들이잖아? 무슨 일이지?”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온 거 아닐까?”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안에 기별하러 갔던 장한이 나오더니 제왕성의 무사들을 가주의 처소로 안내했다.
그 사이 진관호는 몇몇 가문의 어른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제왕성의 무사들이 진관호의 거처인 명원에 들어섰을 때는 진원명과 진원정이 도착한 후였다.
명원의 앞마당에 나와 있던 진관호는, 제왕성의 무사들 중 수장으로 보이는 자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진가철방을 맡고 있는 진관호라 하외다.”
“양무등이라 하오.”
양무등이라면 제왕성의 장로 중 한 사람.
그런 사람이 왔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제왕성에서 어인 일로 오신 것이오?”
양무등은 목에 힘을 주고 자신이 온 목적을 밝혔다.
“성주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서 왔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