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6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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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68화
168화
정수교는 머뭇거리더니, 상대가 알아도 괜찮을 정도의 사실만 말해주었다.
“단편적인 거라……. 좋아, 하나만 말해주지. 은룡산장이 밀린다 해도, 그들은 황궁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될 거네. 한마디로 산서에서 패하면 그대로 끝장이란 말이지.”
“설마 동창이 깔아놓은 세력이 한꺼번에 무너지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그건 자세히 말할 수 없네. 워낙 중요한 사안이어서 말이야.”
독고무령도 더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대신 말을 돌려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제왕성이 은룡산장을 무너뜨린다 해도 황궁이 산서에 복수를 하지는 않겠군요.”
“그야 당연하지. 강호의 일은 강호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니겠나? 물론 전과는 조금 달라질 테지만.”
“전과 달라진다고요? 뭐가 말입니까?”
정수교의 미간이 꿈틀거리며 골이 파였다. 공연히 말을 했다는 후회를 하는 듯했다.
“너무 깊이 알려하지 말게. 그 일은 비밀을 요하는 서로간의 약조인데다, 그리될지 안 될지 모르는 것이어서 당장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네.”
제왕성과 어떤 약속이 있는 듯하다. 이행될지조차 확실치 않은 약속이.
어쩌면 그것이 핵심사안일지도 모른다.
동방명은 알고 있을까?
모를 가능성이 크다. 금의위를 배제한 채 일이 진행되고 있다면.
독고무령은 무심한 눈으로 정수교를 응시했다.
입을 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약속 내용보다 은룡산장을 고립시키고 멸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정수교는 그 일을 진행하는 핵심인물 중 한 사람. 아직은 두고 보는 게 더 나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혹시라도 급히 전할 말이 있으시면, 보정의 명하루라는 곳의 기둥 옆에다 여우 그림이 그려진 작은 깃발을 하나 꽂으십시오. 그러면 저에게 연락이 될 겁니다.”
“명하루, 여우 그림이라……. 그렇게 하지.”
나직이 대답하던 정수교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팔찌를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이걸 준 사람이 설아였나?”
독고무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그 아이가 살아 있다니…….”
정수교는 손을 가늘게 떨며 팔찌를 움켜쥐었다.
독고무령은 그에게 청홍봉황패에 대한 것을 물어보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미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 물건이었다. 더구나 왠지 악취가 나는 일이 얽혀 있는 것 같아서 물어보기가 찝찝했다.
‘그것은 나중에 물어봐야겠군. 아, 어쩌면 백부님도 아실지 모르겠군.’
그는 팔찌에 정신이 팔린 정수교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격한 반응을 보이는 정수교다. 지나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만큼 좋아했던 여동생의 물건을 찾아 기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긴 오죽했으면 사촌여동생의 복수를 위해 동창과 싸울 생각을 했을까.
“이만 가보겠습니다. 팔찌를…….”
팔찌는 모용설의 것이다. 독고무령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물건. 하기에 돌려받으려 했다.
그러나 정수교는 줄 마음이 없는 듯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이건…… 나에게 맡기고 가게. 설아도 이해할 거네. 본래 우리 가문의 물건이니까.”
어쩌면 모용설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준 것일지 몰랐다. 모용설이 꼭 찾고자 한다면 되찾아주면 될 일.
독고무령은 가볍게 포권을 취하고 몸을 돌렸다.
“그럼 나중에 뵙지요.”
정수교는 독고무령이 나간 후로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한참만에야 손에 들린 팔찌를 얼굴에 가져다 대고 눈을 감았다.
“네가…… 네가 내 옆으로 왔구나. 나령이. 네가……. 흐으으……. 왜 그런 놈에게 가서…… 나를 독한 사람으로 만든단 말이냐…….”
독고무령의 눈이 가늘어졌다.
방에서 십여 장 떨어질 즈음 귓속으로 정수교의 웅얼거림이 들렸다.
토막 난 말이어서 제대로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그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한 맺힌 분노가 느껴졌다.
왜 정수교는 저리도 격한 반응을 보이는 걸까?
‘혹시…… 저분이 모용설의 어머니를 좋아했던 것 아냐?’
단순히 동생이 아니라 여자로서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면 조금 전의 격한 반응도 이해가 되었다.
독고무령은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정수교의 집을 나섰다.
* * *
백화명은 자시가 다 되었는데도 그때까지 불을 켜놓고 잠들지 않은 상태였다.
“험, 다녀왔느냐?”
“예, 백부님.”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거라.”
백화명의 부인이 백화명의 방을 힐끔거리며 중얼거렸다.
“평소에는 술시만 넘으면 자는 양반이……. 피이, 그래도 좋긴 좋은가 보네. 그럼 좀 따뜻하게 대해주던가.”
독고무령은 그 소리를 들으며 백화명의 부인이 안내해준 방으로 들어갔다.
“푹 자거라. 내일 아침에 내가 맛난 것 만들어 주마.”
“예, 백모님.”
방문을 닫은 독고무령은 방을 둘러보았다.
두 사람만 사는데다 찾아올 손님도 없는 것 같았다. 손님방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마치 새 방처럼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바닥에 물기가 아직도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자신이 떠나자마자 부산하게 치우고 청소를 한 듯했다.
봇짐을 한쪽에 내려놓은 독고무령은 침상에 앉아서 단정하게 깔려 있는 이불을 쓸어 만져 보았다.
까칠한 감촉. 오래도록 안 쓰고 아끼던 이불을 꺼낸 것 같았다. 생면부지의 조카를 위해서.
독고무령은 그대로 뒤로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다.
생부는 어떻게 생긴 분이었을까? 얼마나 닮았기에 자신을 보는 사람마다 자신의 얼굴에 아버지라는 분의 얼굴이 들어 있다고 하는 걸까?
어머니는…….
독고무령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아버지가 보고 싶다.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던 아버지의 따뜻한 품이 그립기만 하다.
자신이 생부의 집에서 누워있는 걸 알면 어떤 마음일까?
‘아버지, 오늘만…… 오늘만 이해해주세요.’
아침식사는 백화명 부부와 독고무령, 셋이 했다.
백화명은 무뚝뚝하니 식사만 하고, 백화명의 부인은 시시콜콜 음식을 챙겨주었다.
이것이 맛있다, 저것이 맛있다. 이것도 좀 먹어봐라, 저것도 먹어봐라…….
독고무령은 그녀의 모습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그러한 행복을 느낀 것이 몇 십 년 만일지도 몰랐다.
하기에 그녀가 말하는 것을 묵묵히 집어먹었다.
식사는 조금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반시진 동안이나 이어졌다.
백화명은 식사하던 내내 아무 말도 없더니, 독고무령이 떠나겠다는 인사를 하자 달라붙었던 입술을 떼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인지상정이라 했느니, 네 아버지가 너에게 베푼 은혜를 생각해서 억지로 백가 성을 써라 강요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너의 몸속에 백가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마라. 알겠느냐?”
독고무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핏줄을 거부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다만 얼굴도 모르는 백장명보다 독고헌을 진정한 아버지로 생각할 뿐.
한편으로는 백부가 아버지를 인정해주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 생각하겠습니다.”
백화명의 부인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그 말을 들으며 눈물을 훔쳤다.
하루도 안 되는 시간. 그저 몇 번 얼굴을 마주쳤을 뿐인데도 가슴에 떨칠 수 없는 정이 새겨진 듯했다. 아마 자식이 없어 더욱 그러한 것 같았다.
독고무령은 백화명의 부인을 향해 조용히 웃으며 약속했다.
“또 오겠습니다.”
백화명의 부인은 눈물이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꼭…… 와야 한다. 알았지?”
“예, 백모님.”
제5장 용천문(龍天門)의 사형제들
백모의 눈물을 뒤로한 채 백화명의 집을 떠난 독고무령은 곧장 북경성을 빠져나왔다.
북경에 와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없지만, 황궁의 세력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안 것만도 상당한 수확이었다.
게다가 금의위와 모종의 인연을 맺었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도 훗날 불필요한 싸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백부와 백모를 만난 것도…….
‘언제고…… 꼭 찾아뵙지요.’
입가에 미소를 매단 독고무령은 빠르게 보정으로 향했다.
그는 돌아갈 때 낭자관이 아닌 용천관(龍泉關)을 넘기로 작정했다. 보정에서 십오호를 만나고 서쪽으로 꺾어지면 되었다.
족히 이백 리는 더 돌아가는 길이었음에도, 그가 용천관을 넘기로 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용천관 쪽이 사람들의 발길이 적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마음껏 경공을 펼칠 수 있을 터. 길이 조금 멀다 해도 걸리는 시간은 단축될 듯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용천관으로 넘어가면 산서의 중부를 가로질러 내려가는 만큼, 제왕성의 세력이 머물러 있는 적사보를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굳이 하나를 더한다면, 시간이 날 경우 일원궁에 들를 수도 있었다.
오후 늦게 보정에 도착한 독고무령은 십오호를 만나서 몇 가지 주의를 주었다.
“금의위나 도찰원에서 소식이 전해질지도 모르오.”
“예? 그, 금의위와 도찰원이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황궁의 권력기관이 찾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간이 크다고 자부하는 십오호의 표정이 막 꺼낸 만두처럼 허옇게 굳어졌다.
“소식을 전달하는 역할만 하면 되오.”
“그렇다면 뭐…….”
그래도 께름칙한 것은 마찬가지. 십오호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기죽을 것 없소. 당당히 대등하게 대하시오. 조심할 것은, 그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걸 철저히 감춰야한다는 거요. 혹시라도 주위에서 수상한 기미가 보이면 즉시 동선을 끊어내도록 하시오.”
“예, 회주. 알겠습니다요.”
“그럼 수고하시오.”
독고무령은 간략하게 이야기를 나누고는, 계획대로 방향을 서쪽으로 틀었다.
* * *
용천관은 보정에서 사백 리 길.
평상시에도 험준한 그 길을 넘어가는 사람은 산촌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하물며 어스름이 밀려들 즈음에는 아예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독고무령은 바람처럼 달려서 용천관으로 향했다.
한 걸음에 사오 장씩 나아가는 그의 신형은, 마치 강풍에 얼음판 위를 미끄러지는 낙엽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길이 워낙 구불구불하다 보니 시시각각 꺾어져야 했지만, 독고무령에겐 오히려 그것이 더 즐거웠다.
때로는 암봉 꼭대기에 올라서 길의 방향을 알아보고는, 물을 건너고 산을 넘어서 보다 빠른 길로 나아가기도 했다.
그때는 몸을 바람에 싣고 단숨에 이십여 장을 날아가기도 했다.
하늘을 날 때는 막혔던 뭔가가 쑥 빠져나가고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하늘을 날던 새조차 독고무령의 등장에 깜짝 놀라서 정신없이 도망치고, 멋모르고 길가에 나왔던 짐승들이 움찔하며 숲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좋아! 어디 지칠 때까지 가볼까?’
작정한 독고무령은 밤바람과 하나가 되어 쉬지 않고 용천관을 넘었다.
보름달이 그를 따라 흐르고, 구름이 그와 함께 달렸다.
그는 다음 날 동이 틀 무렵, 오대산(五臺山) 자락 남쪽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늦추었다.
무려 육백 리가 넘는 산길을 쉬지 않고 빠르게 달린 후였다.
붉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에는 피곤함보다 만족감이 가득했다.
밤새 대자연과 하나가 되어 달렸다. 몸속의 기운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달리다 보니 지금껏 자신이 익힌 것과 조금 다른 경공법이 하나 만들어졌다.
암천을 흐르는 유성.
가히 암천유성류(暗天流星流)라 불러도 될 듯했다.
암향호접무가 변화를 중시한 신법이라면, 암천유성류는 빠른 흐름을 중시한 경공법이었다.
이제 겨우 기틀을 잡은 것에 불과하지만, 조금만 더 연구하면 진짜 유성이 흐르는 것처럼 빠른 경공법이 탄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독고무령은 즐거운 마음으로 걸음을 늦추고서 물 흐르듯 나아갔다.
그 즈음, 태양이 그의 등을 비추며 거대한 산맥군 위로 치솟기 시작했다.
두촌(豆村)이라는 마을에 도착한 독고무령은 일단 객잔을 찾아 들어갔다.
겉모습은 별 볼일 없어 보였지만, 안쪽은 제법 넓어 탁자가 열 개도 넘었다.
독고무령이 들어가자, 기지개를 켜던 주인이 눈을 돌리며 억지로 손을 내렸다.
“어이구, 어서 오십쇼! 동아야! 손님 받아라!”
그가 소리침과 동시에 나이어린 점소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독고무령은 소채볶음과 오리구이를 시켜놓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강호 소식을 들으려면 좀 더 큰 마을로 나가야 듯했다.
‘정양 정도 가면 알 수 있겠지.’
그가 탁자를 닦고 있는 점소이에게 물어보았다.
“여기서 정양까지 얼마나 되지?”
점소이는 눈알을 떼구르르 굴리더니 손가락을 몇 번 구부린 뒤 대답했다.
“정양요? 에또…… 오대까지 오십 리 정도고, 오대에서 하변까지는 사십 리……. 정양까지 백오십 리는 되겠는뎁쇼?”
백오십 리라면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다.
더구나 정양으로 갈수록 길이 평탄해질 터. 두 시진이면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객잔의 주렴이 걷히고 세 남녀가 들어왔다.
“여기서 아침을 먹고 가자.”
“누가 사는 거요?”
“걱정 마라. 사제보고 돈 내라고는 안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