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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제 224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175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암천제 224화

 

224화

 

 

 

 

 

 

장소천의 얼굴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당장 울음이라도 터져 나올 것처럼.

 

“무, 무령? 무령이라고?”

 

“유유가 자네 모습을 보면 많이 놀리겠군.”

 

독고무령의 입가에 장난스런 웃음이 번졌다.

 

유유를 안다. 역시 자신이 아는 그 무령이다.

 

오래전에 떠났던 친구.

 

장소천은 참을 수 없는 격정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유유가 놀려도 지금의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 정말 내가 아는 그 무령이지?”

 

“이제와 말이네만, 그건 성이 빠진 이름일 뿐이네. 성까지 하면, 독고무령이 정확한 이름이지.” 

 

“독고…… 무령?”

 

눈물이 맺힌 장소천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불거졌다.

 

암천사신 독고무령!

 

하루에 두 번, 잠깐 정신이 돌아오는 와중에 그 이름을 들었다.

 

그때마다 왠지 ‘무령’이라는 이름이 반가웠다. 자신의 옛 친구와 같은 이름이 아닌가?

 

하지만 사람들이 의심할까 봐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야만 했다.

 

그런데…… 그 ‘무령’이 독고무령이란다. 제왕성과 은룡산장의 절대자들을 곤혹하게 만든 암천사신 말이다.

 

주르륵.

 

눈을 감은 장소천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얼굴에는 환한 웃음꽃이 피어나 있었다.

 

“울면서 웃다니, 정말 유유에게 말해주어야겠어.”

 

장소천은 독고무령이 놀려도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하루에 두 번, 장소천이 아닌 혈왕으로 살아온 그였다.

 

기억나지 않는 꿈속에서의 또 다른 자신, 혈왕의 삶이 의미하는 걸 자세히 알게 된 후부터 그는 절망에 빠졌다.

 

깨어날 때마다 구역질이 날 거 같았다. 손에 피가 잔뜩 묻어 있던 그날은 환멸에 몸을 떨며 스스로를 증오했다.

 

이대로 죽어버릴까? 스스로 무공을 폐지하면 어떨까?

 

수십 번은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욱한 감정을 눌렀다.

 

언젠가는 혈왕을 누르고 자신을 되찾을 수 있겠지.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그런 희망을 품고서.

 

하거늘, 마침내 그러한 날이 현실로 다가왔다.

 

혈왕이 깨어나지만 않는다면.

 

‘한 시진 정도 지나면 알게 되겠지.’

 

 

 

장소천이 마음을 다스리느라 반각가량 눈을 뜨지 않자, 독고무령이 나직이 말했다.

 

“좀 쉬게. 이야기는 쉰 다음에 하지.”

 

장소천은 눈을 슬며시 뜨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힘이 없어 쉬고 싶었다.

 

하지만 해줄 말이 너무 많았다.

 

지금 상황이 단순히 꿈일지라도, 깨어나면 소한의 옆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될지라도, 그는 누구에게든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그게 독고무령이라면, 자신의 친구인 무령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 상황이 현실이고, 만에 하나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혈왕으로 변해 있다면, 독고무령만큼은 그 이유를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자네가 떠나고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태원에 갔다가 그를 만났다네.”

 

장소천의 입에서 나직한 말이 흘러나오자, 독고무령은 말없이 듣기만 했다.

 

장소천이 말하는 ‘그’가 누군지 묻지도 않았다. 조금 있으면 알게 될 테니까.

 

“처음 그가 자신의 제자로 들어오라고 했을 때 조금 역겨운 생각이 들었지. 남자가, 그것도 나이 먹은 노인이 얼굴에 분을 바르고 다니는데, 좋게 보일 리가 없잖은가?”

 

독고무령은 그 말에서 ‘그’가 누군지 확실하게 알았다.

 

장소천은 독고무령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는 강했네. 내가 아는 누구보다. 산서의 십대 고수 중 하나라는 적궁검(赤穹劍) 상수광을 단 몇 수에 때려눕힐 정도로. 강해지고 싶었던 나는 그를 따라가기로 했네. 나중에 알았지만, 내가 따라가지 않겠다고 했어도 그는 나를 데려갔을 거네. 강제로라도 말이야.”

 

장소천은 그렇게 자신이 지옥으로 들어간다는 것도 모르고 노태군을 따라서 은룡산장으로 갔다.

 

처음에는 일반 제자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지냈다.

 

심법을 익히고, 초식을 수련하고, 무고에 있는 무공서 중 마음에 드는 것을 찾으면 뛸 듯이 기뻐하며 밤새우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삼 년이 지나자 상황이 달라졌다. 노태군의 명으로 혈왕동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익힐 수 없었다. 오직 노태군이 가르치는 것, 그가 하라는 것만 해야 했다.

 

그것이 천하제일의 무공을 얻는 길이라 했으니까.

 

“나중에 알았는데, 나처럼 혈왕동에 들어왔던 사람 중 열두 명이 죽었다고 하더군. 혈왕의 기운을 이기지 못해서 말이야.”

 

그렇게 혈왕동에서 수련한 지 사 년. 그의 정신 속에서 마물이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혈왕의 탄생!

 

노태군이 그렇게 바라던 혈왕이 마침내 깨어난 것이다.

 

사실 당시에 모든 것이 완벽했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독고무령과 장소천이 마주보고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치 않은지, 노태군의 계획에 실 같은 금이 갔다.

 

너무 급하게 혈왕을 깨우려는 바람에 찰나 간의 빈틈이 생긴 것이다.

 

장소천이 하루에 두 번 자신의 정신으로 되돌아오게 된 것은 바로 그 빈틈 때문이었다.

 

“길면 한 시진, 짧으면 반 시진 정도 내 정신이 돌아온다네. 그리고 나머지는 혈왕이 내 몸을 차지하지.”

 

장소천이 쉴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 말을 하기 위함이었다.

 

 

 

장소천의 이야기는 이 각가량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독고무령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장소천의 내부에 또 다른 자아가 있을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그토록 복잡하고 무서운 사연이 숨어 있었을 줄이야!

 

“그럼, 자네가 또 혈왕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건가?”

 

장소천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허공을 응시했다.

 

“두고 보면 알겠지. 혈왕이 아직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면…… 다시 깨어날 테니까.”

 

독고무령은 안쓰러운 눈으로 장소천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득, 장소천을 치료하던 중 벌어진 자신과 혈왕과의 싸움이 떠올랐다.

 

“으음, 내가 지닌 기운으로 혈왕의 사이한 기운을 대부분 몰아냈으니, 혈왕도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거네. 절대 놈에게 지지 말고 버티도록 하게.”

 

“당연히 버텨봐야지.”

 

장소천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버텨서 혈왕의 정신이 자신을 장악하는 걸 막아낼 수 있다면 전부터 그리했을 터였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불가항력이라네. 나도 모르는 사이 혈왕이 나를 차지하거든.’ 

 

그때였다. 갑자기 나른한 기분이 들며 눈이 감겼다.

 

오랜 시간에 걸쳐 가슴속에 뭉친 이야기를 털어놓아서 그런지,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한 상태였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무슨 일이 벌어져 있을까?

 

옆에 무령이 그대로 있을까, 아니면…… 소한이 있을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의식이 점점 멀어졌다.

 

‘무령, 너무 힘들다. 제발 나를 지켜다오.’

 

 

 

장소천이 깨어난 것은 두 시진가량이 지나서였다.

 

운기를 멈춘 독고무령은 고개를 돌려 장소천을 바라보았다.

 

장소천은 눈을 반개한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독고무령은 미동조차 없는 장소천을 바라보며 나직이 물었다.

 

“기분이 어떤가?”

 

순간! 두 손을 갈고리처럼 쳐든 장소천이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눈을 부릅뜨고는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크와왁!”

 

독고무령은 가볍게 손을 저어서 장소천의 두 손을 잡아챘다.

 

그러고는 코앞까지 다가온 장소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채 말했다.

 

“모른 척하고 한 대 때리려다 참았네. 이러다 내상이 도지면 그냥 놔두고 갈 테니 알아서 하게.”

 

“크큭, 크크큭…….”

 

나직한 흐느낌이 장소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동굴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햇빛의 각도를 보니 적어도 한 시진 이상은 흐른 것 같았다.

 

그런데도 자신은 혈왕이 아니었다.

 

마침내 혈왕은 완전히 자신의 머릿속에서 소멸된 것인가?

 

자신할 수는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지금 자신이 장소천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눈물이 날 만큼 기쁜 마음에 장난을 한번 해보았다. 그런데 단박에 알아채고 자신을 나무란다.

 

지금은 그런 나무람도 좋기만 했다. 자신의 존재가 있기에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닌가.

 

“무령, 내가 분명 장소천인 거지?”

 

“맞아. 유유가 바보라고 놀리기 딱 좋은 꼴을 하고 있지 않은가?”

 

바보라고 불러도 좋았다. 지금의 상태로 유유를 만날 수만 있다면, 부모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고맙다, 친구.”

 

 

 

* * *

 

 

 

시간만 있다면 며칠 더 머물며 장소천의 내상을 최대한 치료하고 싶었다.

 

하지만 제왕성이 노태군을 쳤을 거라는 걸 확신하는 만큼 더 머물 수가 없었다.

 

장소천이 일어설 정도가 되긴 했지만, 경공은커녕 걷기도 힘든 상태. 독고무령은 자신의 등을 장소천에게 내밀었다.

 

“업히게.”

 

장소천은 독고무령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걷지도 못해서 자네 등에 업혀 갔다는 게 알려지면 유유가 정말 놀릴 텐데?”

 

“걱정 말게. 비밀은 꼭 지켜줄 테니까.”

 

장소천도 대충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일이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오죽하면 천하의 암천사신이 등을 내밀겠는가.

 

“그래? 그럼 어디 친구의 등에 한번 업혀볼까?”

 

“엉뚱한 짓은 하지 말게. 달리다 말고 던져버릴지도 모르니까.”

 

“흐흐흐, 내가 왜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마다한단 말인가? 염려 붙들어 매게.” 

 

잠시 후, 동굴을 나선 독고무령은 곧장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 * *

 

 

 

독고무령이 장소천을 업고 동굴을 벗어난 지 반시진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백여 명에 이르는 무사들이 동굴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백리환과 영호진광을 비롯한 제왕성의 무사들이었는데, 소한이 그들을 인도하고 있었다.

 

“제길! 겨우 찾아냈는데, 아무래도 이곳을 떠난 것 같소.”

 

동굴을 바라보던 소한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백리환은 힐끔 소한을 바라보고는, 동굴을 향해서 훌쩍 신형을 날렸다.

 

동굴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백리환은 실망하지 않았다.

 

시커먼 핏물이 보였다. 비록 사람은 없지만, 누군가가 머물렀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조금 전까지.

 

“흠, 정말로 여기에 있긴 있었군.”

 

솔직히 반신반의했었다. 무슨 기운의 흔적을 쫓는다는 소한의 말이 헛소리처럼 들렸던 것이다.

 

그런데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보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갔을 것 같소?”

 

바로 뒤따라온 소한은 바닥에 쪼그려 앉더니, 시커먼 핏물을 손가락으로 찍어서 맛을 보았다.

 

곧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무슨 일이오?”

 

소한이 핏물을 찍어 맛을 보는 걸 보고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영호진광이 물었다.

 

소한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놀라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혈왕의 기운을 몰아냈단 말인가?’

 

말도 안 돼!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인간의 힘으로 혈왕의 기운을 몸 밖으로 몰아낸다는 것은, 자신이 아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이 일을 어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혈왕을 데려간 자가 최소한 혈왕과 동격의 고수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것도 멀쩡할 때의 혈왕만큼이나.

 

그러한 자가 천하에 얼마나 될 것인가?

 

‘암천사신 독고무령! 진정 그가 살아 있었던 건가?’

 

그럴 가능성이 컸다. 얼굴이 다르다는 것은 그의 결정에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천하의 젊은 자들 중 그 정도의 고수가 몇이나 된단 말인가?

 

적수천도, 위지성도 그에 비하면 호랑이 앞의 고양이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짐작을 확신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 영호진광이 재촉하듯이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놈을 쫓읍시다.”

 

‘무식한 놈. 추적이라는 것이 무작정 쫓는다고 다 되는 건 줄 아나?’

 

소한은 은근히 짜증이 났다.

 

자신의 생각을 백리환과 영호진광에게 알려야 하는데, 왠지 알려주기가 싫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오만한 시선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상대가 암천사신이라는 이유가 더 컸다.

 

독고무령.

 

전부터 이상할 정도로 반감이 들지 않는 이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추적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혈왕의 상태를 확인해야 하니까.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았다면 어떤 상태인지.

 

“놈이 이곳을 떠난 지 반시진 조금 넘은 것 같소. 혈왕이 중상을 입었다면, 오십 리 이상은 벗어나지 못했을 거요.” 

 

백리환이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날이 저물 때까지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영호진광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쫓다가 안 되면 돌아가면 될 것이 아닌가.

 

“일단 쫓을 수 있는 데까지 쫓아보죠, 형님. 놈의 흔적을 찾은 것만 해도 다행 아닙니까?”

 

백리환도 어쩔 수 없다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소한을 재촉했다.

 

“좋네, 그럼 서두르도록 하지. 앞장서시오.”

 

 

 

* * *

 

 

 

등에 업힌 장소천의 무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진기로 몸을 감싸고 있으니, 움직임으로 인한 충격도 거의 느껴지지 않을 것이었다.

 

한 걸음에 죽죽 사오 장을 나아가는 독고무령의 발길은 가볍기만 했다. 

 

일단 태원으로 간 후, 숭산에 사람을 보내서 장소천을 찾았다는 걸 알릴 생각이었다.

 

장이생 부부와 장유유가 기뻐할 것을 생각하니 얼굴에 절로 웃음이 걸렸다.

 

그런 백천산을 완전히 벗어나 수양으로 향할 즈음, 등에 업힌 장소천의 몸에서 미미한 변화가 느껴졌다.

 

평소라면 신경 쓸 것도 없을 정도로 미미한 변화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것조차도 염려가 될 정도로 장소천의 몸이 좋지 않았다.

 

“소천, 괜찮나?”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독고무령은 걸음을 늦추고 다시 물었다.

 

“소천, 몸이 안 좋은가? 또 장난하는 거면 내동댕이칠 거네.”

 

대답 대신 들리는 가느다란 숨소리.

 

“흐으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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