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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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8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92화
192화
제4장 싸움은 이제부터다!
망치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태양만큼이나 뜨겁게 달아올라 있어야 하는 열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침묵의 진가철방이 왠지 낯설기만 하다.
진사혁은 진가철방을 보며 날듯이 뛰어갔다.
‘설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겠지?’
불안했다. 가슴이 뛰며 숨이 가빠졌다.
정문에 도착한 그는 황급히 문을 밀었다.
끼이이익.
경첩이 비명을 내질렀다.
진사혁은 안으로 들어가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중 몇 사람이 진사혁을 알아보고는 앞 다투어 소리쳤다.
“대공자님!”
“형님!”
“소가주께서 오셨다!”
단순히 반가워서 외치는 소리가 아니었다. 분노와 비통함이 버무려진 외침이었다.
진사혁은 그들에게 달리듯이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거요?”
여기저기 옷에 피가 묻은 청년이 이를 갈며 말했다. 동생이 되는 진사웅이었다.
“제왕성 놈들이 쳐들어와서……. 어서 명원으로 가보십시오! 가주님과 어르신들이……. 크흑!”
진사혁은 홱 고개를 돌리고는 이를 악물었다.
뒤에 서 있던 석도명이 다급히 그를 재촉했다.
“어서 가보세.”
진사혁은 대답도 없이 명원으로 달려갔다.
고통과 분노가 뒤섞인 소리가 명원에서 들려왔다. 일이 벌어져도 단단히 벌어진 듯했다.
진사혁이 다섯 명의 철검위와 함께 명원으로 다가가는데, 명원 안에서 두 사람이 뛰듯이 달려 나왔다. 진사혁에게 숙부가 되는 진관석과 진관동이었다.
그들은 진사혁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사혁이 아니냐?”
인사할 겨를이 없었다.
“인사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숙부!”
진사혁은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 명원으로 들어갔다.
진관석과 진관동도 진사혁의 다급한 마음을 알기에 그대로 놔두었다.
막 명원에 발을 디딘 진사혁이 벽이라도 만난 듯 우뚝 멈춰 섰다.
넓은 명원의 앞마당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다.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던 나무는 허리가 부러진 채 쓰러져 있고, 바위는 부서져서 황폐함마저 느껴질 정도다.
그 위에 핀 붉은 핏빛 꽃.
화향(花香) 대신 비릿한 혈향(血香)만이 가득하다.
진사혁은 이를 악문 채 걸음을 옮겼다.
한쪽에 길게 눕혀져 있는 사람들. 언뜻 봐도 수십 명은 되어 보였다.
팔다리가 부러진 사람, 몸이 반으로 꺾인 사람, 사지의 하나가 어디론가 떨어져 나간 사람.
온통 피로 범벅된 그들의 모습을 보니 몸이 후들거렸다.
그때 한쪽에서 몸의 상처를 돌보고 있던 사람 중 하나가 진사혁을 향해 외쳤다. 숙부인 진관욱이었다.
“사혁아!”
진사혁은 급히 그에게 다가가 거의 악을 쓰듯이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대체 어떤 놈들이 왔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단 말입니까!”
진관욱은 착잡함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으로 이를 갈며 말했다.
“도왕과 장왕이 수하들을 이끌고 왔다. 끝까지 놈들을 막았지만…… 보다시피 이렇게 되고 말았다.”
“도왕과 장왕이 왔단 말입니까?”
진사혁의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상황이 왜 이리 되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위지천백이 직접 오지 않는 한 겁날 게 없는 진가철방이다.
하지만 사대천왕 중 두 사람이 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조부인 진원명뿐이다. 아버지와 둘째숙부가 합공을 했다 해도 한 사람을 막아내기가 쉽지 않았을 터였다.
전이었다면 그리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무위가 초절정의 단계에 오른 지금은 그들이 얼마나 강한 자들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결국 무령이가 염려한 대로 위지천백이 그들을 다 끌어들인 건가?’
진사혁은 이를 악물고 시신을 향해 걸어갔다.
자신을 향해 웃던 숙부의 시신이 보였다. 진가의 형제들도 보였다.
끌어안고 분노를 터트리고 싶은데, 너무나 많은 시신이 오히려 그로 하여금 끓어오를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르게 만들었다.
“종 숙부……. 선 형님, 우 아우…….”
적이 도왕이든 장왕이든 상관없다. 진가철방을 친 자들.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혼자서 안 된다면, 독고무령에게 무릎을 꿇고서라도 부탁할 것이다.
복수!
진가의 복수가 얼마나 끈질긴지 그들에게 알려줄 것이다.
‘그대들은 오늘의 일이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 곧 알게 될 거다!’
진사혁은 시신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고는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님은 어디 계십니까?”
진관욱이 한숨을 쉴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방 안에 계시다.”
왠지 좋은 표정이 아니다. 말투에서 머뭇거림이 느껴진다.
진사혁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전각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숨을 한 번 몰아쉬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표정이 굳어 있는 석도명 등이 뒤에 서있었다.
“잠시만 기다리쇼. 아버님을 만나고 오겠수.”
“그러게나. 우리는 이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돕고 있겠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얼굴에 살집이 도톰한 중년여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사혁의 어머니인 설문화였다.
“사혁아…….”
“좀 늦었습니다, 어머니.”
“아니다, 아니야……. 잘 왔다. 그런데 네 아버지가……. 흑…….”
평생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살아오신 어머니가 눈물을 흘린다.
진사혁은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꾹 참고 침상으로 다가갔다.
진관호는 눈을 감은 채 가느다랗게 숨을 쉬고 있었다. 옷이 피로 물들어 있긴 했지만, 외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되었다. 외상보다 더 무서운 게 내상이 아니던가.
“어머니, 아버님은 좀 어떠십니까?”
“여러 사람이 달려든 덕에 목숨을 건지시긴 했다만, 어떻게 될지 아무도 확실히 말을 못하고 있다. 네 숙부들이 태원에 의원을 모시러 갔으니, 아무래도 의원이 오셔봐야 자세히 알 것 같구나.”
아마도 조금 전에 나간 두 분 숙부가 의원을 데리러 간 듯하다.
“아버지…….”
진사혁은 진관호의 손을 가만히 움켜쥐며 나직이 아버지를 불러보았다.
단단한 손에서 잔주름이 느껴졌다. 망치를 손에서 놓은 지 십 년이 지나 거칠진 않지만, 굵은 뼈마디 안에는 세월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아버지의 손이 이랬던가? 왜 여태 몰랐을까?
떠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잡아볼 걸…….
눈가를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옆에 있던 설문화가 슬픔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다. 어르신들도…….”
진사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조부님들도……?”
“다행히 아버님께선 무사하시다. 내상을 입으시긴 하셨다만, 놈들이 물러가는 바람에 큰 부상을 입진 않으셨지. 하지만…… 다른 분들은…… 죽은 분도 계시고, 네 아버지처럼 정신을 잃은 분도 계시고…….”
설문화의 목소리가 점점 심하게 떨렸다. 충격이 커서 감정을 다스리기가 어려운 듯했다.
아버지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
진사혁은 그 사이 조부님을 만날 생각을 했다.
“어머니, 일단 조부님을 만나 뵙고 오겠습니다.”
“그러려무나.”
진사혁은 아버지의 손을 한 번 꾹 쥐었다가 놓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진원명은 창백한 얼굴로 진사혁을 맞이했다.
“조부님!”
“목소리 좀 줄여라. 이 할아비 당장 죽지 않으니까.”
전이나 다름없는 목소리. 철없는 아이 바라보는 눈으로 핀잔을 주는 걸로 봐서는 큰 이상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눈 속에 어린 아픔만큼은 숨길 수가 없었다.
진사혁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도왕과 장왕이 왔다면서요?”
“끄응, 말로만 들었던 것보다 더 강하더구나. 게다가 그놈들이 데려온 놈들도 우리 아이들이 상대하기에는 너무 강했지. 제길, 그동안 너무 나태했어. 무공 수련에도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하거늘.”
그 말을 하는 진원명의 두 눈에서 분노의 한광이 번뜩였다.
사십여 명이 죽고 백여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기껏해야 삼십여 명의 사람에게.
그들을 이끌고 온 자들이 천하를 떨쳐 울리는 도왕과 장왕이라는 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자신들이 조금만 강했다면 그들에게 밀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조카와 손자들이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는 이를 악문 채 진사혁을 직시했다.
“얼마나 얻었느냐?”
밑도 끝도 없는 질문.
진사혁은 그 질문의 뜻을 알기에 자신 있게 대답했다.
“무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부동을 익히고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
진원명의 휘둥그레진 눈이 파르르 떨렸다.
“네가 무음관천을 익혔다고?”
“예. 무령이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진원명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독고무령이 어떻게 무음관천을 안단 말인가?
“무슨 말이냐? 그 아이가 어떻게 무음관천을 안단 말이냐? 그럼 네가 구결을 넘겨주었단 말이냐? 아니지, 그것은 구결을 안다고 해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거늘…….”
“그게 아닙니다. 제가 관천뇌곤을 익히는 걸 보고는, 무령이가 스스로 알아내어서 알려준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아이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진사혁은 이러쿵저러쿵 더 말하지 않고, 품속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이걸 보시지요. 무령이가 저에게 건네준 무음과 부동입니다.”
진원명은 종이를 받아들고 살펴보았다.
곧 그의 눈이 거세게 떨렸다.
“이, 이건……!”
그림도 없고 뜻도 이해하기 힘든 난해한 구결이다.
관천뇌곤을 모른다면 한 줄기도 알아볼 수 없는 극상승의 무공구결.
그러나 진원명은 후삼식 중 둘을 익힌 사람이 아니던가.
하기에 원전(原典)과 조금 다르긴 해도, 무음과 부동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가 놀란 것은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는 독고무령이 정립했다는 무음과 부동 안에 수천제마구겁무의 모습이 스며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진사혁은 진원명이 왜 놀라는지 알기에 간단하게 말해주었다.
“무령이는 암벽화의 수천제마구겁무 중 적어도 다섯을 파악했습니다, 조부님.”
“오오! 그게 사실이더냐?”
“예, 조부님. 무령이가 말하길, 셋은 확실히 익혔고, 나머지도 곧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
강하게 대답하는 진원명의 눈에서 더욱 강한 한광이 흘러나왔다.
놈들이 물러가며 마지막 기회를 준다고 했다.
이번에도 거절하면 완전히 몰락할 거라며, 협조하는 길만이 진가철방이 살 길이라고 했다.
“정말 대단하군, 일개 철방이 이렇게 강하다니. 하지만 거기까지외다. 사흘의 시간을 줄 테니 무기를 바치도록. 굴복하지 않으면 진가철방도 끝장이라는 것을 명심하시오. 서로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소? 하하하하!”
백리환이 떠나가기 전에 한 말을 떠올린 진원명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이놈들! 우리가 쉽게 굽힐 줄 알았다면, 네놈들은 우리를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다!’
수십 명의 형제들이 눈앞에서 죽어갔다. 그들의 사지에서 흘러나온 피가 명원을 붉게 물들였다. 굴복한다면 죽음을 당한 형제들이 슬퍼할 것이다.
진원명은 가슴이 갈가리 찢겨지는 아픔을 속으로 삼켰다.
조금 전만 해도 복수의 가능성이 이 할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관천뇌곤의 후삼식이 새롭게 재탄생했다.
또한 수천제마구겁무가 백수십 년 만에 현세하기 직전이다.
싸움은 이제부터다!
“무령이를 만나야겠다.”
“무령이를요?”
진원명이 이를 갈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우리도 그 아이와 함께 제왕성을 상대할 생각이다.”
진사혁은 해연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조부님?”
“우리 진가가 강호 일에 관여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경우, 가문의 존망이 걸렸을 때다. 지금이 그때다! 죽는 한이 있어도 남의 종으로 살아갈 수는 없지. 형제들을 죽인 위지천백 같은 놈에게 협조하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게 나아!”
진사혁이야 어차피 제왕성과 싸우고 있는 사람,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한 가지 걱정거리만 해결된다면, 오히려 그가 먼저 설득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저희가 정면으로 대들면 보나마나 철방을 피로 씻으려 할 텐데, 일반 가솔과 무공을 모르는 가족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진원명은 이를 악문 턱에 힘을 한번 주고 씹어 뱉듯이 말했다.
“가주께 말해서 천망(天網)의 사용을 허락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