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13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7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13화
213화
일순간, 팽팽한 긴장감에 장내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두 사람이 공력을 끌어올리며 상대의 허점이 보이기만을 기다릴 때였다.
“그만 멈추게.”
북리중현이 두 사람을 제지했다.
더 싸워봐야 상관연이 쉽게 승리하지 못할 것임을 알아본 것이다.
천룡방의 장로가 암천회의 일개 기주를 이기지 못한다면, 그 자체로 망신이 아닐 수 없었다.
상관연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북리중현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린놈, 재수가 좋은 줄 알아라.”
관조운은 말없이 조용히 웃기만 했다.
천룡방의 팔대장로 중 한 사람과 비등한 접전을 펼쳤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할 일은 다한 셈이었다.
일개 간부가 장로와 비등한 접전을 벌인 것은 결코 단순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몇 수 접전만으로 암천회가 만만한 곳이 아니란 걸 알린 거와 같았다.
별다른 말썽도 없이 상대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리지도 않고. 아주 확실하게!
물론 상관연이야 기분이 좀 나쁘겠지만.
한편, 독고무령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름 만족했다.
‘다행히 제대로 처리했군.’
사실 평소와 다른 관조운의 행동은 모두 자신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물론 자신이 직접 나섰다면 더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때로는, 일인자가 나서서 처리하는 것보다 아랫사람이 나서서 상대의 기를 꺾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어.’
독고무령의 깊어진 눈이 북리중현을 향했다.
그때 북리중현이 관조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단하군. 젊은 나이에 그토록 강한 무공을 익혔다니 말이야.”
“별 말씀을. 본회의 젊은 친구들 중에는 저보다 강한 사람이 많습니다. 당장 객방에 있는 친구들 두엇만 해도 저보다 강하지요.”
북리중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더 강한 놈이 객방에 있다고? 그럼 왜 그자가 오지 않고 관조운이 왔단 말인가? 허세를 떠는 건가?
몇 가지 생각이 빠르게 스쳐갔다.
그러함에도 북리중현은 관조운에게 화를 내지 못했다.
아들의 일에 대해 혈왕의 핑계를 댔다 하나, 그것이 억지에 불과하다는 걸 그가 왜 모를까?
말이 길어지면 그 이야기가 또 나올지도 모르는 일. 그는 스멀거리며 피어나는 분노를 가슴 한쪽으로 구겨 넣었다. 그리고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은 채 관조운에게 말했다.
“그래, 이제 할 말은 다 했는가? 나로선 설명할 만큼 한 것 같네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뿐이지, 축객령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불만을 털어놨으면 이제 그만 가라. 그 정도 들어준 것도 성의를 다한 것이다.
그런 뜻이었다.
관조운이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본론은 꺼내지도 못했습니다.”
“본론이라……. 어디 말해보게. 무슨 일로 온 건가?”
관조운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독고무령을 쳐다보았다. 그 일은 자신의 관할이 아니니 저 사람과 이야기해 보라는 듯이.
독고무령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왕성과 은룡산장의 싸움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은 방주께서도 아시고 계실 거라 봅니다.”
마침내 자신의 신경을 건드린 자가 나섰다.
이름도 밝히지 않고 곧바로 본론을 들이대는 데도 워낙 자연스러워서 기분 나쁜 생각이 들 틈도 없었다.
북리중현은 독고무령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도 귀가 있고 눈이 있다네. 그 정도는 알고 있지.”
“그럼, 지금이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도 아시겠군요.”
“그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네.”
“아신다니 잘 됐군요.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이 기회에 저희와 함께 저들을 무너뜨리지 않겠습니까?”
‘저들’이라 했다. 은룡산장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북리중현은 은근히 가슴에 열기가 일었다.
제왕성마저 무너뜨릴 수 있다면 산서까지 넘볼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우리라 해서 왜 그러고 싶지 않겠나?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네.”
“군(軍)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북리중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군 문제까지 알고 있다면, 굳이 말을 돌릴 것도 없었다.
“그렇다네. 강호의 문파라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지만, 군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나?”
“만일 군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순간 북리중현의 눈에서 기광이 일렁였다.
“그들만 우리 앞을 막지 않는다면야 문제될 것이 없지.”
“그렇다면 더 이야기할 것도 없군요. 앞으로 군은 노태군의 명을 듣지 않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게 정말인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천룡방 근처의 군을 본연의 자리로 돌려보내도록 하지요.”
북리중현은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독고무령을 노려보았다.
“자네들에게 그럴 재주가 있단 말인가?”
“어차피 지나보면 알 일. 거짓이라면 군이 움직이지 않을 테니 헛소리로 치부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북리중현의 눈빛에서 서서히 열기가 떠올랐다.
“사실을 확인하고 움직여도 늦지 않다?”
“다만 그때는, 더 많은 걸 내놓으셔야 할 겁니다.”
“은룡산장을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야…….”
물론 제왕성까지 무너뜨릴 수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일을 위해서라면 천룡방의 전력을 다 끌어낼 수도 있다.
북리중현은 어깨를 펴고 독고무령을 직시했다. 그리고 그동안 참았던 질문을 했다.
“이제 말해 보게. 자넨 누군가?”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순간이었다. 북리중현의 눈썹이 미미하게 떨리며 입술 끝이 살짝 일그러졌다.
경악을 억지로 가라앉히는 것이 역력한 표정.
주위에 서 있던 천룡방의 장로와 간부들은 의아한 얼굴로 북리중현을 바라보았다.
북리중현이 입을 연 것은 그들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기 직전이었다.
“으음, 그렇게 하지.”
밑도 끝도 없는 말. 뭘 그렇게 하겠다는 걸까?
궁금함을 도저히 못 참겠는지, 장로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척구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주, 대체 무슨 일이신데……?”
북리중현은 괴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때가 되면 알게 될 테니, 조금만 참게나.”
그 바람에 천룡방의 사람들은 더 궁금했다.
전음으로 이야기를 나눈 듯했다. 대체 무슨 말이 오갔는데 방주가 저런 표정이란 말인가?
그러나 북리중현은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독고무령이 펼친 것은 일반적인 전음술이 아니었다. 심어전령(心語傳靈)이라 하는 극상승의 전음술이었다.
천하에서 그러한 전음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신이 아는 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그 말인즉 암천사신의 무위가 소문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는 뜻. 자신 역시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어쩐지 위지천백이 암천회를 쓸어버리기 위해서 은룡산장과 손발을 맞춘다 했더니, 이유가 있었군. 제왕성 단독으로 처리하려했다면 결정적인 손실을 입었겠어.’
하긴 혈왕과 천궁신검 등후양의 합공을 받으면서도 암천회가 빠져나갈 공간까지 만들어주었다고 들었다.
자신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은근히 가슴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호승심이 고개를 삐죽 내민다.
십여 년 전, 천중검존 운철악과 대면한 이후 처음 느끼는 감정.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져서 생소함마저 들 지경이다. 그래서 다스리기가 더 힘들다.
북리중현은 독고무령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시험해 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스으으으…….
그의 전신에서 무형의 기운이 실타래에서 풀려나오는 실처럼 흘러나왔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조차 느낄 수 없는 상승의 무형지기였다.
“그래, 바로 떠날 건가?”
그가 입을 엶과 동시였다.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는 무형지기가 독고무령을 향해 해일처럼 밀려갔다.
그때였다. 독고무령이 두 손을 올리며 포권을 취했다.
“다음에 뵐 때는 좀 더 좋은 얼굴로 뵙기를.”
순간, 북리중현의 얼굴 근육이 미미하게 떨렸다.
손가락이 호피를 파고 들어가서 태사의 손잡이에 깊숙이 박혔다.
‘제길, 그건 뭐였지?’
자신이 발출한 무형지기가 벽에 부딪치며 흩어지는가 싶더니, 상대의 포권한 두 손이 환영처럼 코앞에 나타났다.
마치 만근 무게의 쇠망치가 갑자기 날아드는 것처럼!
만약 상대의 두 손이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왔다면, 박차고 일어나서 대항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마주잡은 손은 나타남과 동시 곧바로 사라졌고, 그는 공연한 소란을 떨지 않아도 되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상대는 인사를 하는데 혼자 난리치는 꼴이 되었을 것 아닌가 말이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군.”
태연하게 대답하는 북리중현의 눈빛에서 자잘한 파문이 일었다.
‘설마, 본좌가 밀린 건 아니겠지?’
실제 밀린 것은 없었다. 그저 자신의 무형지기가 막히고, 눈앞에 일시적인 환영이 나타났을 뿐.
그런데도 기분이 찝찝했다. 생선가시가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그는 목에 걸린 가시를 당장 뽑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때가 안 좋았다.
떠나려는 사람을 붙잡고 싸우자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대 천룡방의 방주인 자신이 먼저 칼을 빼드는 것도 보기가 좋지 않았고.
‘정식으로 겨루면 팔다리 하나쯤 부러뜨릴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왠지 낯이 뜨거워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길 자신이 없었다.
‘젠장!’
독고무령과 관조운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만근 압력이 깃든 뜨거운 시선이 등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그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적초를 따라서 전각을 나섰다.
북리중현은 세 사람이 나간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사이 장로들과 간부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표정이 워낙 심각하다 보니 아무도 먼저 말을 걸지 못하고 눈치만 봤다.
입을 먼저 연 것은 결국 북리중현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암천회와 손을 잡을 경우 은룡산장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보는가?”
척구등이 대답했다.
“군만 움직이지 않는다면 충분합니다.”
“역시 군이 문젠가?”
상관연이 한마디 거들었다.
“제왕성에 호되게 당한 상태로는 절대 저희의 적수가 될 수 없지요.”
“그건 그렇지. 그런데…… 상관 장로, 그의 실력이 어떻던가?”
상관연의 입가로 차디 찬 조소가 스쳤다.
“어린놈이 제법이더군요. 하마터면 정말로 살수를 쓸 뻔했습니다.”
겉으로는 분노해서 손을 쓴 것 같지만, 사실은 냉철한 계산이 깔린 도발이었다. 북리중현과 미리 이야기가 된 일이기도 했고.
“어쨌든 암천회의 힘이 짐작했던 것보다 강한 것만은 분명 한 것 같습니다, 방주.”
“흐음, 내 생각도 상관 장로와 비슷하네.”
북리중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태사의의 손잡이를 툭툭 쳤다.
그때 구멍 난 호피 속으로 손가락이 쑥 들어갔다.
손가락 끝이 구멍 안에서 잘게 떨렸다.
‘빌어먹을. 굳이 다른 놈들은 생각할 것도 없다. 그놈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니까. 암천사신 독고무령.’
북리중현은 자신의 내심을 감추기 위해서 짐짓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군의 움직임이 확인되면, 우리도 움직인다. 시시각각 돌아가는 상황에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말도록.”
“예, 방주!”
천룡전을 나선 독고무령과 관조운은 적초를 따라 영빈각으로 갔다.
영빈각이 가까워지자 일련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오가는 것 같던 무사들이 힐끔거리며 일정한 방향으로 흩어지는 것이다.
만약의 일을 대비해 무사들을 배치했던 듯했다.
‘천룡전에서 싸움이 벌어졌다면 영빈각 안에 있는 암천회의 사람들을 잡으려 했겠지.’
독고무령은 냉소를 지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일은 잘 끝났습니까?”
석도명이 다가오며 물었다.
“다행히 별 마찰 없이 끝났소. 이곳은 별일 없었소?”
“저들이 이곳을 에워싸긴 했습니다만, 직접적인 시비는 걸지 않아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진사혁은 그것이 불만인 듯 퉁퉁 부은 표정이었다.
“제길, 그놈들이 시비라도 걸었으면 좋았을 텐데. 한바탕 확, 휘저어버리게.”
솔직히 그는 천룡방과 손을 잡는다는 것이 싫었다. 한번 배신한 자들이 아닌가 말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없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났고, 동료들이 죽어 가는데도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 아파서 더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독고무령이 왜 그의 마음을 모를까.
“북리사웅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장만익 같은 사람도 있네. 보기 싫은 한 사람 때문에 전체를 적으로 돌릴 것 같으면 우리 편은 아무도 없을 거네.”
“그거야 나도 알지. 그래도 그놈 생각만 하면 화가 나. 빌어먹을 자식!”
독고무령이 조용히 웃으며 진사혁의 팔뚝을 쳤다.
“그럴수록 더 이용해 먹으면 될 것 아닌가?”
“그건 그런데…….”
진사혁이 얼버무리며 씩 웃었다.
“좋아. 회주 말대로 철저히 이용하지 뭐. 자식들이 순한 양을 독하게 만든단 말이야.”
그 말에 사람들이 진사혁을 바라보았다.
눈에 껍질이 두어 겹 씌웠다면 몰라도, 어디를 봐서 저게 순한 양이란 말인가?
모용설이 그들의 마음을 대변해주었다.
“양이 아니라 곰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