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9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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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9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99화
199화
진원명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그어졌다.
하지만 곧 독고무령의 말뜻을 짐작하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들의 목적이 군과 관을 침묵시키는 거라면 굳이 먼저 저들을 격동시켜서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겠지. 알겠네. 즉시 연락해서 그리하겠네.”
“그리고 당분간이라도 남은 분들을 이곳으로 모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본가의 사람들을?”
“가주님과 부상자만이라도 옮겨서 안정적인 치료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만.”
“음, 그도 그렇군.”
진원명이 순순히 수긍하자 독고무령도 말하기가 편했다.
“저는 잠시 이곳을 떠나서 몇 군데 다녀올 생각입니다. 그때까지 어르신께서 운양을 좀 도와주십시오.”
“내 평생 살던 집을 떠나왔네. 놈들을 무너뜨리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야. 걱정 말고 다녀오게.”
진원명의 무위는 제왕오로보다 반 수 정도 위다.
도왕과 백 초의 승부를 겨루었다는 것만으로도 강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현재 암천회에서 자신을 제외한 최고의 고수.
진원명이 암천회에 존재한다는 것은, 태원을 비우려는 독고무령에게 천군만마와도 같았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고맙긴…….”
씁쓸한 웃음을 짓던 진원명의 눈이 독고무령을 직시했다.
“그건 그렇고, 자네가 사혁이에게 준 것을 보았네. 듣자하니 수천제마구겁무를 다섯 번째까지 알아냈다고?”
진사혁과 헤어지기 전까지라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곱 번째까지 알아냈고, 여덟 번째도 가물가물 윤곽은 잡은 상태였다.
그래도 일단은 모든 걸 말하지 않고 질문에 수긍만 했다.
“예, 어르신.”
“정말 대단하구먼. 역시 내가 생각을 잘 했어. 허허허허, 인연이 닿지 않는 걸 억지로 끌어안고 있었더라면 모든 것이 사라질 뻔하지 않았는가 말이야.”
“어르신의 배려 덕분에 힘을 얻었으니, 너무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은혜는 무슨. 어차피 자네에게 보여주지 않았다면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네. 몇 달 사이 암벽화의 상태가 급작스럽게 안 좋아져서, 이제는 누가 본다 해도 그 깊은 뜻을 알아낼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
진원명의 말뜻을 깨달은 독고무령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암벽화가 훼손되기라도 했단 말씀입니까?”
“묘하게도 기운이 다 빠져버린 것처럼 바위가 부스러지고 있다네. 그 바람에 몇 군데의 실선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지.”
“그럴 수가…….”
“허허허, 너무 걱정할 것 없네. 이제는 선조께서 남기신 그림을 보고 몸을 상할 후손이 없을 것 아닌가? 어찌 보면 잘된 일일지도 모르지.”
아쉬움이 어찌 없을까?
하지만 진원명은 이미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기보다는 그로 인해 걱정거리가 하나 덜어졌다는 것에 만족했다.
“내 자네에게 하나 물어볼 게 있네.”
“말씀하시지요.”
진원명은 신중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무유에 대한 것도 파악했나?”
“어렴풋이 감은 잡았습니다만, 아직 상(像)을 구현하지 못했습니다. 말로든 글로든 표현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평생 쌓은 수양도 소용이 없었다. 진원명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몰아쉬었다.
수십 년 노력해서 무음과 부동을 얻은 그조차 무유에서는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던가.
독고무령의 말은, 그의 심장이 멈췄다 해도 뛰게 할 정도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품속에서 얇은 양피지 책을 하나 꺼냈다.
“받게나.”
독고무령은 바로 받지 않았다. 누렇게 변색된 책에서 왠지 모를 무게가 느껴져 손이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진원명은 조용히 웃으며 책을 독고무령 앞에 내려놓았다.
“완전히 주는 것이 아니네. 떠나기 전에 다시 돌려주도록 하게.”
그제야 독고무령은 손을 뻗어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때 진원명이 책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 안에 수천제마구겁무에 대한 비결이 적혀 있다네. 뜻이 워낙 난해하고, 암벽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으니 반쪽짜리에 불과하지만 말이야. 이제 암벽화가 무용지물이 된 이상, 천하에서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자네뿐이니 부담 갖지 말고 보게나.”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독고무령은 홀린 것처럼 양피지의 겉장을 넘겼다.
곧장 다섯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뇌락절혼겁(雷落切魂劫)]
독고무령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그것은 수천제마구겁무, 아홉 개의 춤 중 첫 번째 춤의 이름이었다.
* * *
그날 저녁, 인피면구를 쓴 독고무령은 검마저 천으로 감싸고, 운양과 함께 풍운장으로 통하는 지하통로로 들어갔다.
잠시 후, 지하통로를 나온 두 사람은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후원으로 향했다.
후원에 도착할 때까지 많은 사람이 운양에게 인사하며 지나갔다.
개중에는 독고무령이 얼굴을 아는 사람도 상당수 되었다.
하지만 인피면구를 쓴데다 어둠이 짙어서 독고무령을 알아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저런! 자네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누군지 아나? 암천사신이라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그렇게 말하면 어떤 표정일까?
운양은 속으로 실실 웃으며, 독고무령을 제왕오로가 있는 전각으로 안내했다.
방문 앞에 선 운양은 헛기침을 해서 기척을 낸 후 안에 대고 물었다.
“험, 운양입니다, 어르신.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게나.”
운양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막위지와 또 한 명의 노인이 함께 있었다.
차를 마시고 있던 두 노인은 운양을 뒤따라 들어오는 독고무령을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럼, 이야기 나누십시오.”
운양은 두 노인의 의아해 하는 표정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표내지 않은 채 그 말만 하고 몸을 돌렸다. 개인적인 비밀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 자리를 피해주기 위해서였다.
막위지와 노인은 굳이 운양에게 묻지 않았다.
당사자가 남아 있는데 남에게 물을 이유가 뭐 있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는지, 운양이 나가자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자넨 누군가?”
독고무령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묻는 막위지에게 다가갔다.
막위지와 노인은 서슴없는 독고무령의 행동을 이채 띤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탁 앞까지 다가간 독고무령은 두 노인네의 속이 터지기 직전에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접니다.”
간단해도 너무나 간단한 대답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늙은이 놀리는 거냐며 소리 질러도 당연할 정도.
그러나 막위지는 괴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쑥 내밀었다. 목소리가 귀에 익었던 것이다.
“자넨가?”
그 역시 독고무령처럼 단순하게 되물었다.
독고무령은 막위지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예, 잠시 신분을 감춰야 할 것 같아서 껍질을 하나 썼지요.”
다른 노인은 그때까지도 눈치를 못 채고 막위지와 독고무령을 번갈아보았다.
“허어, 나는 가봐야 할 것 같군. 왠지 내가 없어야 마음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것 같으니 말이야.”
조금 꿍한 말투. 놀림을 당한 기분이 든 듯했다.
막위지는 노인을 보며 피식 웃었다.
“바로 그 아이네.”
“그 아이?”
반문하던 노인은 그제야 눈치를 채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럼 자네가…… 독고무령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독고무령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길쭉한 얼굴, 가슴까지 늘어진 하얀 수염, 주름진 얼굴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다.
그가 노인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단홍수 손양과 묵혼신도 막위지를 제외하면 세 사람이 남았다.
그중 육지신마(六指神魔) 명대천은 오른손의 손가락이 여섯 개라 했다. 그리고 백응적소(白鷹赤簫) 은사문은 항상 홍죽(紅竹)으로 만든 피리를 들고 다닌다고 했다.
앞에 있는 노인은 손가락도 정상이고, 피리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앞에 있는 노인이 절혼비검(絶魂飛劍) 공손경이라는 말.
“막 어르신께 대충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해서 지난 일로 인해 쌓인 한은 잊기로 했습니다. 제왕성과 맞서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면 언제든 떠나십시오.”
감정이 배제된 무심한 목소리.
공손경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그가 어찌 독고무령의 가슴에 쌓인 한을 모를까?
그는 침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으음, 이것만은 분명히 했으면 한다. 우리는 제왕성과 싸우려는 것이 아니다. 위지천백과 그를 추종하는 무리를 제거하려는 것이지.”
“위지천백을 무너뜨리려 하다보면 제왕성을 상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후우, 그건 할 수 없지. 대신 최악의 경우가 닥친다 해도 제왕성의 명맥만큼은 이어지게 해다오.”
사연이야 어쨌든 자신의 핏속에도 제왕성을 세운 고가의 피가 반쯤 섞였다.
그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억지로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가 누군지 잊으셨나 보군요. 저 역시 저의 외가가 쌓아올린 탑을 억지로 부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긴……. 늙으니 공연한 걱정만 하는구먼.”
공손경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세 노인이 들어왔다.
음파를 차단했으니 목소리를 듣고 온 것이 아니었다. 운양에게 미리 말해 놨기에 찾아온 것이었다.
단홍수 손양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아는 독고무령과 얼굴이 달라서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독고무령이 먼저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손까지 나눠본 손양이 아니던가.
그는 독고무령의 목소리와, 몸에서 흘러나와 음파를 차단하고 있는 기운을 알아보았다.
“정말 자네였군.”
다른 두 노인, 명대천과 은사문은 주름진 눈꺼풀을 깜박이며 독고무령을 쳐다보았다.
독고무령이 먼저 그들에게 인사했다.
“독고무령입니다.”
명대천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사문은 입을 반쯤 벌렸다.
“자네가…….”
“바로 백장명의 아들이라는 그 아이……?”
“백가의 핏줄이라는 걸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저의 아버지는 독고헌이라는 분입니다.”
단호한 독고무령의 말에 제왕오로의 표정이 가지각색으로 변했다.
그들이 어찌 모를까. 그 몇 마디 안에 칼로 심장을 쑤셔대는 고통보다 더한 슬픔이 배어 있다는 걸.
“막가에게 다 들었을 테니 여러 말은 하지 않겠다. 그래도 이것만은 알아라. 사람에겐 하기 싫은 일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때가 있다는 걸.”
명대천이 콧등에 난 커다란 점을 털어내려는 것마냥 심하게 코를 씰룩이며 말했다.
독고무령도 그 말의 의미를 알기에 간단하게 대답했다.
“저도 압니다. 그래서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따지지 않으려는 것이지요.”
그때 손양이 반짝이는 눈으로 독고무령을 보며 말했다.
“구질구질한 말은 다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위지천백을 상대할 자신은 있느냐?”
독고무령은 무심한 눈으로 손양을 바라보았다.
등후양과 혈왕을 상대해 보기 전만 해도, 위지천백이 도왕 영호진광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무심천지연의 경지에 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거대한 산도 눈앞의 동산에 막히면 보이지 않는다.
동산에 올라야만 그 너머의 큰 산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너머의 산에 오르면, 또 그보다 더 큰 산이 나타난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산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하기에 그는 위지천백이 어디쯤 올라서 있는지 모르는 한, 그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없었다.
물론 지고 싶은 마음 역시 조금도 없었지만.
“적어도 그에게 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찌 들으면 패기가 없는 것처럼 들리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손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독고무령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독고무령과 한바탕 싸워본 사람. 그가 아는 위지천백은 결코 독고무령이 상대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지지는 않을 거라고? 너는 위지천백이 얼마나 강한지 아느냐?”
비웃음이 섞인 질문.
돌려서 물었을 뿐, 너는 위지천백의 상대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독고무령은 무심한 목소리로 손양의 입을 막았다.
“아마 어르신이 알고 계신 것보다 더 강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