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96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7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96화
196화
동굴을 벗어난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라도 보이면 흐른 시간을 대충 짐작할 수 있으련만, 보이지 않으니 며칠이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별수 없이 사람이 사는 곳까지 가서 알아보는 수밖에.
하지만 그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싸움이야 진즉 끝났을 터, 그 흔적이라도 봐야 했다. 남은 시신이 그대로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쏴아아아!
독고무령이 백천산에 도착할 즈음 굵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비에 젖은 어둠 속을 걸어서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계곡 안 어디에도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 쪽이 처리했든 모두 처리된 것 같았다.
그는 빗물이 흐르는 계곡을 천천히 걸었다. 찢어진 옷 사이로 빗물이 스며드는 것을 그대로 놔두었다.
진기를 튕겨내면 젖지 않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비를 맞고 싶었다.
빗소리를 뚫고 귀청을 울리는 악다구니와 비명 소리.
환청이 되어 들리는 소리에선 적도 아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도 저승으로 가는 길에선 모두가 동료가 되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통나무집에 도착할 즈음에는 바닥에서 뿌연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안개가 피어오르자 계곡 안의 풍경이 더욱 음산하고 축축하게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는 통나무집의 문을 밀었다.
끼이익.
어둠에 잠긴 통나무집 안의 광경은 삭막했다.
나무로 엮어 만든 의자가 부서진 채 여기저기 나뒹굴고, 탁자는 몇 조각으로 쪼개져서 주저앉아 있었다.
그나마 성한 의자를 하나 찾아낸 그는 의자를 열린 문 앞에 놓고 앉았다.
빗줄기가 통나무집의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귀청을 먹먹하게 울렸다.
안개는 더욱 짙어져서 계곡 안이 온통 뿌옇게 보였다.
바라보는 동안, 뿌연 안개 위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새벽어스름이 밀려오는데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안개는 이제 백천산을 완전히 뒤덮어서, 독고무령의 눈조차도 계곡 아래쪽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하늘을 한번 올려다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서 자신의 옷을 살펴보았다.
도검이 스치며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맨살이 보였다.
‘표 안 나게 꿰맬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옷을 매만졌다.
남들이 보면, 사람이 수백 명이나 죽었는데 옷이 찢어진 걸 걱정한다며 혀를 찰지 몰랐다.
하지만 그에겐 옷이 찢어진 게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소설향이 만들어준 옷이 아닌가 말이다.
옷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고개를 들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천, 조금만 기다려라. 내 반드시 너를 만나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내고야 말 테니까. 어머니를, 가족을 슬프게 만들 수는 없는 일 아니더냐?”
* * *
비가 그친 것은 백천산을 떠난 독고무령이 수양에 들어설 즈음이었다.
수양은 평온했다. 오랜만에 비가 와서 그런지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인피면구는 격전 중에 찢어져서 수선하기 전에는 쓸 수가 없게 된 상태였다.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얼굴을 반쯤 가린 독고무령은 일단 포목점으로 가서 찢어진 옷을 갈아입었다.
늘어진 머리카락, 덥수룩한 수염, 며칠 간 물만 마시며 운기만 한 덕에 움푹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눈.
지금의 그를 본다면 아마 운양이라 할지라도 알아보기 힘들 듯했다.
옷을 갈아입은 독고무령은 벗어놓은 옷을 포목점의 주인에게 내밀었다.
“이것 좀 고쳐주시오.”
포목점의 주인은 그가 내민 옷을 보고는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독고무령이 은자를 내밀자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걱정 마십시오, 공자! 완벽하게 손질해 놓겠습니다.”
돈만 많이 준다면야, 백 조각으로 잘라진 옷도 새것처럼 만들어줄 수 있다는 듯 자신 있는 말투였다.
독고무령은 제왕성의 눈을 의식해서 조양표국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산을 내려와서야 백천산의 혈전이 벌어진 지 칠 일이 지났다는 것을 알았다. 사나흘쯤 지났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일이 경과한 것이다.
지금쯤이면 자신이 죽거나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을 터.
아직은 자신에 생존 사실이 알려져서는 안 되었다.
그는 문이 굳게 닫힌 조양표국을 멀리서 한번 바라보고는, 몸을 돌려서 수양의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일전에 밀호방의 십칠호를 만났던 곳을 찾아간 그는 간단하게 요리를 시키고 주위에서 들리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대부분이 양민들이어서 강호와 관련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점소이가 요리를 가져올 때쯤, 바로 뒤쪽에서 강호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야기를 나누는 자들은 뜨내기 삼류무사로 보이는 자들이었는데,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암천사신이 실종되었다며?”
“그렇다고 하더군. 제왕성과 은룡산장이 한시적으로 손을 잡고 백천산에 있는 암천회를 쳤다고 하네.”
“제길, 좀 더 버틸 줄 알았더니…….”
“그 정도면 많이 버틴 것 아닌가?”
“좌우간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생각해 보게. 오죽 껄끄러웠으면 제왕성과 은룡산장이 손잡을 생각을 했겠나?”
“하긴 저번 일만 해도, 암천사신이 이끄는 암천회에 의해 양대 세력의 수하들이 수백 명이나 죽었다고 했으니…….”
“사실 암천회라는 존재를 이번 일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것만 봐도 암천사신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철두철미한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일이지. 제왕성과 은룡산장을 겁먹게 한 세력이 만들어질 때까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 말이야.”
“그럼 암천사신이 실종되었으니, 제왕성과 은룡산장이 본격적으로 싸우겠군.”
“암천회의 잔당이 남았다고 해도, 암천사신이 없는 이상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테니 그렇다고 봐야겠지. 아깝게 되었어. 그가 살아 있으면 제왕성이나 은룡산장이나 함부로 싸우지 못할 텐데…….”
“아, 얼마 전에 들으니까, 백천산 동쪽 계곡너머에서도 백 명이 넘는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하던데, 그럼 그들도 암천회의 사람들이었나?”
“아니, 그들은 천룡방의 무사들이었다고 하네. 그들이 왜 그곳에서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모두 팔다리가 뜯기고 몸이 터져나가서 눈뜨고 못 볼 정도로 참담한 상태였다고 하더군.”
“흐미, 대체 어떤 자들이 그렇게 악랄한 짓을 한 거지?”
“이건 나도 소문만 들은 건데, 혈왕이라는 마왕이 혼자서 그들을 모두 죽였다고 하네.”
“헉! 말도 안 되네. 어떻게 혼자서 천룡방의 무사들을 백 명 넘게 죽인단 말인가?”
“어허, 헛소리가 아니라니까. 못 들었나? 저번 백천산의 싸움에서도 반쯤 미친 혈왕에 의해서 양쪽 세력의 무사 오십여 명이 참담한 죽음을 당했다고 하지 않던가? 심지어 천궁신검 등후양도 부상을 입고 말이야.”
“그거야 그렇지만……. 후우, 젠장, 우리 같은 삼류무사들은 곁에도 가지 말아야겠구먼.”
“그래서 내가 능정으로 가지 않는 거네. 잘못하면 휩쓸려서 죽을지 모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이야기가 멈췄다.
독고무령은 잠자코 요리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점소이를 불렀다.
그리고 뒤에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라고 했다. 술이든 요리든.
이야기를 들은 대가이기도 했고, 할 수 있으면 마저 남은 이야기도 듣고자 함이었다.
‘다행히 태원은 공격당하지 않은 모양이군.’
“어이구, 고맙수!”
점소이가 뒤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뒤에서 간단한 인사말이 들렸다. 비록 무공은 삼류라도 예의를 모르지는 않는 자들 같았다.
그런데 다른 목소리의 주인은 한술 더 떴다.
“그냥 주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왜 우리에게 술과 요리를 시켜 준 거요?”
독고무령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허름한 옷차림에 지닌 기운도 약한 걸로 봐서 삼류낭인인 듯했다.
하지만 최소한 한 가지만큼은 삼류가 아니었다.
이런저런 소문을 종합해 나름대로 정보를 취합하는 기술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특히 나중에 대답한 자, 체구가 작은 매부리코의 장한은 그 방면에 대해선 나름 훌륭한 재주를 지닌 자였다.
‘운양이 보면 좋아할 자군.’
독고무령은 그렇게 생각하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비록 귀에 들려서 듣긴 했소만, 나름 그 가치가 있다 생각해서 그런 것이오. 괜찮다면 더 들을 수 있겠소? 물론 그에 대한 대가도 치를 수 있소만.”
매부리코의 장한은 별 사람 다 봤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그런 이유라면 나도 부담 없이 먹겠소. 그럼, 합석합시다. 나는 소전이라 하오.”
“하하하, 나는 곽승이외다.”
“나는 백무령이오. 그럼 내가 그리 가겠소.”
묻고 답하던 이야기는 반 시진이 지나서야 대충 끝이 났다.
독고무령은 소전의 이야기를 듣던 중 두 번을 놀랐다.
첫 번째는, 진가철방이 제왕성에게 당했는데, 이틀째 되던 날 문을 닫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은룡산장의 사람들이 은밀하게 혈왕을 찾으러 다니는 걸로 봐서, 암천사신과 마찬가지로 혈왕도 실종된 것 같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장한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암천사신이 며칠째 나타나지 않으니까, 제왕성과 은룡산장도 더 이상 암천회를 견제하지 않고 있는 것 같소.”
소전은 그 말을 하면서 이야기를 끝맺었다.
독고무령은 그들의 이야기에 만족했다.
자신이 제대로 본 것 같다.
소전이 그러한 것을 직접 조사해서 알아내지는 않았을 터. 결국 작은 소문을 모아 그런 결론을 내렸다는 것인데, 그러한 재주는 아무나 지닌 것이 아니었다.
“정보를 제법 잘 다루는데, 그런 재주를 제대로 살리고 싶은 마음이 없소?”
소전은 독고무령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럴 만한 곳을 알고 있소?”
“나와 함께 태원으로 갑시다. 아마 후회하지는 않을 거요.”
소전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술잔을 목구멍에 털어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 어릴 때부터 세상을 돌아다녔지만, 백 형처럼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먼저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소. 내 믿고 따라가리다.”
그때였다.
뒤늦게 들어와 입구 쪽에 앉아 있던 장한 하나가 힐끔거리며 독고무령을 살펴보았다. 그가 보는 것은, 독고무령의 얼굴이 아니라 허리에 매달린 검이었다.
그는 뭔가를 망설이더니, 가만히 손을 탁자 위에 올리고 중지와 엄지를 말아 쥐었다.
독고무령은 그 모습을 보고 조용히 전음을 보냈다.
<운양에게 전하시오. 풍운장이 아니라 밀호방으로 간다고 말이오. 아직 나에 대한 것이 알려지면 안 되니, 최대한 조심해서 소식을 전하도록 하시오.>
<아, 알겠습니다, 회주!>
장한은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기 위해서 엽차를 찻주전자 째로 들이켰다. 그러고는 동전 몇 닢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부리나케 밖으로 나갔다.
장한이 나간 뒤에야 독고무령은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무사가 진짜 숨겨야 할 것은 드러내놓고 남이 못 알아보기를 원하다니, 쯔쯔쯔, 한심하기는…….’
소전, 곽승과 함께 수양을 출발한 독고무령은 곧장 서쪽으로 향했다.
그날 오후, 태원에서 삼십 리가량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제왕성의 주력이 적사보에서 움직였다는 소문이 들렸다.
-위지천백이 직접 나섰다!
-사대천왕 중 셋이 위지천백을 따르고 있다!
소전이 그 소문을 듣더니 가느다란 눈을 반짝였다.
“아무래도 단 한 번의 격돌로 끝장을 낼 생각인 것 같소.”
독고무령은 슬쩍 토를 달아서 소전의 생각을 알아보았다.
“은룡산장도 만만치 않을 텐데, 제왕성의 뜻대로 되겠소?”
“혈왕이 있다면 백 형의 생각이 맞소. 하지만 아직 혈왕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은룡산장은 버틸 수 없을 거요.”
한 명의 절대고수가 가지는 의미는 엄청나다. 더구나 천궁신검 등후양을 비롯해 수십 명의 정예고수들을 꺾을 수 있는 고수라면 더욱 그러하다.
혈왕은 은룡산장 전력에서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핵심고수.
그가 없다면 소전의 말대로 은룡산장은 중대한 타격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질 일이다.
마음이 다급해진 독고무령은 소전과 곽승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하지만 내가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소. 태원으로 오거든 풍운장으로 찾아오시오.”
그는 그 말만 하고 걸음을 빨리했다.
가볍게 걷는 것 같은데도 소전과 곽승이 바라보는 사이 순식간에 언덕 하나를 넘어가 버렸다.
곽승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을 떡 벌렸다.
“뭐, 뭐야? 뭐가 저리 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