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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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16화
216화
두 사람 중 백의를 입은 자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는 종남파의 제자로, 삼성맹 십이당 중 백운당(白雲堂)을 맡고 있는 벽일검(闢一劍) 유청관이란 자였다.
“허허, 미안하네.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으니 이해해 주게.”
좌호정은 그렇게만 말하고 독고무령에게 물었다.
“어쩐 일인가?”
“금의위가 움직였다는 말을 듣고 정확한 상황을 알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함께 움직일 건가?”
“아닙니다. 저는 따로 할일이 있어서…….”
“흠, 아쉽군.”
그때였다. 중년무사 중 청의를 입은 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진무사와 천호장께서 잘 아는 사람이라니 강제하지는 않겠네. 대신 우리가 은룡산장을 괴멸시킬 때까지는 오늘 보고들은 것에 대해서 절대 함구해야 할 것이네.”
절친한 사이가 아니었다면 강제로 잡아두었을 거라는 뜻. 쳐다보는 눈빛에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이 다분하다.
저런 마음가짐으로 은룡산장을 상대할 수 있을까?
차라리 직접 공격을 가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독고무령은 무심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되오. 나 역시 은룡산장과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군.”
“한 가지만 말씀드리지요. 은룡산장을 절대 무시하지 마시오. 그들을 무시하면, 그만큼 동료들의 피가 많이 흐를 거요.”
청의 중년인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그는 화산파의 자랑인 매화칠검수 중 하나로, 삼성맹의 전위세력인 십이당 중 청무당(靑武堂)의 당주인 구절매검(九折梅劍) 능여곡이었다.
능여곡은 독고무령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듯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은룡산장을 잘 아나 보군.”
“아마 귀하보다는 많이 알 거요. 그들과 적지 않게 싸워봤으니까.”
“훗, 일천한 경험으로 나를 가르치겠다는 건가? 그대는 은룡산장을 대단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동창과의 관계만 정리되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개 강호세력일 뿐이야.”
“제왕성과 산서의 패권을 다투는 그들이 단순한 일개 강호세력이란 말이오?”
“흥! 제왕성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언제고 본맹의 위세를 보게 되면 그대도 생각이 달라질 거다.”
능여곡이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독고무령에게는 자만에 가득 찬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는 굳이 혈왕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 저들은 어차피 이해하려하지 않을 테니까. 믿지도 않을 것이고.
대신 사실 하나만 말해주었다.
“사대천왕이 제왕성의 이름 아래 모두 모였소. 그 정도면 삼성맹이라 해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소만?”
능여곡의 얼굴에 처음으로 경악이 떠올랐다.
“뭐야?”
사대천왕의 이름을 무시할 자, 당금 천하에 얼마나 되랴!
제아무리 능여곡이 화산파와 삼성맹의 위세를 믿는다 해도 그들의 이름에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사실인가?”
이번에는 유청관이 다그치듯이 물었다. 그는 본래 사리판단이 정확하기로 정평이 난 자였다.
하지만 그런 유청관조차 독고무령의 말에는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독고무령은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귀하들에게 거짓말을 할 아무런 이유가 없소.”
그러고는 고개를 돌렸다.
좌호정과 전무호 등 금의위의 간부들도 모두가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대천왕이 어떤 고수들인지는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내 말을 조금이라도 믿는다면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해지겠지.’
그러면 그만큼 피가 덜 흐를 것이다. 그거면 만족했다.
“저는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나중에 뵙지요.”
“조심하도록 하게.”
“나중에 보세.”
“그럼, 이만.”
좌호정과 전무호를 향해 포권을 취한 독고무령은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잠깐 기다려라!”
능여곡이 훌쩍 몸을 날리더니 독고무령의 앞을 가로막았다.
독고무령이 멈추자 그가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진무사께 실례가 되더라도 그대가 누군지 알아야겠다. 이름을 밝혀라!”
“싫소.”
“이런 건방진!”
능여곡은 강제로라도 알아보겠다는 듯 독고무령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순간 다섯 송이의 매화가 허공에서 피어났다. 화산파의 절기인 매화산수(梅花散手)였다.
독고무령은 능여곡의 손이 코앞까지 다가오도록 가만히 놔둔 채, 능여곡의 눈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섯 송이 매화가 하나로 합쳐지며 가슴으로 떨어지자, 그제야 손을 쳐들었다.
퍽!
가죽부대가 터지듯 둔탁한 소리가 허공을 두들겼다.
동시에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느낄 새도 없이, 능여곡의 몸뚱이가 뒤로 날아갔다.
털썩!
삼 장을 날아가 바닥에 떨어진 능여곡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독고무령은 몸을 일으키는 능여곡 옆을 무심한 표정으로 스쳐 지나갔다.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었다.
“한 번뿐이오. 다음에는 목을 걸어야 할 거요.”
능여곡은 독고무령이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데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부상 때문이 아니었다. 몸은 괴이할 정도로 아무런 이상도 없이 멀쩡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무거운 기세!
온몸이 침몰하는 땅속으로 빠져드는 기분!
만근 무게의 철주가 그의 가슴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능 형! 괜찮소?”
유청관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물었다.
하지만 능여곡은 귀머거리라도 된 사람마냥 멍청히 서서 독고무령의 등만 바라보았다.
‘너는 누구냐!’
독고무령이 시뻘건 석양 속으로 사라지면서 어스름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마치 독고무령이 어둠의 장막을 끌어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 * *
낭아산 자락을 드넓게 차지한 거대한 장원이 전보다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이미 칠팔 할에 이르는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여서 그런지 오가는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독고무령은 끈적끈적한 습기가 느껴지는 바람에 몸을 싣고 담을 날아 넘었다.
먹구름으로 뒤덮여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
그의 움직임은 유령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은밀했다.
단숨에 서너 개의 전각을 지나친 그는, 은룡산장의 뒤쪽으로 향했다.
전에 모용설과 함께 왔을 때 느꼈던, 음악(淫惡)한 기운이 잠자고 있는 곳을 찾아서.
그가 그곳을 찾아가는 이유는 단 하나, 산서에서 사라진 혈왕이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헛걸음일지도 몰랐다. 오지 깊숙이 잠적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독고무령은 설령 그가 이곳에 없다 해도 오지로 숨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가 본 혈왕은 상대가 두려워 도망칠 자가 아니다.
도망쳐야 할 이유가 없는 자에게는 숨을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문제는 그것이었다.
제왕성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던 상황.
노태군의 명대로 움직이던 그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은 분명 기이한 일이었다.
독고무령은 태천일심의 기운을 흘려보내 주위 상황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혈왕의 존재여부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적과 마주치지 않아야 했다.
또한 금의위와 도찰원이 접근하면 모두가 깨어나 비상이 걸릴 터. 그리 되면 또 어디론가 사라질지 모르니 그 전에 혈왕을 찾아내야 했다. 그가 있다면 말이다.
그렇게 전각 몇 개를 더 돌아가자 후원으로 통하는 월동문이 나왔다.
야조의 그림자마냥 담장을 넘어간 독고무령은, 정원의 나무 사이에 내려서서 몸을 숨기고 일대를 살펴보았다.
후원의 모습은 본장과 조금 달랐다.
어둠속에서 누군가가 뒷덜미를 잡아챌 것만 같은 괴괴한 분위기. 심장이 약한 사람 같으면 한발자국도 안으로 들여놓지 못할 만큼 사이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자신이 서 있는 정원의 건너편에는 커다란 이층 건물이 서 있었는데, 사람이 살지 않는 것마냥 불빛 한 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 건물 사이사이에는 적지 않은 사람이 은잠해 있었다.
‘밖에 아홉…… 안에 넷. 모두 열셋이군.’
모두가 숨소리조차 숨기고 맥박의 박동까지 감출 수 있을 정도로 은잠술에 뛰어난 자들이었다.
특히 안쪽에 있는 네 사람은 단순히 은잠술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무공 역시 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였다.
독고무령은 그들이 전부라는 확신이 든 후에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숨에 십오륙 장을 날아간 그는 머리카락 휘날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건물의 이층 지붕 위에 내려섰다.
은잠해 있는 무사들은 대부분이 건물의 일층과 이층 처마 밑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독고무령의 움직임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들의 머리 위에 도착한 독고무령은 두 손을 지붕에 대고 태천일심의 기운을 아래쪽으로 흘려보냈다.
승천만화는 물론이고 무심천지연마저 완성 직전에 도달한 그였다. 지붕이라는 존재는 그에게 방해물이 되지 못했다.
스으으으.
태천일심의 기운이 건물을 타고 내려가더니, 은잠하고 있는 자의 심맥을 터트려 버렸다.
산을 사이에 두고 적을 친다는 격산타우(隔山打牛)와 방식은 비슷했다. 하지만 그보다 족히 두어 수는 높은 극상승의 수법이었다.
잠깐 사이, 한쪽 방위를 지키고 있던 무사 셋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숨이 끊어졌다.
위치를 옮긴 독고무령은 다른 곳에 숨어 있는 자들도 같은 방식으로 제거했다. 그러고는 진기로 소리와 바람을 완벽히 차단한 채, 북쪽 이층 창문을 통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은 이층이었지만, 이층과 일층이 터져 있는 구조였다. 어둠만이 존재하는 건물 내부는 너무나 조용해서 묘역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독고무령은 그 묘역처럼 고요한 건물 안에 몇 사람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신형을 날린 그는 건물 내부의 중앙에 내려섰다.
칠흑처럼 어두운 곳에 갑자기 사람 하나가 환영처럼 나타난 격. 은잠해 있던 자들도 바로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한동안 움직임이 없었다.
독고무령은 발자국 소리를 내며 의도적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저벅, 저벅.
그때였다.
어둠으로 물든 천장에서 네 줄기 그림자가 소리 없이 날아들었다.
독고무령은 검을 잡은 채 그들이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그대로 놔두었다.
그들과의 거리가 이 장 이내로 줄어든 순간, 독고무령의 검이 검집을 빠져나왔다.
찰나!
폭죽이 터지듯 수십 줄기 벼락이 어둠을 꿰뚫었다.
벽력음이 나지 않았다 뿐이지 그것은 분명 천뢰만영이었다.
승천만화의 운용을 따라 펼쳐진 천뢰만영. 그것도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 작심하고 구성의 내력으로 펼친 터다.
단 일 검, 비밀위사들의 몸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대항하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고, 소리를 질러서 외부에 알릴 시간도 없었다.
더구나 독고무령이 이 장 이내를 태천일심의 기운으로 완전히 감싸고 있었기에, 그들이 바닥에 널브러지는 소리마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털썩, 털썩. 땡그랑…….
독고무령은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더 이상의 매복자는 없었다.
저벅, 저벅…….
그의 발걸음 소리가 다시 건물 내부를 울렸다.
음악한 기운이 흘러나온 곳, 혈왕동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걸음은 머뭇거림이 없었다.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될 것 아닌가!
십여 걸음을 걸은 독고무령은 붉은 벽 앞에 멈춰 섰다.
음악한 기운은 그 벽의 뒤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벽의 뒤쪽에 또 다른 공간이 있다는 뜻.
그는 손을 뻗어 붉은 벽을 만져보았다. 차가운 느낌이 손끝에 느껴졌다.
‘쇠로 된 벽에 색을 칠한 거였군.’
그곳에는 각각 석 자 크기로 ‘마혈(魔血)’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고, 글자 사이에는 둥근 점이 하나 찍혀 있었다.
독고무령은 벽을 만지던 손에 태천일심의 기운을 응집시키고 천천히 밀어보았다.
우르릉.
철벽이 당장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하지만 뒤로 밀려나지도, 무너지지도 않았다.
그는 내력을 조금 더 쏟아 넣으며, 안쪽에서의 반응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철벽의 진동을 자신의 진기로 감쌌다 해도 혈왕의 감각을 속일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느껴지지 않았다.
‘안에 아무도 없나?’
그때였다.
‘마혈’이라는 글자 사이의 점이 툭 튀어나왔다. 주먹 두 개를 합친 것만 한 크기의 점. 한데 그 안쪽에 둥근 고리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괜히 힘만 뺐군.’
그는 고리를 잡고 잡아당겨 보았다.
끼이이이…….
철문이 열리면서 붉은빛이 문틈 사이로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