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7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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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75화
175화
도왕(刀王) 영호진광.
천검무왕 위지천백과 더불어 사대천왕의 하나로 꼽히는 자.
자신이 잘못 보지 않았다면 백의인이 바로 그다.
“어, 어떻게 저자가 산서에 나타났단 말인가!”
섬서의 절대자 도왕이 산서에 나타나다니!
그것은 거대한 변수였다.
* * *
십여 리를 달린 독고무령은 걸음을 멈췄다.
혈류가 광룡처럼 온몸을 휘돌며 혈맥을 갈기갈기 찢을 것만 같다.
온몸이 불구덩이에 들어간 기분.
당장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신속하게 다스리지 않으면 혈맥이 막혀서 수십 일을 허비하게 될지도 모를 정도의 내상이다.
“웩!”
일단 위장에 고인 핏물을 한 움큼 토해낸 그는 절벽 아래쪽 움푹 파인 곳에 들어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태천일심법을 행하며 들끓는 혈맥을 다스렸다.
이 각이 지나자, 장마철 계곡의 격류처럼 들끓어 오른 혈맥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독고무령은 멈추지 않고, 몸 안의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계속 태천일심법을 행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몸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지며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그리고 곧 텅 빈 몸 안에서 미미한 진동이 일어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이 울리기 시작했다.
공명(共鳴)의 절정이 자연스럽게 찾아온 것이다.
독고무령은 그 순간부터 자신조차 잊었다.
몸의 상태도 잊고, 공명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도 잊고, 시간의 흐름조차 잊었다.
완벽한 망아의 상태.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서서히 자연과 하나가 되어갔다.
제8장 얻은 것과 잃은 것
뎅! 뎅!
종소리가 소실봉을 부드럽게 휘감아 도는 아침.
장유유는 콧노래를 부르며 방을 나왔다.
하나만 빼고는 모든 게 즐거웠다.
아버지도 많이 나아졌고, 어머니의 얼굴에 끼었던 먹구름도 완전히 가신 상태였다.
‘벙어리오빠만 있으면 진짜 좋을 텐데…….’
딱 하나 있는 불만은, 곁에 독고무령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숭산에서의 생활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콧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로.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밝은 표정으로 불전을 돌아갔다.
그때였다.
“응? 누구지?”
저만치 걸어가는 사람이 보였다. 나이는 오십이 조금 넘은 듯했고 상당히 덩치가 컸는데, 그녀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소림에 오가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랴?
하지만 자신이 있는 자불원은 일반 향화객이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것을 알았는지 중년인이 고개를 돌렸다.
“호오.”
그는 짧은 탄성을 내지르고 그녀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장유유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그때 중년인이 그녀를 불렀다.
“잠깐만 기다리거라. 물어볼 게 있다.”
자불원까지 들어온 걸로 봐서 소림과 완전 외인은 아닌 듯했다. 그녀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다시 몸을 돌렸다.
“무슨 일로 소녀를 부르신 건가요?”
“흠, 너는 소림의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여기 있는 것이더냐?”
“아버지의 병환을 돌보기 위해서 잠시 머무르고 있을 뿐이에요.”
“그래? 하하하, 효녀로구나.”
“당연히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시냐? 너 같은 아이를 둔 분이라면 예사 분은 아닌 듯싶구나.”
아버지를 칭찬하는 말을 싫어할 딸이 어디 있을까?
장유유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이곳은 소림의 대지. 경계심이 조금 풀어진 그녀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진중의 장가장이 저희 집이에요.”
“진중이라면 산서의 진중 말이냐?”
“맞아요.”
중년인은 의미 깊은 눈빛으로 장유유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래?”
그때 장이생이 머물고 있는 방문이 열렸다.
장유유는 문소리가 나자 고개를 돌렸다. 소설향이 물병을 들고 나오는 게 보였다.
“어머니. 제가 떠올게요.”
그녀는 중년인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소설향을 향해 달려갔다.
중년인은 장유유의 뒷모습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 녀석하고 잘 어울리겠군.”
장유유가 소설향에게서 물병을 받아들고 돌아섰을 때는, 이미 그의 모습이 전각 뒤로 돌아간 뒤였다.
장유유는 뒤늦게 든 께름칙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지?”
그녀는 생각도 못했다.
그가 누군지. 그가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는지.
* * *
독고무령 새벽어스름이 밀려들 무렵에서야 눈을 떴다.
몸이 가볍게 느껴진 그는 기운을 돌려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몸에서 공명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긴 했다.
하지만 설마하니 그토록 심하던 내상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나을 줄은 생각도 못한 터였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닌 듯했다.
대기의 흐름이 더 밀도 있게 느껴지고, 온몸의 감각이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무래도 발전이 더뎌져 답답하던 태천일심의 크기가 더 커진 것만 같았다.
독고무령은 슬며시 손을 뻗어보았다.
순간 맑고 영롱한 기운이 그의 손끝에 모였다.
태천일심의 기운이 유형으로 나타난 것이다.
‘좋아! 이제 승천만화를 운용할 수 있겠어!’
미숙하긴 해도, 마침내 단목승이 남긴 태천삼법 중 하나를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완숙해지고 모든 사물에 적응시키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중요한 것은 ‘운용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내심 만족한 독고무령은 진원명이 왜 그토록 공명을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사혁이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만 된다면 단숨에 무음을 넘어 부동을 이룰 수 있을 듯했다.
문제는 말로 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독고무령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일단 움푹 파인 곳에서 나온 그는 몸을 날려 절벽 위로 올라가보았다.
고요한 가운데 바람소리와 새소리만이 들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하늘로 쳐든 그는 자신을 압박하던 백의인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귀천사사보다 강한 자였어.’
부상을 입지 않은 상태라 해도 승부를 장담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의 강자.
그는 누구였을까? 누군데 그토록 강했던 것일까?
그리고 왜 그곳에 나타나 자신을 가로막았던 걸까?
그 의문을 해소하면 뭔가 새로운 사실이 드러날 것도 같다.
‘돌아가서 자세히 알아봐야겠군.’
* * *
두 시진 후.
백천산 계곡에 도착한 독고무령은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계곡 안의 경비가 그 어느 때보다 삼엄하게 느껴졌다.
단순히 삼엄한 것만이 아니었다. 긴장감마저 돌았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나? 그런 의문이 절로 들었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산줄기를 타고 뒤쪽으로 돌아서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갑자기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호위무사대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곧 독고무령임을 알아보고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회주님을 뵙습니다!”
독고무령은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을 살펴보았다.
이상하게도 평소와는 조금 다른 표정이다.
반가움과 초조와 안도가 뒤섞였다고나 할까?
한무종이 앞으로 한 걸음 나와서 입을 여는데, 그의 표정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다녀오셨습니까?”
“수고했소. 그런데 왜들 그런 표정이오? 밤새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한무종이 멈칫하더니 독고무령을 빤히 바라보았다.
일? 있었다. 그런데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독고무령은 한무종이 입을 다물고 있자 진사혁을 찾아보았다.
이상했다. 항상 맨 앞에 서서 설치던 그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사혁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독고무령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사혁은 어디 있소?”
한무종은 고갯짓으로 통나무집을 가리켰다.
“저 안에 있습니다. 회주께서 오실 동안 집을 지킨다면서…….”
다행히 진사혁에게 일이 생긴 것은 아닌 거 같다.
독고무령은 안도하며 통나무집으로 향했다.
그 뒤를 한무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따라갔다.
‘이상하네…….’
한무종의 말대로 진사혁은 집 안에 있었다.
그런데 독고무령이 한무종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자, 조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진사혁이 벌떡 일어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회주!”
놀라움, 반가움, 안도. 어째 진사혁도 똑같은 표정이다.
독고무령은 그런 진사혁의 표정이 의아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독고무령의 질문에 도리어 진사혁이 멍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론 있었지.”
“그래? 그럼 말해보게. 무슨 일인데 이렇게 경비가 삼엄한 거지?”
진사혁은 고개가 옆으로 떨어질 만큼 기울이고 독고무령을 쳐다보았다.
“내가 아는 회주 맞지? 이름이 독고무령이고, 무슨 일이든 철저히 계획하고 움직이는 사람 말이야.”
“이 친구, 엉뚱한 소리 그만하고, 무슨 일인지 말해보라니까?”
“생각해보게. 그렇게 철저한 사람이, 다음 날 아침까지 온다고 해놓고 하루가 더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도 없는데, 아랫사람으로선 당연히 긴장될 일이 아닌가? 긴급한 소식은 자꾸 전해오는데 말이야. 어디 그뿐인가? 귀천사사인가 뭔가 하는 괴물들을 확인하겠다고 갔는데, 부상이라도 입었다면 큰일 아닌가?”
“무슨…… 말인가? 하루가 더 지났다니? 나야 어젯밤에 갔다가…….”
독고무령이 피식 웃으며 말하고는 한무종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한무종도 진사혁의 말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독고무령은 빠르게 지난 일을 떠올려 봤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신의 몸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나았지 않던가.
‘설마……?’
진사혁이 멍하니 있는 독고무령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인지는, 내가 아니라 자네가 말해줘야 할 것 같은데 말이지.”
“정말…… 하루가 더 지난 건가?”
독고무령이 되묻자 진사혁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으음, 이거 심각한데? 시간의 흐름도 기억 못하다니.”
그때 문이 열리며 삼괴가 방으로 뛰듯이 들어왔다.
“무령이가 왔다고?”
“어떻게 된 거야? 어제는 어디 갔었어?”
“허허허,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니냐? 약 하나 줄까?”
진사혁이 어깨를 추켜올리며 장난처럼 말했다.
“아무래도 어디 아픈가 봅니다. 글쎄, 어제와 오늘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지 뭡니까?”
치선이 반색하며 품을 뒤지더니 옥병을 꺼냈다.
“그래? 그럼 일단 이거부터 먹어봐라. 약은 많이 있으니까 걱정 말고 먹어. 아마 어제 일이 확실하게 기억에 떠오를 거다.”
모두가 같은 말을 한다.
자신이 정말로 이틀 만에 돌아왔나 보다.
‘끄응, 결국 운기하면서 하루를 꼬박 지낸 거란 말이군.’
독고무령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하자, 치선은 내밀었던 약을 슬그머니 감추었다.
“허허, 뭐 먹기 싫으면 말고……. 줄 놈은 많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된 거냐?”
삼괴와 진사혁과 한무종은 귀를 활짝 열고 독고무령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독고무령은 일단 어제, 아니 그제의 일을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홍백과 묵귀자를 죽이고, 그 자리를 빠져나오다가 괴인과 싸운 것. 그리고 그로 인해 부상을 입고 몸을 다스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하루가 더 지났다는 것까지.
그의 말에 북천삼괴의 몸이 얼어붙었다.
“호, 홍백과 묵귀자가 죽었다고?”
“타, 타, 타불, 그 독한 귀신들을 회주가 죽였단 말이지?”
“으으음, 두 놈이 한꺼번에 갔으면, 지옥이 시끄럽겠군.”
단순히 그들의 정체를 확인하러 가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따라가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몰려갔다가 발각되면 좋을 게 없으니까.
그런데…… 혼자서 죽였단다. 귀천사사 둘을.
북천삼괴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힐끔거렸다.
‘괴물은 우리가 아니라 저 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