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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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3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20화
220화
독고무령은 백의노인이 노태군임을 확신했다.
위지천백과 싸우고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아니고서야 혈왕을 상대로 저토록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자가 은룡산장에 누가 있을까?
그가 바라보는 사이 노태군이 물러나고, 다시 사령귀안과 백골마존이 나서서 혈왕을 공격했다.
독고무령은 그들의 뜻을 간파하고 표정이 굳어졌다.
‘차륜전?’
차츰차츰 힘을 빼서 사로잡겠다는 생각인 듯하다.
평상시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빠른 시간 안에 혈왕을 제압하고 전력을 정비하지 않으면 제왕성에게 쉽게 무너질 가능성이 컸다.
‘일단 소천이를 저들과 떼어놓아야 해.’
그는 정황을 살피면서 기회가 나길 기다렸다. 저들이 사로잡으려 하는 한 당장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서너 번의 공세가 오가는가 싶더니 사령귀안과 백골마존이 뒤로 밀려나는 게 보였다. 그 순간 잠시 틈이 생겼다.
그는 그 틈을 타 혈왕에게 전음을 보냈다. 태천일심의 기운을 실어서, 강하게!
<혈왕! 그들을 놔두고 장원을 벗어나라!>
찰나였다. 오연한 자세로 서 있던 혈왕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홱 돌아갔다.
태천일심은 그가 지닌 마공과 상극의 기운.
억눌려 있던 정신이 무의식중에 반응한 것이었다.
노태군은 그의 갑작스런 행동을 보고는, 공격을 하려다 멈칫했다.
그야말로 눈 한 번 깜박할 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이 상황을 급박하게 변화시켰다.
절대 물러설 것 같지 않던 혈왕이 갑자기 오른쪽으로 신형을 날린 것이다.
노태군이 대경해서 소리쳤다.
“어딜 가느냐, 소천!”
도주하려는 행동을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만반의 경계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 물러설 것 같지 않았기에 경계심이 풀어져 있던 상황이었다.
에워싸고 있던 무사들은 혈왕이 날아들자 당황해서 분분이 물러섰다.
포위망이 뚫리는 걸 보고 적수천이 소리쳤다.
“물러서지 마라! 막아!”
몇 사람이 황급히 혈왕의 앞을 막아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혈왕잠천마공의 가공할 기운은 그들이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눈 깜짝한 순간에 서너 명이 피를 뿌리며 뒤로 튕겨졌다.
그로인해 혈왕의 속도가 조금 늦춰지자, 노태군이 혈왕을 향해 날아가며 분노를 터트렸다.
“소천, 이놈! 이리 와라!”
혈왕이 은룡산장의 무사들을 죽이는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자신을 또 떠나려 한다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혈왕 장소천은 오직 자신만의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사령귀안과 백골마존은 물론이고, 은룡산장의 초절정 고수 십여 명이 그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한편, 독고무령은 혈왕이 자신이 있는 곳으로 날아오는 것을 보고 태천일심의 기운을 팔성까지 끌어올렸다.
혈왕이 건물 바로 앞에 멈춰 서서 지붕 위를 올려다본다.
의혹과 분노가 뒤범벅되어 광기로 빛나는 눈빛.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나는…… 그 기운을 알아…….”
‘태천일심의 기운을 알아본 모양이군.’
인피면구를 쓴 상태. 얼굴이 다른데도 단번에 알아본다.
하긴 이상할 것도 없다. 자신 역시 얼굴이 달라진 혈왕을 바로 알아보지 않았던가.
그때였다.
“더는 못 간다!”
바로 뒤까지 쫓아온 노태군이 혈왕의 뒤쪽 삼 장거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소리쳤다.
<내가 막을 테니 일단 장원을 벗어나라! 이야기는 이곳을 벗어난 후 하자!>
다시 한번 빠르게 전음을 보낸 독고무령은 검을 뽑아들고 혈왕의 뒤쪽으로 날아갔다.
그를 발견한 노태군이 버럭 소리치며 쌍장을 들어올렸다. 독고무령을, 혈왕을 조종하는 자라 생각한 듯했다.
“찢어 죽일 놈! 네놈이 천아를 이리 만들었느냐?!”
대답 대신 한 줄기 청광이 암천을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마치 검은 종잇장이 예리한 칼날에 갈라지는 듯했다.
이마가 쩍 갈라지는 느낌!
“흡!”
노태군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다급히 쌍장을 휘둘렀다. 일순간 붉은 손 그림자가 허공을 가득 메우며 핏빛 장막이 첩첩이 펼쳐졌다.
청광이 핏빛 장막 위로 떨어져 내린 순간!
쩌저적! 쾅!
청광과 혈광이 터져나가며 벽력음이 일었다.
가공할 충돌의 여파는 노태군의 바로 뒤까지 따라왔던 사령귀안과 백골마존마저 밀어내고, 다수의 은룡산장 고수들을 사정없이 나뒹굴게 만들었다.
독고무령은 노태군과 일수를 겨루고는, 그 반탄력을 이용해 허공으로 십 장이나 솟구쳤다.
그에 반해 노태군은 뒤로 두 걸음을 물러난 뒤 눈을 부릅떴다.
천하에서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자는 몇 되지 않는다. 젊은 자는 더더욱 적다. 아무리 혈왕과의 접전으로 공력이 소모되었다 해도 그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하거늘 자신과 일수를 겨루고도 별 타격을 받지 않은 듯 보인다.
‘대체 저놈은 누군데 이리도 강하단 말인가! 조금만 지나면 천하에 적수가 별로 없겠구나!’
바로 그때, 노태군의 눈에 혈왕이 들어왔다.
그토록 강력한 충돌의 여파가 주위를 휩쓰는데도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노태군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귀안! 마존! 놈을 막아라! 나는 천아를 잡을 것이다!”
그러고는 혈왕을 향해 접근했다.
그의 명이 떨어지자, 밀려났던 사령귀안과 백골마존이 독고무령을 향해 날아올랐다.
혈왕을 제외하면 겁날 것이 없는 그들이었다. 더구나 새파랗게 젊은 놈이 아닌가? 비록 노태군의 일격을 받아내기는 했지만, 그 정도만으로는 그들을 두렵게 할 수 없었다.
허공으로 솟구쳤던 독고무령은 그들을 보며 무심한 표정으로 검을 들어올렸다. 장소천의 상황이 마음에 걸렸지만, 일단은 달려드는 자들부터 처리해야 했다.
다행이라면 노태군이 혈왕을 향해서 살기를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후우웅!
위로 쳐든 그의 검에서 은은한 청광이 일렁였다.
그 사이, 노태군은 혈왕의 삼 장 앞까지 다가갔다.
혈왕은 달아날 생각이 없는지 그 자리에 서서 허공에 떠 있는 독고무령만 보고 있었다.
“이리와라, 천아야.”
혈왕이 고개를 돌려 노태군을 바라보았다.
눈에 붉은 기운이 감도는 것은 여전했다.
그러나 뭔가 모르게 전과 다른 느낌이 드는 눈빛이었다.
혼돈의 눈빛.
‘마침내 제정신을 찾아가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노태군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네 사부다, 소천아.”
혈왕도 마주 손을 뻗으며 하얗게 웃었다.
“사부?”
“그래! 이제 정신이 드나보구나?”
노태군이 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떼었다.
바로 그때, 독고무령과 사령귀안, 백골마존의 기운이 뒤엉키며 강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콰과과광! 떠더덩!
사령귀안은 사이한 눈을 부릅뜬 채 뒤로 튕겨지고, 백골마존은 뼈라도 부러진 듯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채 힘겹게 땅에 내려섰다.
독고무령은 천뢰무적세로 두 사람을 튕겨내고는, 혈왕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노태군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뒤로 튕겨지는 게 보였다.
그렇잖아도 하얗던 얼굴이 분이라도 칠한 것처럼 창백하다. 방심하고 다가가다가 상당한 내상을 입은 듯했다.
그마저 노태군과 혈왕이 있는 곳으로 신형을 날리자, 대경한 적수천이 소리치며 노태군을 향해 달려갔다.
“아버님! 놈들을 막아!”
노태군과 귀천사사 중 두 사람이 밀리는 판국이었다.
자신이 나선다고 해서 혈왕과 정체불명의 적을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단숨에 십 장을 날아간 독고무령은 노태군에게 다가가는 장소천을 향해 태천일심의 기운을 쏟아냈다.
노태군을 공격하려던 혈왕은 상극의 기운이 밀려들자 홱 고개를 돌렸다.
그는 노태군을 놔두고는, 독고무령을 향해 혈왕잠천마공을 쏟아냈다.
콰르르릉!
태천일심과 혈왕잠천마공이 엉켜들며 혈왕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렸다.
독고무령은 혈왕과 부딪친 충격을 이용해 담장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일단은 혈왕을 이곳에서 유인해내야 했다.
“혈왕! 나와 싸우고 싶으면 따라와라!”
태천일심의 기운이 실린 목소리가 고막을 두드리자, 혈왕의 두 눈에서 혈광이 폭출했다.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죽여야 하는 적이었다. 그렇게 명령을 심은 소한조차도 따로 명을 내리지 않는 이상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자신과 상극의 기운을 지닌 자가 아닌가!
그는 지체 없이 독고무령을 따라 몸을 날렸다.
“너…… 죽인다.”
노태군의 앞을 가로막은 적수천은 뜻밖의 상황에 멈칫했다.
적이라 생각했던 자가 혈왕을 막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어떻든 상관없었다. 지금으로썬 새로 나타난 자가 누구든, 그가 혈왕을 유인해가는 것만으로도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에는 혈왕을 잡는 것보다 노태군의 상세를 살피는 게 중요했다.
그때 뒤늦게 도착한 헌원조가 침착하게 명을 내렸다.
“쫓아가지는 말고 경계를 철저히 하라!”
적수천은 지휘를 그에게 맡기고 노태군을 바라보았다.
“괜찮습니까, 아버님?”
노태군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대답했다. 혈왕의 공력이 약화된 상태였기에 치명적인 내상은 입지 않은 상태였다.
“끄응, 나는 괜찮다. 천아는?”
적수천이 안도하며 대답했다. 조금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자를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같은 편이 아니었나 봅니다.”
의아한 것은 노태군도 마찬가지 마음이었다.
“그놈이 누군지 아는 게 있느냐?”
“도통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적인 줄 알았는데, 혈왕을 막는 걸 보면 그도 아닌 것 같고…….”
바로 그때였다. 적수천의 귀에 독고무령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제왕성이 공격할지 모르니 즉시 전열을 정비하시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적수천의 뇌리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설마…… 암문의 그자……?’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정체가 아니었다.
그는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진 노태군을 향해 다급히 말했다.
“아버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제왕성이 이곳의 상황을 알고 있으면 절호의 기회라 생각할 것이니, 우선 전력부터 재정비해야겠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렇군. 천아 때문에 놈들을 잊고 있었어. 첫째와 너는 당장 그 일부터 서두르도록 해라!”
담장을 넘은 독고무령은 백여 장을 벗어난 뒤에야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혈왕이, 장소천이 사오 장 떨어진 곳에 내려서는 게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핏빛 광채가 확연한 눈빛이다. 반드시 죽여야 할 자를 보는 것마냥.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밤송이가 심장에 틀어박힌 것처럼 가슴이 저렸다.
“장소천이란 이름을 아는가?”
“후후후후, 몰…… 라.”
“장가장은? 장이생, 장유유는?”
장소천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던 혈광이 출렁였다.
하지만 그는 곧 나직이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난…… 아무도 몰라…….”
“무령은? 네 친구 무령은 아는가?”
장소천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머릿속에서는 눈에 띈 자를 모두 죽이라고 아우성이다. 그런데 또 다른 뭔가가 자꾸만 그의 행동을 방해한다.
짜증이 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독고무령을 죽여 버리고만 싶었다.
“몰라…… 모른단 말이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다니! 갈가리 찢어 죽이리라!”
장소천의 몸에서 핏빛 안개가 스멀거리며 흘러나왔다.
어둠을 밀어내며 밀려드는 핏빛 안개에는 절대의 거력이 담겨 있었다.
장소천의 정신을 몇 마디 말로 되돌릴 수 없다는 걸 독고무령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장소천의 입에서 죽이겠다는 말이 나오자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태천일심의 기운을 끌어올린 채 장소천의 공격을 기다렸다.
장서천은 태천일심의 기운을 대하자 분노가 더욱 강하게 솟구쳤다.
“죽어라!”
일갈을 내지른 장소천은 두 팔을 벌린 채 독고무령을 덮쳤다.
독고무령은 묵묵히 서서 그의 공격을 받아냈다.
콰르릉! 쩌저적! 콰광!
묵직한 굉음이 연속으로 울리며 어둠이 파도처럼 흔들렸다.
혈왕잠천마공이 제 위력을 발휘하기에는 공력이 현저히 감소된 상태.
독고무령은 장소천을 부상 입히지 않고 제압하려 했다.
장소천이 이성을 잃은 상태인 만큼 시간만 조금 끌면 충분히 기회가 나올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십여 초가 지나자 장소천의 움직임에 약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휘이이익!
어디선가 휘파람소리가 들렸다.
왠지 모르게 사이한 느낌이 드는 휘파람소리.
그것은 결코 자연적으로 발생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자다!’
독고무령은 휘파람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를 깨닫고 장소천을 제압하려 했다.
자칫 장소천이 휘파람소리를 따라가기라도 하면 지금까지의 고생이 물거품이 될 테니까.
그런데 휘파람소리가 들린 직후 장소천의 눈빛이 달라졌다.
“크아아아아!”
괴성을 내지르는 그의 몸에서 갑자기 강력한 기운이 폭발하듯이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