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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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5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03화
203화
제9장 화천문, 암천회의 그늘 아래로 들어오다
쪽빛으로 물든 하늘. 뜨거운 태양이 바다 속에 떠 있는 것만 같다.
소나기가 한바탕 쓸고 지나가서 그런지 땅에서 올라오던 열기가 많이 가라앉은 상태다.
장치로 들어선 독고무령은 남북으로 뚫린 대로를 따라 곧장 직진했다.
아홉 명의 일행은 약간씩 거리를 두고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마치 어미오리를 따라가는 새끼오리처럼.
백여 장을 걸어 번잡한 거리를 벗어나자, 한 사람이 뜨거운 햇빛을 피해 처마 밑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무릎 위에 올린 손가락으로 호리모양을 만들고 있는 서른 전후의 장한. 밀호방의 정보원이었다.
<독고무령이오. 이야기를 나눌만한 곳으로 안내해 주시오. 조용히 쉴 수 있는 곳이면 더 좋고.>
독고무령은 전음을 보내고 그냥 스쳐갔다.
장한은 두 팔을 뻗으며 하품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털레털레 걸어갔다.
그러더니 대로를 따라 삼십여 장을 더 간 다음 골목으로 꺾어졌다.
장한이 안내한 곳은 장치의 뒷골목에서도 외진 곳에 있는 작은 장원이었다.
집 한가운데 작은 정원이 있는 소규모 장원이었는데, 외진 곳에 있어 조용하고, 근처에 신경 쓸 만한 건물이 없어 밀담을 나누기에는 적당했다.
독고무령과 일행이 차례차례 장원으로 들어가자, 장한이 문을 닫고 돌아서더니 허리를 숙였다.
“이십일호가 회주님을 뵙습니다.”
“수고가 많소.”
장한은 이마의 땀을 닦지도 못하고 허리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화천문에 연락은 했소?”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처마 밑에서 일어나며 하품을 한 것은 졸음을 쫓아내기 위해 한 것이 아니었다.
동료에게 회주가 왔음을 알리고, 화천문의 양우천에게 연락하라는 신호였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서 화천문의 현 상황에 대해 알려주시오.”
“알겠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양우천이 온 것은 반시진가량이 지난 후였다.
그는 일전에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담담한 웃음을 지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모두 다섯.
독고무령, 진사혁, 관조운, 사공화정, 전유곤이 탁자를 가운데 두고 앉아 있었다.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도 양우천은 태연히 탁자 쪽으로 걸어갔다.
“오랜만입니다, 회주.”
그는 한눈에 독고무령을 알아보고 포권을 취했다.
독고무령도 마주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계획을 서둘러야 할 것 같소.”
그는 양우천에게 어떻게 자신을 알아봤냐는 따위는 묻지도 않았다. 자신이 이 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얼굴이 달라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나 되었다.
눈빛이든, 기운이든, 하다못해 앉아 있는 상황을 보더라도.
양우천은 그 정도의 능력은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양우천의 능력을 잘못 헤아린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양우천은 그러한 몇 가지 조건을 순간적으로 판단해서 독고무령을 알아보았다.
탁자에 다섯 명이 둘러 앉아있다 해도, 은연중 작은 행동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걸 한순간에 눈치 챈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한 번 독고무령을 본 그이기에 미세한 차이를 바로 알아본 것이다.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공가는 어떻게 하기로 했소?”
“함께할 수 있는 자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자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자들도 있지요.”
그의 담담한 말투에서 진한 혈향이 느껴졌다.
그러나 독고무령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피를 보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을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최대한 피를 보지 않을 생각이오. 어차피 적으로서 상대하려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피를 봐야 한다면, 절대 망설이지 않을 것이오. 그 점을 직시하고 일을 처리해 주시오.”
양우천은 자신이 대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독고무령의 무심한 말투에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는 아는 것이다.
호랑이 앞에 선 여우가 왜 몸을 떠는지.
백수의 제왕이 지니고 있는 자연스런 위엄!
결코 치수로 잴 수 없는 절대자의 위엄 때문이 아니던가.
그는 오늘에서야 암천사신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명심하겠습니다, 회주.”
그의 목소리가 좀 전보다 더욱 공손하게 흘러나왔다.
* * *
양우천이 장원을 나선 지 한 시진 후, 독고무령은 일행과 함께 화천문으로 향했다.
진사혁과 관조운, 전유곤, 사공화정이 뒤따르고, 한무종과 종리청, 모용설, 감가기, 염부중이 큰 반원을 그리는 형태로 호위하며 뒤따랐다.
그들이 화천문에 도착한 것은 태양이 마지막 발악을 하며 서산으로 떨어지는 신시 무렵이었다.
화천문의 정문위사는 전과 다름없이 독고무령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날이 더워서인지 말투에서 약간의 짜증이 묻어 나왔다.
“정지! 무슨 일로 오셨소?”
진사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문주님을 만나러 왔소.”
정문위사는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자들이 하늘같은 문주를 찾아왔다고 하자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워낙 덩치가 큰 진사혁을 보고 성질을 억눌렀다.
‘빌어먹을 놈, 덩치는 더럽게 크네. 꼭 곰 같잖아?’
덩치 큰놈치고 머릿속에 든 것 없다는 옛말을 신봉하는 그는 짐짓 목에 힘을 주고 물었다.
“무슨 일로 그러는 거요?”
이번에는 관조운이 나섰다.
“암천회에서 왔다고 전해주시면 되오.”
암천회라는 이름이 나오자 위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귀가 있기에 최근 산서를 뒤흔든 사건을 모르지 않았다.
태원에 웅크리고 있는 암천의 별, 암천사신이 이끄는 단체가 바로 암천회가 아니던가.
혹자는 무천련의 후신이라도 하고, 어떤 자들은 암천사신을 중심으로 제왕성에 반기를 든 자들이 모여 만든 단체라고도 했다.
간혹 흑도의 무리들이 모여서 만든 별것 아닌 삼류단체라는 말을 하는 자도 있었고.
중요한 것은, 제왕성과 은룡산장이 손을 잡고 없애려 했을 만큼 강한 힘을 지닌 세력이 암천회라는 것이다.
“암천회의 누구시라고……?”
“일원궁에 적을 둔 관조운이오.”
일원궁과 관조운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위사는 자신이 처리할 수 없는 일임을 눈치 빠르게 깨달았다.
그는 옆에 있는 동료를 바라보았다.
“이봐, 안에 들어갔다 올 테니까, 자네가 이분들을 객방으로 안내해주게.”
벽도정은 벽계진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보고를 받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심상치 않은 상황이어서 끼어들고 싶지 않거늘 암천회에서 사람이 왔다. 그것도 일원궁의 이공자인 관조운이 직접.
목적은 뻔했다.
‘빌어먹을 놈들. 왜 조용히 있으려는 우리를 끌어들이려 한단 말인가?’
가만히 앉아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받아먹는 게 나은 상황이다. 암천회에 협조했다가는 제왕성에 의해 진짜로 멸문을 당할지 모르는 일. 그는 나서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암천회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거기다 관조운이 직접 왔는데 문전박대를 할 수도 없는 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버님?”
“일단 만나보기는 해야 할 것 같구나.”
마음을 정한 그는 벽계진에게 암천회의 사람들을 안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가서 그들을 화웅전으로 들이도록 해라. 다 올 필요는 없고, 대표로 서너 명만 오라고 해. 그리고 양가와 공가의 가주들도 오라고 하고.”
“예, 아버님.”
“그리고 너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화정대를 모아놓도록 해라.”
흠칫한 벽계정은 부친을 바라보았다.
“본문이 요구를 거절할 경우 저들이 허튼짓을 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사람 일이란 건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법이니라. 별일 없으면 그냥 돌아가면 되니 일단은 애비의 말을 따르거라.”
관조운을 만나고 싶지 않았던 벽계진으로선 차라리 그게 나을 것도 같았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화웅전은 화천문에서 가장 큰 전각으로, 일백 명이 도열해도 여유가 있을 만큼 내부가 넓었다.
독고무령이 관조운, 전유곤, 사공화정과 함께 화웅전으로 들어갔을 때는, 벽도정, 양가와 공가의 가주, 네 명의 화천문 장로가 먼저 와 있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벽도정의 이 장 앞까지 다가간 관조운이 먼저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독고무령이 관조운을 대표로 내세운 것이다.
벽도정은 웃음을 지으며 반가워하는 척했다.
“허허허, 고생이 많다고 들었네. 내 직접 도와주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는데, 자네와 같은 사람들이 있으니 안심이 되는구먼.”
관조운은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말만 앞세우는 자의 알맹이 없는 말 따위는 새겨들을 것도 없었다.
더구나 싸우다 도망친 벽계진 때문에 궁도들이 죽었거늘, 그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도 날선 송곳은 품속에 감추고, 겉으로는 담담히 웃었다.
“하하하, 문주 같은 분이 있으니 저희가 제왕성과 싸울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 생각해 준다니 고맙군. 허허허허…….”
찾아온 사람도 웃고, 주인도 웃는다. 누가 봐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야기가 끝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관조운이 다시 입을 열면서 훈훈하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화천문에서는 언제쯤 사람을 보내주실 계획이십니까?”
“허어……. 그게 좀……. 험, 솔직히 말해서 당장은 어렵다네. 요즘 남쪽에서 비적들이 설치는 바람에 무사들이 많이 빠져나가 있거든.”
남쪽에서 비적들이 설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화천문이 위협을 느낄 정도의 세력도 아니었고.
관조운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설마 그들이 화천문을 건들겠습니까?”
“허허허, 우리야 그렇지만, 양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데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의 말대로라면 당연히 권장할 일이었다. 백도의 문파로서 협을 행하겠다는데 누가 뭐라 한단 말인가?
문제는 화천문이 한 번도 그들을 치겠다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다른 표국들이 함부로 자신들의 권역에 발을 못 붙이도록 그들을 적당히 이용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관조운의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이 걸렸다.
“그러니까 비적들 때문에 저희를 도와주실 수 없다는 말씀이신지요?”
벽도정은 그 웃음의 의미를 알고 기분이 상했지만, 최대한 마음을 다스리며 말했다.
“도와줄 수 없다는 게 아니라 도와줄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네.”
“다른 가주 분들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군요. 혹시 제왕성을 상대하는 게 두려워서 문주님 혼자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은 아닙니까?”
관조운이 다시 한번 비꼬듯 말하자, 벽도정도 더 참지 못하고 노기 띤 표정을 지었다.
“너무 말을 함부로 하는군!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그 말은 못들은 것으로 하겠네!”
옆에 있던 화천문의 장로들이 한 소리씩 거들었다.
“우리가 자네들을 반드시 도와줘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군. 우리가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문주님이야 마음이 좋으셔서 자네의 말을 순순히 받아줄지 몰라도 모두가 같은 마음은 아니란 걸 알아야 할 것이네.”
“젊은 사람들이 단체를 이끌면 너무 앞서가려고 한다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도와준다고 암천회가 제왕성을 상대할 수 있겠나?”
“암천회야 근거가 없으니 뿔뿔이 흩어지면 되지만, 우리는 자칫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네. 신중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 아암.”
그들의 말에 힘을 얻은 듯 벽도정이 차가운 표정으로 관조운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더 이상 이야기 나눌 상황이 아닌 것 같군. 멀리 나가지 못하니 이해하고, 그만 가보게나.”
하지만 관조운은 물러날 마음이 없었다.
“당금 상황에서 제왕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문파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거야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요. 하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무천련의 한축으로써 너무 무책임하다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무천련? 훗, 무천련은 이미 와해된 것이 아니었나? 설마 암천회를 무천련이라고 우길 생각은 아니겠지?”
벽도정도 기다렸다는 듯 잔뜩 비꼬는 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