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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제 205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300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암천제 205화

 

205화

 

 

 

 

 

 

뜻이 일면 기운이 따라가는 무심천지연의 경지에 오른 상태.

 

그가 손을 내밀자, 아무런 징조도 없이 다섯 자 앞 허공에 거대한 손바닥이 불쑥 나타났다.

 

거리가 너무 가까운데다, 단숨에 벽도정을 제압할 작정으로 구성의 공력을 사용한 터다.

 

만년한철로 만든 벽보다 더 강한 강기의 벽이 벽도정의 앞을 가로막았다.

 

콰과광!

 

분노의 감정이 앞섰던 벽도정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뒤로 튕겨졌다.

 

눈을 감고 달리다 철벽에 부딪친 거와 마찬가지 상황.

 

털썩!

 

뇌리가 하얗게 빈 벽도정은 의식의 끈이 끊어진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독고무령은 벽계진에 이어 벽도정마저 쓰러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도문은 관조운에게 제압당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고, 갈추인도 사공화정의 검에 어깨가 뚫린 채 싸움을 포기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남은 사람은 전유곤과 벽도현이었는데, 그가 바라보는 사이 전유곤의 검이 벽도현의 어깨를 꿰뚫으며 싸움이 끝났다.

 

그때 진사혁의 목소리가 전각을 울렸다.

 

“움직이면 확! 목을 부러뜨려버릴 테니 꼼짝 말고 있어!”

 

진사혁이 마지막으로 남은 화정대원의 이마를 곤으로 가리키며 눈을 부라린다.

 

그것으로 화정대도 완전히 제압된 상태.

 

서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독고무령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양우천과 공호승을 바라보았다.

 

“바깥일은 그대들이 맡아주어야겠소.”

 

한편, 양우천과 공호승은 가슴이 서늘하다 못해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암천사신이 강하다는 말을 듣긴 했다.

 

하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이야!

 

두 사람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상황에 반쯤 얼이 빠졌다.

 

특히 공호승은 몸이 굳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양우천의 제안을 받아들일 때만 해도 가능성을 반 정도로 봤다. 그럼에도 응낙한 것은, 더 이상 장치에 웅크린 채 비적들이나 상대하며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벽가의 오랜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런데…… 그 모든 일이 너무나 간단히 끝나버렸다.

 

산서십대고수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벽도정이 몇 수를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어버리다니.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멈출 것만 같은 저 무공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는 본디 무를 숭앙하는 사람.

 

가히 전설로나 들었던 절대의 무위를 목도하자 심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알겠소이다.”

 

공호승은 허리를 숙이고, 진심어린 경의를 표하며 대답했다.

 

암천사신은 자신의 그런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벽도정이 정신을 차린 것은 반각가량이 지나서였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러다 일 장 앞에 쓰러져 있는 벽계진이 보이자 목을 쥐어짜 소리쳤다.

 

“계진아!”

 

하지만 벽계진은 완전히 정신을 잃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겨우 몸을 일으켜 벽계진에게 다가간 벽도정은 주저앉다시피 몸을 숙이고 벽계진의 몸을 살폈다.

 

다행히 맥은 정상적으로 뛰고 있었다. 머리가 바닥에 부딪치는 바람에 정신만 잃었을 뿐, 내상도 그리 심각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전각 안을 둘러보았다.

 

주저앉아서 상처를 손보고 있던 장로들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참담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화정대는 반 이상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멀쩡히 서 있는 자들은 대부분 양가와 공가의 무사들이었다.

 

이를 악문 벽도정은, 뒷짐을 지고 서 있는 관조운을 올려다봤다.

 

“정신이 들었으면 이제 이야기를 나눠보지요.”

 

관조운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벽도정은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돌렸다.

 

그때 관조운의 어깨 너머로 독고무령이 보이자 후드득 몸을 떨었다.

 

“저자는…… 누구냐?”

 

관조운이 벽도정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암천회의 비밀호법이시오.”

 

아직은 독고무령의 존재를 밝힐 때가 아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될 테지만, 숨길 수 있을 때까지는 숨겨야 했다. 비밀이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오래 지켜지는 법.

 

관조운의 대답에 의문이 있었지만, 벽도정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허망하게 패했다.

 

벽가의 위상이 끝장난 상황.

 

모든 것이 허탈하기만 했다.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걱정 마십시오. 문주의 가족에게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권력다툼에서 밀린 자의 최후를 그가 어찌 모를까?

 

그런데 가족이 무사하단다.

 

아들도 죽지 않았고, 두 아우가 낀 장로들도 부상만 입었을 뿐 목숨을 건졌다.

 

지금 상황에서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원하는 것을 말해 봐라.”

 

“마지막 기회를 주겠습니다. 암천회에 힘을 보태시지요.”

 

“큭, 화천문은 이제 공가와 양가가 이끌 텐데, 그들에게 물어보지 그러느냐?”

 

“그분들은 태원으로 갈 것입니다. 화천문은 여전히 벽가의 것이지요. 물론 그분들에게 지분을 내주셔야할 겁니다만.”

 

벽도정의 표정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게…… 사실이냐?”

 

“두 분 가주님이 그렇게 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양우천과 공호승이 원한다고?”

 

“그렇습니다. 그분들은 본래부터 벽가와 척지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 본회를 돕겠다고 했지요.”

 

벽가는 화천문의 반이 넘는 세력을 지녔다. 벽도정과 벽계진이 제압당했다 해도 그들을 축출하려면 많은 피해가 날 수밖에 없는 일. 피해 없이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선 벽가와 싸우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진정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서로에게 해가 될 말이 아닌 만큼, 그저 관조운이 듣기 좋게 포장을 했을 뿐.

 

본뜻이야 어쨌든, 그 말에 벽도정의 마음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들이, 그들이 그랬단 말이지……?”

 

“수십 년을 함께해온 분들입니다. 사실 문주께서 자진해서 암천회를 돕겠다고만 했어도 오늘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벽도정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실이 그랬으니까.

 

더구나 자신을 내치고 화천문을 차지할 줄 알았던 양우천과 공호승이 오히려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고 하지 않는가.

 

자괴감이 밀려오며 몸이 축 처졌다.

 

모든 게 귀찮게 느껴졌다.

 

어차피 항거할 수 없다면, 흐르는 상황에 모든 걸 맡기는 게 나을 듯싶었다.

 

“후우, 알겠네. 암천회가 원하는 대로 하지.”

 

 

 

* * *

 

 

 

서연의 결과가 알려진 것은 독고무령 일행이 화천문을 나선 직후였다.

 

장치의 밀호방 책임자인 이십일호가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것이다.

 

“은룡산장이 귀원장으로 밀려났다고 합니다. 방주님의 생각으로는, 위지천백이 전열을 재정비한 후 귀원장을 공격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무리한 공격을 하다 관제산의 본성이 저희들에게 당할 것을 우려해서 늦춘 것 같다고 합니다.”

 

“쌍방의 피해 규모는?”

 

“제왕성이 오륙백, 은룡산장은 사오백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합니다.”

 

제왕성의 피해가 의외로 크다.

 

혈왕이 돌아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왔다면 그 정도의 피해로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자신이 모르는 변수라도 생긴 것인가?

 

그에 대한 것은 이십일호의 이어진 말로 인해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은룡산장의 무사들 중 광기에 젖은 자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멀리서 보기에도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합니다. 당시 상황을 지켜본 정보원의 말에 의하면, 팔다리가 떨어져나간 상태에서도 미친 듯이 달려드는 그들 때문에 제왕성의 피해가 많아졌다고 합니다.”

 

사악한 방법을 써서 장소천을 혈왕으로 만든 노태군이다. 다른 자라 해서 그렇게 만들지 못하란 법이 없었다.

 

‘노태군이 다급했나 보군.’

 

그들을 이용해 승리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왕성에 많은 피해를 주고, 후퇴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을 뿐.

 

‘어쨌든 그러한 승리라면 제왕성도 며칠간은 움직일 수 없겠군.’

 

암천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그때 진사혁이 콧등을 씰룩이며 말했다.

 

“한 번에 모든 걸 끝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공격하는 법. 완벽히 승세를 잡은 이상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어쨌든 우리도 서둘러야 할 것 같군. 위지천백이 관제산으로 돌아가기 전에 일을 끝내고 돌아가야 할 테니 말이야.”

 

“이제 어디로 갈 건가?”

 

“개봉에 잠깐 들른 후 한단으로 갈 거네.”

 

진사혁의 눈이 커졌다.

 

“한단? 천룡방에 찾아갈 생각인가?”

 

“맞아.”

 

“설마 이 인원으로 천룡방에 책임을 추궁하러 가는 것은 아니겠지?”

 

자신이 묻고도 말이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는지, 진사혁은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하, 하. 회주가 맘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을 텐데 말이지…….” 

 

독고무령은 무심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천룡방의 방문은 남행의 목적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이었다. 

 

단순히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거라면 제왕성과 은룡산장의 본격적인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중요한 때에 갈 이유가 없었다.

 

그는 나직이 입을 열어서 한 가지만 말해주었다.

 

“일단 북리중현을 만나볼 생각이네.” 

 

마지막 결정은 그를 만난 다음에 내려질 것이었다.

 

북리사웅의 일을 추궁하든, 아니면 또 다른 거래를 하든.

 

보다 냉정하고, 철저한 판단 끝에!

 

‘그가 소문만큼 현명한 자이기를.’

 

 

 

* * *

 

 

 

“충!”

 

대풍전 안에 늘어서 있던 백여 명의 무사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인다.

 

일성 외침에 건물이 흔들릴 정도다.

 

위지천백은 오연한 자세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마침내 노태군을 패퇴시키고 서연을 되찾았다.

 

중간에 괴이한 자들이 미쳐서 날뛰는 바람에 피해가 예상보다 많았지만, 어쨌든 승리한 것만큼은 분명했다.

 

물론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피해가 많아지는 바람에 노태군을 추격해서 완전히 섬멸해 버리지 못했으니까.

 

‘할 수 없지. 어차피 노태군은 하북으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전열이 정비된 다음에 처리하는 수밖에.’

 

문득 그의 입가에 잔잔한 조소가 번졌다.

 

제왕성이 대풍장을 치는 때를 맞춰 금의위와 도찰원도 움직이도록 했다. 은룡산장을 고립시키기 위해서.

 

그 일이 제대로 진행되었다면, 지금쯤 은룡산장은 금의위와 도찰원에 의해 앞뒤가 막혀 있을 터. 결국 돌아갈 곳이 없어진 노태군은 귀원장에서 마지막 발악을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태군, 분노가 하늘을 찔러도 미치지는 말아라. 그래야 마지막 죽기 전에 더욱 참담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후후후후…….’

 

노태군의 처지를 생각하자, 가슴 한쪽 구석에 찌꺼기처럼 남아 있던 불만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기분이 한결 좋아진 그는 웅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왕성의 무사들이여!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그대들은 그 주역으로서, 나와 함께 모든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니, 영광의 그날이 올 때까지 모두 힘을 합쳐 앞으로 나아가자!”

 

“충성을 바치리다!”

 

“목숨을 바쳐 따르리다!”

 

“충!”

 

무사들의 전신에서 뜨거운 열기가 터져 나왔다.

 

화산에서 분출하는 용암이 이리 뜨거울까!

 

“일어나라, 자랑스러운 제왕성의 무사들이여!”

 

위지천백의 목소리가 다시 울리자, 무릎을 꿇고 있던 백여 명의 무사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늙은 너구리를 잡으러 갈 것인 즉, 최대한 빨리 전열을 정비하도록 하라!”

 

“예, 성주!”

 

 

 

* * *

 

 

 

헌원조는 혈전이 벌어진 다음 날 아침 태양이 떠오를 때 대풍장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급히 사람들을 모았다. 어디까지 후퇴할지 아직 확실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귀원장까지 후퇴하든, 아니면 은룡산장으로 되돌아오든 위급한 것은 분명한 터. 지원무사가 절실히 필요할 것이 분명했다.

 

은룡산장에 남은 무사들은 모두 육백여 명.

 

그는 적검단을 비롯해서 삼백 정도를 추렸다. 그리고 오시 무렵, 은룡산장을 출발해 귀원장으로 향했다.

 

그가 삼백무사와 함께 은룡산장을 떠난 지 한 시진 후. 근 일천에 달하는 무사들이 은룡산장을 넓게 에워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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