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9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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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8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94화
194화
자칫 검이 상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검이 상하는 것보다 이곳의 상황을 제대로 알아보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챙! 챙!
가끔씩 검으로 바위를 때리며 맹인이나 다름없이 움직였다.
갈수록 앞을 가로막는 바위가 많아졌다.
커다란 바위는 희미하게나마 보이니 괜찮았다. 오히려 무릎 아래의 작은 바위들이 더 거치적거렸다. 당연히 검으로 바위를 때리는 횟수도 많아질 수밖에.
그는 갈수록 앞이 험해지는 데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바위가 갈라졌다면, 그 틈이 아무리 깊다 해도 끝나는 곳이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옷이 비 맞은 사람처럼 흥건하게 젖어버렸다.
하지만 옷이 문제가 아니었다. 경사진 곳을 내려간다 생각했는데, 이십여 장 지점부터는 점점 위쪽으로 올라간다.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 오히려 안쪽으로 들어간 건가?
난감했다. 지금까지 온 길을 다시 돌아가려니 까마득했다.
더 걱정되는 것은, 과연 되돌아가는 것이 옳은 선택이냐는 것이었다.
“후우, 미치겠군.”
독고무령은 탄식하듯 한 소리 내뱉고 옆의 바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때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저만치, 석벽의 한쪽이 시커멓게 보이는 게 아닌가.
또 다른 틈인가?
독고무령은 안력을 돋우고는 검으로 바위를 때렸다.
챙!
불꽃이 반짝이며 전면의 석벽이 어렴풋이 보였다.
일순간 독고무령의 얼굴에 곤혹한 표정이 떠올랐다.
시커멓게 보이는 곳은 석벽이 갈라진 게 아니었다. 제법 큰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동굴은 높이만 해도 자신의 키보다 훨씬 높았다. 넓이도 일 장은 되어 보였다.
저긴 또 어디로 통하는 걸까?
동굴이라면 비옥십팔호실을 탈출할 때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쳐지는 독고무령이다.
하지만 당장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그로서는 새로운 길이라는 것에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몸을 다시 일으키고 동굴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챙챙!
검으로 동굴의 벽을 두들겨 보았다.
동굴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오직 어둠뿐.
그나마 바닥이 평평해서, 깨진 바위가 사방에 널린 바깥보다 휴식을 취하기에는 나아 보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때였다. 머리카락이 뒤로 날렸다.
걸음 때문에 발생한 바람이 아니었다. 미미하긴 하지만, 그것은 분명 동굴 안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안쪽에서 바람이 분다는 것은 어디론가 통하는 길이 있다는 말. 독고무령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다행히 이곳에서 죽을 운명은 아닌 모양이군.”
동굴은 상당히 깊었다. 높이와 넓이는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마치 뱀이 기어간 것처럼 구불거리며 길게 뻗어 있었다.
반각쯤 걷자 동굴이 점점 넓어지더니, 동굴광장이라 해도 좋을 만큼 제법 넓은 곳이 나왔다.
그런데 그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그곳부터는 동굴이 수직으로 뻗어 있었던 것이다.
검으로 바위를 쳐서 낼 수 있는 빛으로는 꼭대기가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바람이 위쪽에서 불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독고무령의 입에서 평소 잘 나오지 않던 쌍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공력이 예전과 같다면 문제될 것이 없었다. 검을 동굴 벽에 박으면서 경공을 펼치면 백 장 높이라도 올라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의 몸 상태로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결국 몸을 어느 정도 회복해야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말.
답답했다. 마음은 급한데 빠져나갈 수 없다니.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하지만 답답해한다고 해서 답이 나올 것도 아닌 터.
독고무령은 마음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굴광장의 직경은 칠팔 장 정도.
벽면에는 바위가 녹아내린 듯 기다란 돌기가 늘어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짐승의 등뼈가 수백 개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물기 때문인지 기름을 칠한 것마냥 번들거렸다.
챙! 챙!
독고무령은 검으로 바닥을 연속 후려치며 재빨리 바닥을 훑어보았다.
벽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한쪽 구석에 고여 있는 게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다. 최소한 목이 말라서 죽지는 않을 것 같다.
‘일단 물이 있는 이곳에서 몸을 다스려야겠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몸이 회복되어야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물이 고인 곳으로 다가간 독고무령은 손으로 물을 떠서 한 모금 마셔보았다.
가슴까지 시원해질 정도로, 물맛은 기가 막히게 좋았다.
상황이야 최악이었지만.
* * *
적막감이 감도는 대풍장 깊은 곳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짜증이 섞인 노태군의 노성이었다.
“아직도 찾지 못했느냐?”
적수천은 입술을 씹으며 일그러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든 정보망을 가동해서 찾고 있습니다만, 도무지 행방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버님.”
“이거야 원……. 소한은? 그는 어디 있느냐?”
“혈왕을 쫓아갔는데, 그 역시 지금은 연락이 두절된 상태입니다.”
노태군은 새파란 눈빛을 빛내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백천산 계곡에서의 싸움은 제왕성과 은룡산장, 그 어느 곳도 큰 이득을 보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
혈왕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늘, 상대도 그에 맞서 천궁신검 등후양을 보낸 것이다.
검왕이 그곳에 나타날 줄 누가 알았으랴.
하지만 제왕성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정작 큰 문제는 혈왕의 갑작스런 행동이었다.
혈왕은 무언가에 홀린 듯 미친 듯이 사람들을 죽였다고 했다.
눈앞에 있는 자는 적아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였는데, 오죽하면 적수천조차 그의 손길을 피해서 도주해야만 했다.
거기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혈왕이 피를 갈구하며 광분하면 그 정도의 참사가 일어날 거라는 걸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혈왕이 느닷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혈왕을 불러들이는 혈왕소를 불었는데도 제어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동안 한 번도 혈왕의 상태를 의심해본 적이 없는 노태군으로선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소한이 잠령혈시를 발동시켜서 혈왕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걸.
“찾아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천이를 찾아내!”
노태군의 흔들린 표정을 본 적수천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노태군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은 헌원조나 둘째형과 달랐다.
헌원조나 둘째형은 본래 잘나가던 집안의 자식이었다. 두 사람의 자질이 뛰어나지 못했다면 노태군에게 선택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사정은 그들과 달랐다.
자신은 거지였다. 길 가던 노태군이 살려주지 않았다면, 얼어붙은 영정하 강변에서 얼어 죽었을 거지.
비록 그를 구한 것이 재미로 한 일일지라도, 자신에게 노태군은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 역시 노태군의 냉혹한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에게 노태군은 진정한 아버지였다. 목숨을 달라고 하면 내줄 수 있는 그런 아버지.
적수천은 침중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최대한 빨리 찾아내겠습니다, 아버님.”
“말로만 하지 말고 찾아내란 말이다!”
버럭 소리를 지른 노태군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바보 같은 놈들, 어떻게 된 놈들이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으니…….”
적수천은 입술을 깨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에 송곳이 쑤셔 박히는 아픔이 밀려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을 나왔다.
* * *
진가철방은 일부 고수들을 암천회에 합류시키기로 결정했다.
인원은 모두 이십 명. 일류 상급 이상의 정예들만이 나서기로 했다.
더 많아 봐야 움직임에 방해만 되었다. 또한 진가철방을 지킬 사람도 필요했다. 하기에 천망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을 남겨 놓고, 이십 명만 가기로 했다.
밤이 깊은 자시 무렵.
그들은 진가철방을 나온 즉시 태원으로 향했다.
일행의 선두에 선 진사혁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회주는 괜찮은지 모르겠군.’
그도 백천산이 제왕성과 은룡산장의 공격을 받아 피로 뒤덮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터였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펄쩍 뛰며 먼저 백천산으로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진원명의 말에 철방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놈아, 네가 간다고 해서 뭐 뾰족한 수가 생기겠느냐? 걱정 마라. 그놈, 내가 봐서는 명이 긴 놈이다. 절대 죽지 않았을 게야.”
진사혁도 독고무령이 죽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독고무령만큼 강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가지 못하는 대신 석도명을 비롯한 철검위를 백천산으로 보냈다.
기다렸다는 듯 석도명과 철검위는 진가철방을 떠났다. 그리고 이틀 만에 돌아와서 암천회의 상황을 전해주었다.
백천산을 빠져나온 사람들이 태원에 집결하고 있다는 것, 독고무령은 아직 행방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 등등.
그 말을 들은 진원명이 일단 태원으로 가자고 했다.
진사혁도 조부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리고 지금, 태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쯤 와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밤부엉이처럼 진가철방을 떠난 일행은 그날 축시 무렵 태원의 북문을 통과했다.
* * *
운양은 며칠간 자신이 제대로 정신을 차린 날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충격의 시작은 백천산이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소식이 오면서부터였다.
그는 독고무령의 말대로 감시를 최고 단계로 올리고, 흑도삼당을 모조리 동원한 채 잔뜩 긴장하고 제왕성의 움직임을 살폈다.
다행히 제왕성은 태원에 대해서 손을 쓰지 않았다.
암천사신과 암천회의 주력만 제거하면 된다 생각한 듯했다.
그러던 차에 진가철방이 피로 물들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위지천백이 제정신인가?
하필 지금과 같은 때 진가철방을 건드리다니.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위지천백이 원하는 것이 뭔지 모르는 그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충격적인 소식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백천산을 빠져나온 무사들이 속속 풍운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정작 독고무령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운양은 사람들과 함께 초조한 마음으로 좋은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날 어둠이 태원을 뒤덮을 무렵.
한무종이 삼공과 함께 돌아왔다. 귀도는 팔이 부러진 채 혼수상태였고, 치선은 눈초리가 축 처진 것이 제법 큰 내상을 입은 듯했다. 그나마 마불의 상태가 괜찮아 보였는데, 순전히 금강불사공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한무종은 운양이 독고무령에 대해 묻자 이마를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근처에서는 찾지 못했소. 내상이 심하셨는데, 무사히 벗어나셨는지…….”
독고무령은 다음 날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그를 봤다는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운양은 밀호방의 정보원을 총동원해서 백천산을 중심으로 백 리 일대를 조사했다.
하지만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독고무령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그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독고무령이 정말로 땅 밑으로 꺼졌다는 걸.
밥맛도 나지 않은 운양은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고 한숨만 푹푹 쉬었다.
“후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시신이 안 보이는 걸로 봐서 죽진 않은 것 같은데.”
제왕성과 은룡산장 쪽에서도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그들이 독고무령을 죽이거나 발견했다면 조용할 리가 없거늘.
그들 역시 독고무령의 행방을 모른다는 뜻.
어디서 부상을 치료하고 있는 것 아닐까?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이 가장 컸다.
혈왕과 검왕의 손에서 벗어난 이상 죽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럼 다른 사람을 시켜서라도 연락을 해야 할 것 아냐?
“내가 정말 회주 때문에 미친다니까.”
운양이 투덜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였다. 밖에서 긴장한 목소리가 들렸다.
“방주,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운양은 강호의 고수가 암천회에 들기 위해서 찾아왔나보다 생각하고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안으로 모셔.”
곧 방으로 손님이 들어왔다.
모두 다섯. 하나같이 칠순은 되었을 법한 노인들이었다.
운양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들을 바라보았다.
척 봐도 보통 노인들이 아니었다.
“제가 운양입니다.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무령이를 찾아왔다.”
“무령? 혹시 회주님을?”
“그래.”
“저, 노선배님의 함자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노부는 막위지라 한다. 그리고 여기 이 친구는 손양이고, 이 친구는…….”
막위지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운양은 기절초풍할 것처럼 놀라서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서, 설마…… 제왕오로 어르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