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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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0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12화
212화
북리중현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산서 어디서 왔다더냐?”
적초가 고개를 살짝 들며 대답했다.
“암천회에서 왔다 합니다.”
순간, 북리중현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철수에 대해서 항의하기 위해 온 건가? 아니면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그도 아니면…….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이 떠오르며 정리되었다.
“지금 어디 있느냐?”
“영빈각에 있습니다.”
“가서 그들의 대표를 두어 명만 데려와라. 내 직접 만나보겠다.”
“예, 방주!”
* * *
천룡방은 한단 서북쪽의 평지나 다름없는 광활한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다.
이삼 층의 건물이 숲을 이루고, 담장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원. 가히 제왕성이나 은룡산장에 못지않은 위용을 자랑하는 크기였다.
독고무령 일행이 천룡방의 정문 앞에 도착한 것은 개봉을 떠난 다음 날 사시 무렵이었다.
정문위사에게 다가간 독고무령은 자신들이 온 목적을 간단하게 밝혔다.
산서의 암천회에서 왔다는 것과, 방주를 만나러 왔다는 걸.
정문위사는 거드름을 피울 여유도 없었다.
그가 상관에게 달려간 지 반각이 지날 즈음, 용소당의 당주인 적초가 굳은 표정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일각이 지난 지금은, 용소당의 영빈각에 머물며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거만을 떨지는 않는군.”
독고무령은 진사혁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때로는 성내는 자보다 겉으로 웃는 자를 더 조심해야 할 때가 있지. 이들은 결코 우리가 반가워서 예의를 차린 것이 아니네.”
“응? 그래?”
“적이 습격하는데 비밀리에 철수한 자들이네. 동쪽은 걱정 말라고 하면서 말이야.”
이러쿵저러쿵 할 것도 없었다. 그 말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묵묵히 앉아 있던 사람들은 독고무령의 말에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천룡방만 아니었어도 도망치듯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나면 피해가 나더라도 승리하려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차후에 더 많은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던가.
훗날의 평화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적을 물리치는 것.
그것이야말로 전쟁에 나선 무사가 지켜야 할 도리(道理)며 대의(大義)다.
그런데 북리사웅은 도리를 저버렸다. 신의는 말할 것도 없었고.
하기에 그가 혈왕에게 당해서 처참한 꼴로 돌아갔다는 걸 알았지만, 누구도 그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도 장만익이 수하들과 함께 되돌아오지 않았다면, 대놓고 욕하기를 서슴지 않았을 것이었다.
“천룡방도 안 됐군, 대를 이을 후계자가 팔이 잘렸으니 말이야.”
진사혁이 천룡방을 염려하는 것마냥 한소리 했다.
하지만 진정이라기보다는 비꼼이 역력한 말이었다.
사람들은 한마디씩 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조소만 지었다. 이곳은 천룡방의 내지. 사방에 저들의 귀가 있었다. 말 몇 마디로 마찰이 일면, 자칫 북리중현을 만나지도 못하고 쫓기듯이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들의 방으로 다가왔다. 곧 헛기침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방문이 열렸다. 용소당주 적초였다.
“대표로 두 사람만 나서시오. 방주님께서 뵙고자 하시오.”
독고무령과 관조운이 적초를 따라 천룡전으로 향했다. 실력으로 따지면 진사혁이 가야 했지만, 그는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일행과 함께 남겨둔 상태였다.
대여섯 개의 커다란 건물을 지나고, 드넓은 연무장과 오밀조밀하게 꾸며진 정원을 가로지르자, 사 층으로 된 거대한 전각이 눈에 들어왔다.
그 건물이 바로 하북제일세 천룡방의 모든 대소사가 집행되는 천룡전이었다.
독고무령과 관조운은 적초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전각은 천장이 이 층까지 트여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웅장한 느낌을 들게 했다.
건너편까지 이십 장. 양쪽에는 아름드리 기둥이 일렬로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장수들이 늘어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끝에는, 오십 대 중후반의 초로인이 호피가 깔린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떡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가슴에서 강인함이 느껴졌다.
게다가 묵직한 표정은 사소한 일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거목을 보는 듯했다.
천하팔패 중 하나인 천룡방의 주인이자, 오존 중 사람인 천룡무존(天龍武尊) 북리중현, 바로 그였다.
그런데 전각 안에는 북리중현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오십 대의 중년인 다섯과 족히 육십은 넘어 보이는 노인 둘이 그의 옆에 서 있다.
그들은 독고무령과 관조운이 들어서자, 눈빛을 번뜩이며 탐색하듯이 살펴보았다.
칼날처럼 예리한 눈빛. 비릿한 조소.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
두 사람의 온몸을 샅샅이 해부할 것처럼 살피는 일곱 사람의 표정은 각양각색이었다.
독고무령과 관조운은 그들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태사의에 앉아 있는 북리중현을 향해 걸어갔다.
두 사람에 앞서 북리중현의 이 장 앞까지 다가간 적초가 허리를 숙였다.
“방주! 암천회의 사람들을 데려왔습니다!”
독고무령과 관조운은 걸음을 멈추고 북리중현의 반응을 기다렸다.
북리중현이 태사의에 앉은 채 손을 저으며 말했다.
“수고했다. 물러나 있도록.”
“예, 방주!”
북리중현은 적초가 한쪽으로 비켜서자, 독고무령과 관조운을 쳐다보았다.
“나를 만나러 왔다고?”
관조운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취했다.
“암천회 무천단의 관조운이 방주를 뵙습니다.”
북리중현은 관조운을 보는 척하며, 관조운의 한 발 뒤에 묵묵히 서 있는 독고무령을 슬쩍 쳐다보았다.
왠지 모를 싸늘한 느낌이 뒷골을 당겼다.
‘누군지 몰라도 제법이군.’
어차피 조금 있으면 알게 될 일.
그는 관조운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관조운이 일원궁주의 아들이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무천련에서 만든 무천단의 단주와 기주 정도는 천룡방도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의외였다. 일원궁이 은룡산장에게 형편없이 당해서 크게 생각하지 않았거늘, 생각보다 강하게 보인다.
북리사웅이 부상을 입지 않았다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
한편으로는 그런 관조운의 지위가 높지 않다는 것이 또한 뜻밖이었다. 암천회의 무력이 자신의 예상보다 더 강하다는 뜻이 아닌가?
하지만 그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암천회가 아무리 힘을 키웠다 해도 어찌 천룡방에 비할 수 있으랴.
“흠, 부친의 부상이 심하다 들었네. 쾌유를 바란다, 전해주게나.”
“감사합니다, 방주.”
“그래,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건가? 단순히 지나가던 길은 아닐 테고…….”
관조운은 북리중현을 직시하고서, 독고무령이 지시한 대로 상대의 신경을 건드리는 질문을 했다.
“저번 백천산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지요?”
“물론이네.”
“그렇다면 천룡방의 무사들이 갑자기 철수한 일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알고 있네. 철수명령을 내린 사람이 바로 나니까.”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방주님의 명령은 훨씬 전에 내려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맞는지요?”
“바로 철수하기가 미안했던가 보더군. 해서 미적거렸던 거 같네.”
“설령 그렇다 해도 그렇지, 처음부터 철수하겠다고 말이라도 했으면 미리 대처라도 했을 것 아닙니까?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리에 동쪽을 맡겠다고 해놓고 말없이 철수하다니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리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관조운이 계속 밀어붙이자, 북리중현의 눈 깊은 곳에서 노기가 일렁였다.
“그 점에 대해선 당장 뭐라 말하기가 그렇군. 당시 사웅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겠지.”
“아무리 사정이 있어도 그렇지, 방어막의 한축을 맡은 사람들이 말없이 사라지면 남은 사람은 어떡하라는 말인지요? 그 일로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수십 명이 그곳에 뼈를 묻었습니다. 방주께서는 당시 북리 공자의 행동이 옳았다고 보시는지요?”
말투와 표정은 공손하지만, 뜻 자체는 추궁에 가깝다.
갑자기 장내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언제 천룡방이 남들에게 추궁당한 적이 있던가?
중소문파의 주인들조차 방주 앞에 서면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한다.
하물며 일개 문파의 수하 따위가 감히 하늘같은 방주에게 잘잘못을 묻다니!
천룡방의 팔대 장로 중 한 사람인 경천일수(驚天一手) 상관연이 인상을 쓰며 다그쳤다.
“어허! 건방지구나! 지금 감히 방주님을 추궁하겠다는 겐가?”
관조운은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저 사실을 말씀드리려 했을 뿐이지요. 기분이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병 주고 약 주는 말이라는 걸 상관연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있을까?
그는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는 관조운을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때 북리중현이 말했다.
“당시 본방의 무사들은 동쪽에서 혈왕과 싸웠다네. 그러니 무작정 철수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본방의 무사들이 그를 막지 않았다면, 암천회는 더 많은 피해를 봤을 텐데 말이야.”
그리고 자네들을 도와주러 갔다가 내 아들은 팔 병신이 되었지.
그는 그 말이 목구멍까지 나온 걸 꾹 참았다. 그 말을 하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관조운은 다문 입에 힘을 주고 있는 북리중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요. 더구나 장 장로께서 수하들과 함께 돌아왔고 말입니다. 해서 저희 역시 그 일에 대해선 더 이상 따지지 않을 생각입니다.”
곁에 서 있던 천룡방의 장로와 간부들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그럼 그 일이 없었다면, 끝까지 따질 생각이었단 말인가? 신생세력인 암천회의 일개 간부가 대 천룡방의 방주에게?
그들이 듣기에는 참으로 건방진 뜻이 담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상관연이 코웃음 치며 다시 한소리 했다.
“흥! 말재주는 제법이다만,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걸 알아라. 설마 암천회 따위를 본방과 동격으로 보고 그런 건방진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
관조운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따위라……. 말씀이 조금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내 말이 지나치다? 훗, 암천회에 대해 자부심이 강한 것 같군.”
“노선배님께서 천룡방에 대해 느끼는 자부심만큼, 저 역시 암천회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요.”
여전히 담담한 말투. 웃음마저 띤 표정이다.
상관연은 은근히 뒷골이 당겼다. 대들면 그걸 빌미로 혼쭐을 내주려 했는데, 웃으면서 대응하니 속으로 화만 끓었다.
“너의 자부심과 나의 자부심 크기가 똑같다고 생각하는 거냐?”
“사람마다 마음이 다른데 어찌 그 크기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제 말은 단지 느끼고 있는 감정이 비슷하다는 거지요.”
‘기름통에 빠진 미꾸라지 같은 놈!’
상관연은 관조운을 노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하룻강아지 같은 어린놈에게 호랑이의 무서움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유가 마땅치 않았다.
바로 그때, 요리조리 빠져나가던 관조운이 그에게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암천회 따위’라 하셨는데, 적어도 암천회에선 동료를 놔두고 도망치는 짓을 하지는 않습니다. 귀방의 사람들이야 명령이 우선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뭐라! 네가 감히 본방을 모욕하겠다는 거냐?”
“있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왜 그게 모욕이 된단 말입니까? 혹시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신 거 아니십니까?”
“네놈이 그래도!”
더 말이 길어지면 또다시 손아귀에서 빠져나갈지 모른다.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대뜸 소리친 상관연은 관조운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가 가득한 눈으로 상관연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태사의에 앉은 북리중현도, 관조운의 뒤에 서 있는 독고무령도.
단걸음에 이 장을 좁힌 상관연의 입가로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이놈! 내 너에게 세상 무서움을 알려주마!’
관조운의 코앞까지 다가간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두 손을 뻗었다.
관조운도 그가 손을 쓸 거라 예상하고 있던 터였다. 화를 내라고 그렇게 말했으니까. 독고무령의 전음대로.
그는 상관연의 두 손이 뻗어오자, 미리 공력을 응집해 놓은 손을 뻗어 상관연의 공세를 막았다.
퍼벅! 쾅!
두어 번의 거센 격돌음이 울리고, 두 사람이 각기 세 걸음씩 물러났다.
엇비슷한 결과.
사람들은 그 결과에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원궁주의 자식인 만큼 쉽게 패하지는 않을 거라 여겼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설마하니 상관연과 동수를 이룰 정도일 줄이야!
하지만 동수라는 자체가 오히려 상관연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저 따위 어린놈에게 뒤로 밀리다니!’
그는 두 눈을 역팔자로 치켜뜨고 공력을 끌어올렸다.
관조운도 왼손 엄지로 검을 밀어 올리며 검병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