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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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5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06화
206화
그들은 금의위와 도찰원, 삼성맹과 제왕성에서 파견한 무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은룡산장을 포위만 했을 뿐 공격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많은 무사가 빠져나갔다고 해도 상대는 은룡산장이다.
노태군이 무너지면 자연스럽게 접수 될 터. 피를 흘리며 무리할 이유가 없었다.
* * *
노태군은 귀원장까지 물러난 후 후퇴를 멈추었다.
적수천은 별 다른 명령이 없자 노태군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버님,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산장으로 돌아가실 것인지요?”
노태군은 눈매를 씰룩이더니 냉랭히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다. 놈들도 피해가 막심해서 당분간은 움직이기가 쉽지 않을 거다. 일단 귀원장에서 상황을 주시하기로 하자.”
적수천은 그에 대해서 아무런 반론도 하지 않았다.
은룡산장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싸움이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위지천백이 끝까지 쫓아와서 끝장을 보려할 테니까.
또한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는 천룡방도 자신이 패해서 돌아왔다는 소리를 들으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참담한 상황인 것은 마찬가지.
그렇다면 자존심 상하게 패배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돌아가느니, 귀원장에 머물면서 승부를 되돌릴 방법을 찾아보는 게 나았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그럼 경계를 강화하고 무사들부터 추스르겠습니다.”
처음에만 해도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죽음과 같은 침묵을 깨고 노태군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 내가 왜 그딴 놈에게 패해서 도망쳐야 하는 거지? 네놈들이 어설프게 놈들을 상대해서 피해만 키우지 않았어도 상황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화병이 깨지고, 문갑이 부서지는 소리가 양념처럼 섞여 들렸다.
챙그랑! 퍽! 와장창!
“말해봐라! 입이 있으면 말해봐!”
단순히 제왕성에게 진 것 때문에 노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천하에 적수가 없을 거라는 자신이 위지천백에게 패했다는 것이 더 큰 충격이었다.
그는 그 분노를 적수천을 닦달하는 것으로 풀었다.
적수천은 엉망진창으로 변한 방 한가운데 서서 노태군의 노기를 다 받아들였다.
하얀 머리를 풀어헤친 채 노성을 내지르는 노태군은 누가 봐도 정말 미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하루에 두어 번씩 반복되는 일이었다. 조금 있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정을 되찾을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각가량이 지나자 노태군이 풀어헤쳐진 머리를 쓸어 올리는데, 충혈되었던 눈빛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방유경이 재빨리 달려가 노태군의 옷매무새를 손봐주었다.
적수천은 노태군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린 후 입을 열었다.
“황궁에 사람을 보내서 군을 움직였으면 합니다, 아버님.”
노태군이 짜증내듯이 말했다.
“무슨 수로? 놈이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데?”
적수천은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모용설에게서 얻은 주머니였다.
그는 그 안에서 청홍봉황패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라면 태자 저하를 움직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순간 노태군의 눈에서 혈광이 번쩍였다.
“청홍봉황패! 그것이 어떻게 네 손에 있는 게냐?”
“얼마 전에 암문을 통해 얻었사온데, 이번 일과 그다지 상관이 없는 일이어서 신경을 미처 쓰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잘만 이용하면 발등의 불은 끌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노태군의 붉은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충분하지. 아암! 그거면 충분히 태자를 움직일 수 있을 게야! 사람을 보내서 태자를 만나라고 해라!”
“예, 아버님!”
탁!
손바닥으로 의자의 손잡이를 내려친 노태군은 코웃음을 치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흥! 위지천백, 내가 이대로 주저앉을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이놈!”
제10장 나를 속이려 하면……
산서분지의 최남단인 중조산을 넘어 화북평원으로 들어서자 후끈한 열기가 밀려들었다.
금방이라도 태양에서 불길이 쏟아져 초목을 모조리 태워버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독고무령 일행은 백오십 리 길을 쉬지 않고 달렸다.
그들이 아무리 고수라 해도 한여름 뙤약볕에 그렇게 달렸으니 입에서 단내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독고무령과 진사혁을 제외한 나머지는 거칠어진 숨을 억지로 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황하가 눈에 들어온 순간, 그들은 힘든 것도 잊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햇빛이 드넓은 황하 물결에 반사되어 금빛 비늘처럼 빛난다.
도도히 흐르는 강은 너무도 넓어서 바다가 아닌가 착각이 될 정도다.
독고무령과 감가기는 일전에 와봤으니 두 번째였고, 전유곤은 볼 일이 있어 한 번 황하를 건넌 적이 있었다.
그리고 종리청은, 고향이 본래 낙양이었다. 당연히 황하에 대해 잘 알 수밖에.
그러나 네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황하를 처음 본 터였다.
그들은 말을 잊고 황하만 바라보았다.
수많은 배들이 떠다니는 일천 장 넓이의 황하는 그들의 눈에 경이, 그 자체였다.
하지만 언제까지 황하를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독고무령은 일행을 선착장이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그들이 선착장에 막 도착했을 때, 배 한 척이 닻을 올리고 막 떠나려는 게 보였다.
감가기가 나서서 사공을 향해 소리쳐 물었다.
“그 배 어디로 가는 거요! 강을 건너가는 배요?”
“그렇수! 타려면 빨리 타시구려. 지금 떠날 테니까!”
사람이 많이 타서 그늘진 곳에 자리가 있을 리 없지만, 일행은 망설이지 않고 배로 올라섰다.
놓치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몰랐다. 불길을 쏟아내는 태양 아래에서 배를 기다리느니, 약간의 불편함이 차라리 나았다.
선미 쪽에 앉은 독고무령은 금빛 비늘처럼 빛나는 물결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었다.
전에도 황하의 거대한 물결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때도 제왕성과 은룡산장에 당해 훗날을 기약하며 무언가를 얻기 위해 오지 않았던가.
참 기이한 일이었다. 어려울 때마다 황하를 건너다니.
황하 저편에 무엇이 있기에 자신을 향하게 만드는 것인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해요?”
모용설이 다가오며 물었다.
독고무령은 눈을 살짝 쳐들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하를 보니까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 정말 멋진 강 아냐?”
“멋지죠. 세상에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강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거기다 햇빛까지 반사되니까 꼭 금룡의 등을 타고 가는 기분이에요.”
더구나 독고무령과 나란히 황하를 건너고 있으니 기분이 더 좋았다.
독고무령은 반사된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문득 장유유가 떠올랐다. 그리고 장이생과 소설향의 얼굴도.
‘어르신은 어떤지 모르겠군. 소림사는 남자들만 있다던데, 유유가 심심하겠는 걸?’
이런저런 궁금증이 뱃전에 부딪치는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갔다 올까?’
개봉에서 숭산까지는 삼백 리 길.
하루면 충분히 갔다 올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가겠다는 결정을 한 것도 아닌데, 장이생 부부와 장유유를 만난다는 생각만으로도 흐뭇한 미소가 절로 피어났다.
모용설이 그걸 보고 고개를 모로 꺾었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독고무령은 별 생각 없이 장이생 부부와 장유유에 대해 말해주었다. 모용설도 장가장과의 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만큼 굳이 숨길 것도 없었다.
“장이생 어른이 숭산에 있거든. 황하를 건너다보니 그분들 생각이 나서.”
“아, 장가장의 장주님 말이죠?”
“음.”
“따님도 함께 가셨다면서요?”
“아무래도 장가장에 있으면 위험이 닥칠지 몰라서 유유도 함께 보냈지.”
‘유유’라고 부르는 독고무령을 보고, 모용설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너무 다정하게 들렸다. 마치 친동생을 부르는 것 같기도 했고, 어쩔 수 없이 헤어져 있는 연인을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유유라는 분, 굉장히 예쁘다면서요?”
약간 까칠한 목소리였는데, 독고무령은 그녀의 말투가 의미하는 뜻을 알지 못했다. 하기에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
“예쁘다기보다는 귀엽다고 해야 할까? 솔직히 어릴 때도 귀엽고 예뻤는데, 지금처럼 예뻐질 줄은 몰랐지.”
모용설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무리 복수를 위해서 여자의 삶을 포기하고 살아왔다 해도 그녀 역시 여자임은 분명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여인 이야기를 하며 예쁘네, 귀엽네 하면서 그리워하는 눈빛을 보이는데 어찌 기분이 좋을까?
그것은 질투라기보다 본능이었다. 여인의 본능.
어떤 사이예요? 사랑하는 사이인가요? 혼인할 사이예요?
그녀는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렇다는 대답을 들으면 왠지 우울해질 것 같았다.
대신 씁쓸한 마음으로 툭 쏘듯이 물었다.
“보고 싶겠네요?”
독고무령은 눈치도 없이, 아주 순수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음, 그러고는 싶은데,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아.”
“가보세요. 회주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겠다는데 누가 말리겠어요?”
모용설은 볼이 퉁퉁 부은 목소리로, 조금 힘없이 말하고는 몸을 홱 돌렸다.
독고무령이 ‘왜 저러지?’하는 마음으로 모용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내가 뭐 잘못 말한 게 있나?’
죄수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그도 여인의 아흔아홉 겹으로 둘러싸인 마음은 알아보지 못했다.
배가 정박하자 사람들이 쏟아져 내렸다.
독고무령도 일행과 함께 배에서 내려 개봉 쪽으로 향했다.
그들이 길을 따라서 이십여 장을 걸어갔을 때였다. 커다란 고목 그늘아래에 앉아 있던 무사들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우르르 몰려나와서 앞을 가로막았다.
모두 열두어 명이었는데, 그들 중 선두에 서 있던 눈이 작은 사십 대의 중년무사가 턱을 치켜들고 물었다.
“이봐, 자네들 어디로 가는 길인가?”
맨 앞에 서 있던 감가기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개봉으로 가는 길이오.”
“개봉이라……. 어느 문파의 사람들인가?”
“왜 물어보시는 거요? 그에 대해선 대답할 수 없으니 길이나 터주시오.”
중년인은 작운 눈을 치켜뜨고 일행을 쓰윽 훑어보았다.
“흐음, 제법 강하게 나오는군. 우리가 누군지 아나?”
추월루에서 황보세가의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지 않던가.
감가기는 중년인의 가슴 옷깃에 새겨진 독수리 문양을 보고 무사들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보아하니 황보세가의 무사들 같소만.”
“알긴 아는군. 그런데 알고도 대답을 못하겠다, 그거지?”
“우리가 왜 당신의 질문에 답해야만 한다는 것이오?”
“하하하, 이 일대는 본가의 땅이네. 그러니 이 땅을 지나가려면, 최소한 주인의 질문에 대답하는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이야기가 쓸데없이 길어지자 진사혁이 투덜거렸다. 당연히 큰 목소리로.
“아, 제길. 그럼 다른 사람은 놔두고 왜 우리만 잡는 거지? 저 사람들도 당신들 땅을 밟았잖아?”
중년인은 진사혁을 노려보며 피식 조소를 지었다.
“덩치는 제법 쓸 만한데 머리가 비었군. 자네들이 수상해 보이지 않았으면 왜 잡고 물어보겠나?”
순간 진사혁이 눈을 부라리며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방금 뭐라 했지? 머리가 비었다고?”
중년인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못한 채 또다시 진사혁을 놀렸다.
“옛날부터 덩치 큰 사람치고 머리 좋은 사람 없다더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군.”
“그래? 그럼 당신은 머리가 좋은가 보군. 옛날부터 눈이 쥐새끼처럼 생긴 자는 모함이나 협잡을 잘한다고 했지, 아마?”
생긴 것답지 않게 제법 날카로운 반격이다.
이번에는 중년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주둥이가 벌어졌다고 해서 함부로 말하다가는 제 명에 죽지 못한다는 걸 알아야 할 게다. 멧돼지 같은 놈.”
“흥, 그래도 쥐새끼처럼 생긴 눈을 가진 사람보다는 오래 살 테니 걱정 마시지. 쥐새끼는 재수 없으면 지나가는 사람 발에 밟혀 죽는 수도 있거든.”
“똥 돼지 같은 놈! 그 더러운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는 걸 보니 곧 불판에 구워질 운명이로구나!”
“글쎄, 그 전에 그대가 먼저 밟혀 죽을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