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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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3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17화
217화
독고무령은 철문이 완전히 열리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지하는 제법 깊었다. 계단을 따라 십오륙 장을 내려간 후에야 평평하게 뚫린 통로가 나왔다.
계단이 있는 곳은 물론이고 통로에도 오륙 장 간격으로 붉은빛을 내는 구슬이 박혀 있었다. 비록 약한 빛이었지만, 어둠조차 꿰뚫어보는 독고무령에게는 그것만으로도 대낮이나 다름없었다.
독고무령은 일직선으로 뻗은 통로를 지나 커다란 석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텅 비어 있는 석실 중앙에는 좌대가 하나 있고, 벽 쪽에는 제법 큰 향로가 깨진 채 무너져 있었다. 음악한 기운은 바로 그 깨진 향로가 있는 곳에서 흘러나왔다.
석실 안으로 들어간 독고무령은 깨진 향로로 다가갔다. 깨지지 않았다면 높이가 넉 자는 되었을 법한 커다란 향로였다.
몸을 숙인 그는 깨진 향로 사이에 흩어져 있는 붉은 물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말라붙은 핏덩이처럼 검붉은 물체, 혈왕분은 그의 손이 닿자 쉽게 부서지며 붉은 가루로 화했다.
그는 붉은 가루를 집어 들고 손가락으로 비벼보았다.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이한 기운이 손끝을 타고 기어오르는 것 같지 않은가!
그때였다. 태천일심의 기운이 저절로 움직이며 사이한 기운을 그의 손끝에서 몰아냈다.
혈왕분을 털어낸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엇으로 만든 것이기에 이런 기운이 느껴지는 것일까?
호기심이 생기는 한편으로 소름이 돋았다.
생명도 없는 가루에 이토록 사이한 기운을 담을 수 있다니. 어떤 자가 이런 사악한 가루를 만들어 냈단 말인가?
이걸 만든 자는 희대의 천재이거나, 아니면 세상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자 하는 아수라일 것이었다.
태천일심법으로 삼매진화를 일으킨 독고무령은 바닥에 흩어져 있는 혈왕분을 태워버렸다.
일순간 붉은 연기가 피어나는가 싶더니 음악한 기운이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음악한 기운은 회오리치며 휘돌더니 흔적도 남기지 않고 소멸되었다.
그때 문득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혹시 이 기운이 장소천을 혈왕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그럴지도 몰랐다. 자신의 손끝을 타고 기어오르던 사이한 기운을 오래 상대했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심성이 변하지 않을 수 없을 듯했다.
‘노태군, 그대에게는 자비가 필요 없을 것 같구나!’
독고무령은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석실을 나왔다. 그리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십여 장을 더 들어가자, 지하통로가 끝날 즈음에서 또 하나의 석실이 나타났다.
이전에 들어간 석실에는 일체의 가재도구가 없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집기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독고무령은 석실 안으로 들어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석실은 두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입구 쪽의 방은 식사를 하거나 잡무를 보는 곳이고, 안쪽의 방은 잠을 자는 곳인 듯했다.
방을 살펴보던 그는 한곳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음식을 담았던 것으로 보이는 빈 그릇이 구석의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릇 옆에 있는 두 벌의 젓가락.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한 듯하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서 그릇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릇에는 기름기가 묻어 있었는데,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음식의 향도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 식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혈왕만 있었던 게 아니었군. 누구지?’
의문이었다. 그 말인즉 혈왕의 움직임을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말. 결코 단순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 누가 있어 혈왕과 함께 움직이고 있단 말인가?
일순간 싸한 느낌이 들면서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노태군과 혈왕 사이에 제삼자가 있다. 그자로 인해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비밀스런 상황이 전개되는 중이다.
‘만일 혈왕의 느닷없는 잠적이 온전히 그로 인해서라면?’
독고무령은 그 생각을 하며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혈왕이 자의에 의해 잠적한 것이 아니라면, 노태군 외에 또 다른 누군가가 혈왕을 움직이고 있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그 말인즉, 그가 혈왕의 정신을 조종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말이다.
‘어떤 놈이든, 소천이를 그렇게 만든 놈은 내 손에 의해 지옥을 구경하게 될 것이다!’
독고무령은 석실을 나왔다.
그릇의 상태로 봐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추적한다면 꼬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가 갈 곳은 정해져 있으니까.
석실을 나온 독고무령은 들어왔던 곳으로 나가려다 멈칫했다.
혈왕과 제삼자는 자신이 들어온 곳을 통해서 출입했을까?
아닐 가능성이 컸다. 자신들의 행적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이 정도 지하시설이라면, 출입구가 또 있을지도.’
그는 지하통로를 더욱 세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밖으로 통하는 출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
출입구를 찾겠다고 시간을 더 끌 수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출입구가 아니니까.
그때였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독고무령은 석실의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침상과 다탁, 책이 가지런히 꽂힌 작은 서가가 집기의 전부였다.
서가를 보던 독고무령의 눈에서 기광이 반짝였다. 가지런히 꽂힌 책 중에 몇 권이 옆으로 누워 있었는데, 고리처럼 보이는 둥근 물체가 책 위로 반쯤 튀어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그곳으로 가서 책을 들어냈다. 그러자 세 치 크기의 둥근 물체가 완전히 모습을 보였다. 생각했던 대로 고리였다.
그는 고리를 잡아당겨 보았다.
그르르륵.
책장이 앞으로 당겨지며 시커먼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밀통로는 자연동굴을 다듬어서 만든 것이었는데, 낭아산의 서쪽 계곡으로 이어져 있었다.
출구를 막아 놓은 바위를 밀고 밖으로 나오자 한 줄기 강한 바람이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출구에서 계곡 아래까지는 십여 장 정도.
독고무령은 숨을 들이쉬고는 계곡 아래로 신형을 날렸다.
누군가의 추적이 두려워 행동을 조심할 혈왕이 아니다. 그가 산서로 들어가기만 하면 밀호방의 정보원들이 그의 움직임을 감지할 터. 은룡산장이나 제왕성보다 먼저 그를 만나야 했다.
* * *
시커먼 먹구름이 격류처럼 흐른다.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는 황금빛 반달로 인해 그 흐름이 더욱 빠르게 느껴진다.
위지성은 북동쪽으로 빠르게 흐르는 먹구름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분명 그였어. 왜 그때는 생각나지 않았는가 모르겠군.’
언젠가 제왕지처에 숨어든 자가 있었다. 그와 일수를 겨룬 후, 패배감을 느낀 그는 혼신을 다해 수련했다. 다시 만나면 반드시 이기겠다는 각오로.
그런데 마침내 그를 만났다. 비록 바로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암천사신, 그는 정말 죽었을까?’
암천사신 독고무령. 그에 대한 무수한 소문이 떠돌았지만, 자신은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자신과 큰 차이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도왕 영호진광이 그를 평가할 때만 해도 과대평가하는 거라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백천산에서 본 그는 가히 대호 중의 대호, 용 중의 용이었다.
검왕 등후양과 혈왕의 공격을 혼자 받아내며 수하들을 후퇴시키던 그 모습.
당시의 상황이 떠오르자 전율마저 느껴졌다.
과연 자신이라면 그자처럼 할 수 있었을까?
어림도 없는 일.
쓴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천하에 암천사신과 혈왕 같은 자들이 있을 줄이야.’
암천사신에 의해 이십여 명이 죽고, 혈왕에 의해 또 수십 명이 죽었다.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반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은룡산장 역시 비슷한 피해를 보긴 했지만, 그러한 것은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자신도 그 싸움에서 제법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아버지가 두 알밖에 남지 않은 제왕단을 한 알 복용시키고, 숙부들과 함께 혈맥을 타통시키지 않았다면, 아직도 내상으로 인해 고생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자괴감마저 든 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정녕 그를 넘어설 수는 없는 걸까?”
제왕단과 숙부들 덕분에 공력이 월등히 늘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두 사람을 상대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았다.
그때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왔다.
제왕밀위 여불소였다.
“소성주, 성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아버님이?”
“예, 간부들 모두에게 즉시 모이라는 명이 떨어졌습니다.”
위지성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이제 결정을 하신 건가?’
사실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호지세(騎虎之勢)라. 한 번만 더 몰아붙이면 노태군을 완전히 끝장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겠지만, 싸움이 길어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런데 모든 공격을 중지하고 대기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의문을 가슴에 눌러놓고 며칠을 기다렸다.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답답함을 참지 못한 그는 아버지를 만나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조용히 웃으며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했다.
적을 좀 더 완벽하게 무너뜨리기 위해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그런데…… 마침내 소집명령이 떨어졌다. 때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 * *
둥! 둥! 둥!
자시를 알리는 북소리가 자금성에 울려 퍼질 즈음, 그림자 하나가 야조보다 더 은밀하게 태자의 침실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반각이 지날 무렵.
태자인 주양이 침상 일 장 앞에 서있는 중년인을 노려보며 다그쳤다.
“그대가 감히 대명의 태자를 위협하겠다는 건가?”
중년인은 짙은 청의를 입고 있었는데, 마흔이 넘은 것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단아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의 인상과 달리, 눈빛만큼은 죽은 자의 눈을 박아놓은 것처럼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태자가 분노를 억누르는 것은 바로 그 눈빛 때문이었다.
중년인은 태자의 다그침에도 한 점 흔들림 없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천한 백성이 어찌 태자 저하를 위협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럼 무슨 뜻으로 한 말이더냐?”
“어차피 은룡산장의 노태군은 무너지게 되어 있사옵니다. 그러니 그들의 말을 들어줄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나 역시 그렇게 하고 싶다. 허나 비(妃)의 문제 때문에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만도 없음이니라.”
“그에 대한 것은 소인이 처리하겠습니다. 그 일에 대한 것은 아무도 모르게 될 것입니다.”
말투에서 확신에 가까운 자신감이 느껴진다.
태자는 뚫어지게 중년인을 노려보고는 어렵게 입술을 떼었다.
“정말…… 자신할 수 있느냐?”
“내일 아침까지 태자비마마의 주위에 있는 자들이 사라질 겁니다. 정 믿지 못하시겠다면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시지요.”
사라진다?
죽인다는 말이다. 태자비를 암중에 둘러싸고 있는 비밀호위들을. 황궁의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고수들을.
“그게 정말이렷다?”
“아침 해가 뜨면 새로운 날이 시작될 것입니다. 한번 믿어보시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으음, 좋다. 그럼 내일 해가 뜰 때까지만 기다리겠다. 만일, 그대의 말이 헛소리라면, 내 모든 힘을 다해서 그대와 그대의 뒤에 있는 사람에게 죄를 물을 것이니라!”
중년인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사옵니다.”
순간, 그의 몸이 흐릿하니 사라졌다.
‘헛!’
태자가 놀란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을 때는, 이미 앞에 있던 중년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태자는 자신과 마주앉아 있던 자가 귀신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어쩌면…… 정말 그의 말대로 될지도…….’
태자의 눈 깊은 곳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평소 나약하다는 평이 자자한 태자의 눈빛과는 전혀 동떨어진 눈빛이었다.
‘허나 누구든, 황궁을 능멸한 자는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나, 주양의 이름으로!’
그의 움켜쥔 주먹의 손가락이 손바닥을 파고들 것처럼 깊숙이 박혔다.
아무도 모르게, 세상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잔잔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