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4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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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1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48화
248화
사실 그가 두려운 것은 적이 아니었다.
정보의 책임자로서 적의 움직임을 알지 못했다, 그로인해 적이 코앞까지 왔다.
그 사실이 두려웠다.
위지천백은 치명적인 실수를 용납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위지천백은 능효의 보고를 받고 바윗덩이처럼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독고무령이 직접 왔느냐?”
“지금 확인 중에 있사옵니다.”
“놈들의 숫자가 일천이라 했느냐?”
“현재까지 밝혀진 숫자는 그 정도이옵니다만, 속하의 생각으로는 더 될 거라 보고 있사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최대한 빨리, 자세한 사항을 알아보도록 해라. 너의 죄는 차후에 논하도록 하겠다, 능효.”
“알겠사옵니다!”
“즉시 모든 간부들을 집결시키도록.”
“예, 전하!”
능효가 부리나케 나간 뒤로도 위지천백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훗! 독고무령, 제법 머리를 썼구나. 제왕대전으로 인해 잠시 긴장이 풀어진 틈을 타서 피해를 보지 않고 전력을 코앞까지 이동시키다니.’
일천이든 이천이든, 숫자는 큰 의미가 없었다. 정작 중요한 점은, 그 안에 어느 정도의 고수들이 얼마나 섞여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놈을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거늘. 할 수 없지. 해보는 데까지 해보고, 그래도 끝까지 대항한다면 제거하는 수밖에.’
위지천백은 결심을 굳히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태사의 뒤의 휘장을 젖히고 내실로 들어갔다.
내실에는 모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백의를 입은 중년인, 흑의를 입은 중년인 그리고 밀천객까지.
그들은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었기에 대충 흘러가는 상황을 알고 있었다.
특히 밀천객은 다른 두 사람보다 독고무령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는 위지천백이 자리에 앉자 침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밀천객의 질문에 위지천백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독고무령이란 놈이 일천이 넘는 무사들을 이끌고 이십 리 앞까지 왔다고 하는군.”
산발적인 공격이라면 몰라도, 직접적인 전면공격을 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천하의 누가 감히 제왕성을 친단 말인가?
암천회와 천룡방이 손을 잡았다 해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천룡방이 모두 몰려오지 않는 한.
밀천객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단순히 제왕대전에 참석하기 위해서 온 것일 수도 있다. 일천의 숫자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걸 수도 있고. 자신이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말이다.
위지천백은 그렇게 생각했다.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었다.
하지만 미리 대처해서 나쁠 것도 없었다.
“일단 만반의 준비를 하고 놈이 어떻게 나오나 지켜볼 생각이네. 내가 먼저 나서서 놈을 공격하면 천하가 웃을 것이 아닌가?”
밀천객은 느릿하니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닫았다.
그가 입을 닫자, 위지천백이 상석에 앉은 후 흑의중년인을 향해 물었다.
“안충과 위소의 장군들은 언제 오기로 했는가?”
“내일 해가 뜨기 전에 도착해서 충성을 맹세할 것입니다.”
“말을 듣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던데?”
“대부분 머리를 바꾸었고, 남은 자들은 극소수여서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위지천백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좋아. 기왕이면 독고무령이란 놈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왔으면 좋겠군. 본좌의 진정한 힘을 알고 나면 싸울 것도 없이 무릎을 꿇을지 모르는데 말이야. 후후후후.”
강자의 여유.
세 사람의 눈에는 위지천백의 말이 그렇게 느껴졌다.
“태자가 어림군을 움직였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각 군의 수장들이 모두 이곳에 와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형님.”
위지천백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담담히 말했다.
“그들은 우리를 상대할 정신도 없을 거네. 지금쯤 알탄이 십만 군사를 이끌고 장성을 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테니까 말이야.”
밀천객의 눈빛이 찰나 간 흔들렸다.
위지천백은 조용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알탄에게 맡기고, 우리는 이곳의 일을 정리하지, 인환(人幻).”
조용히 앉아있던 백의중년인이 대답했다.
“예, 주군.”
“성 안에 들어온 자들에 대한 조치는 다 취했는가?”
“오늘밤이 지나면, 모두 주군의 충실한 수하가 될 것입니다.”
“좋아, 아주 좋아. 그럼 이제 독고무령이라는 놈만 남은 건가?”
위지천백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야망의 미소.
밀천객은 위지천백의 미소를 보며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 * *
제왕성 정문까지 이어진 제왕로(帝王路)는 마차 넉 대가 달려도 될 만큼 넓었다.
또한 일직선으로 쭉 뻗은 거리는 삼 리나 되었는데, 길 양쪽에 높이가 십 장은 될 법한 나무들이 도열한 창병(槍兵)들처럼 우뚝 서 있어서 장엄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휘이잉!
관제산을 휩쓸고 내려온 바람이 길가의 나무에 부딪치며 요동치자, 부석거리던 황톳길에서 누런 흙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일순간에 드넓은 길이 황무(黃霧)라도 낀 듯 누렇게 변했다.
신시에서 유시로 넘어갈 즈음. 독고무령이 일행들과 함께, 뿌연 황무로 하늘조차 노랗게 보이는 제왕로에 들어섰다.
일행 중 암천오로가 보이지 않았는데, 암천오로는 비밀스런 일을 하기 위해 영천봉에서 헤어진 상태였다.
모두 사십육 명. 암천오로가 빠진 독고무령 일행이 제왕로를 반 이상 메운 채 걸어가자, 앞서 걷던 사람들은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산이 통째로 옮겨가는 것만 같은 기세!
사람들은 석상처럼 굳은 채 입을 닫고, 독고무령 일행이 지나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정문이 가까워지자, 독고무령의 눈빛이 심해의 어둠처럼 무심하게 가라앉았다.
‘지금쯤 이런저런 추측을 하고 있겠지?’
이천오백의 무사 중 일천여 명은 밖으로 드러나게 하고, 나머지 천오백은 은밀한 장소 두 곳을 택해서 머물게 했다.
지난 수일 동안 수십 명을 파견해서 철저한 조사 끝에 택한 장소였다.
태원의 간자들이 모두 제거되어 원초적인 정보가 차단된 상태다.
거기다 일천의 무사가 제왕성의 삼면을 가로막고 있는 상황. 순찰대의 활동이 제한된 제왕성으로선 그들의 존재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저들이 확신할 수 있는 숫자는 일천 정도.
설령 더 될 거라 의심한다 해도, 확신할 수 없는 이상 함부로 많은 무사들을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었다.
일단 그 정도면 되었다.
굳이 오래 속일 생각도 없었다. 하루만 속이면 되니까.
독고무령은 무심한 눈을 들어, 정문 위로 곤두박질치며 떨어지는 시뻘건 태양을 바라보았다.
저 태양이 지고, 아침 해가 떠오를 때쯤이면 모든 일이 끝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승자와 패자만이 남겠지.’
독고무령은 주홍빛으로 타오르는 태양에서 눈을 떼고, 거대한 정문 상단에 걸려 있는 현판을 쳐다보았다.
제왕성(帝王城)
유난히 세 글자가 강한 느낌으로 두 눈에 틀어박혔다.
자신이 태어난 곳. 아버지가 돌아가신 곳. 얼굴도 보지 못한 어머니와 가족들의 피로 물든 곳.
마침내 그 제왕성에 정식으로 들어간다. 이전과는 감회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제가 왔습니다. 아버지 아들, 무령이가.’
-어서 와라, 내 아들!
귓전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좋은 징조였다.
독고무령이 정문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위지천백의 귀에 들어갔다.
“독고무령이 왔다고?”
“그렇다 하옵니다, 전하. 한데…… 천룡방주 북리중현이 그와 함께 왔다고 하옵니다.”
위지천백의 눈에서 신광이 번뜩였다.
“북리중현이?”
천룡방이 암천회와 손을 잡은 것은 익히 알고 있던 사실. 그래도 북리중현이 직접 왔다는 건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모두 몇이나 왔더냐?”
“고수들로만 마흔다섯 명이옵니다.”
마흔다섯 명이라면, 비록 고수들만 왔다 해도 예상보다 적은 숫자다. 역시 자신의 짐작대로 나머지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남겨놓은 자들인 듯했다.
위지천백의 입가에 냉소가 걸렸다.
‘훗, 너무 자신만만하군. 밖에 있는 자들이 너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너는 나를 너무 모르고 있구나, 독고무령.’
그들 모두가 고수라 해도 위지천백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이곳은 제왕성. 자신의 대지인 것이다.
“암천회와 천룡방 사이에 알력이 있다 했던가?”
“새벽에 날아온 전서에 의하면, 알게 모르게 사이가 벌어진 것 같다 하옵니다.”
“그럼, 독고무령과 북리중현 사이도 마찬가지일 수 있겠군.”
의자에 등을 깊숙이 묻은 위지천백은 손잡이를 쓰다듬으며 나직이 말했다.
“능효, 독고무령과 북리중현을 데려와라.”
능효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곳으로 말이옵니까? 그들이 오겠사옵니까?”
“북리중현은 몰라도, 독고무령은 반드시 올 거다. 내가 놈을 잘못 생각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후후후후, 놈은 나와 비슷한 구석이 있거든.”
* * *
능효의 등을 보며 걸음을 옮기는 독고무령의 눈이 심해의 어둠처럼 깊어졌다.
위지천백이 최대의 적이나 다름없는 자신을 거처로 초대했다.
거부할 수도 있었다. 위지천백이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수작을 부릴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것이 염려되었다면 굳이 소수만으로 적진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독고무령은 길게 뻗은 회랑을 걸으며 입술을 살짝 말아 올렸다.
전각 안 곳곳에서 은밀한 기운이 느껴졌다.
‘모두 열다섯. 어떤 경우라도 제왕성을 떠나지 않는다는 제왕수호대인가?’
공노명에게 듣지 못했다면 자신 역시 알지 못했을 이름.
정말 제왕수호대라면, 전각 안은 용담호혈이나 마찬가지였다. 강호에 알려져 있진 않지만, 다섯이면 절대고수도 상대할 수 있다는 자들이 바로 제왕수호대인 것이다.
‘천지인(天地人) 삼객(三客)은 그도 정확한 정체를 모른다고 했지.’
대군사였던 공노명조차 정확한 정체를 모르는 세 명의 고수.
그중 하나가 밀천객이라면, 나머지 둘도 밀천객 못지않은 자들이라고 봐야 했다.
‘위지천백, 모든 힘을 다 드러내봐라. 얼마든지 상대해주마!’
그때였다. 앞서가던 능효가 걸음을 멈추더니 방문에 대고 소리쳤다.
“전하! 암천회주님과 천룡방주님을 모시고 왔사옵니다!”
북리중현은 능효의 말에 기분이 묘하게 틀어졌다.
‘왜 내가 항상 뒤에 나와야 되는 거지?’
이번만이 아니었다.
정문의 방명록에 이름을 적을 때도 사람들은 자신보다 독고무령의 이름에 더 놀랐다.
방을 배정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자신들을 찾아온 능효가 먼저 말을 건넨 사람도 독고무령이었고.
그런데 또 자신보다 독고무령의 지위를 먼저 말한다.
발음하기가 좋아서 그러는 것은 아닐 텐데.
솔직히 암천회주보다는 천룡방주가 더 부르기 좋은 이름 아닌가?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이었다. 누구 이름을 먼저 부르면 어떻단 말인가?
그런데도 연달아 그러니 이상할 정도로 속이 끓었다.
‘어디 위지천백은 어떻게 나오자 보자!’
방문이 열리자, 뒷짐 지고 서 있는 위지천백이 보였다.
독고무령과 북리중현은 능효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거리가 이 장으로 줄어들자 위지천백이 조용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서 오게, 이제야 암천사신을 보게 되었군. 정말 반갑네. 본좌는 위지천백이라 하네.”
위지천백은 뒷짐 진 손을 풀고 살짝 맞잡았다.
독고무령도 마주 포권을 취하며 대응했다.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독고무령입니다. 저 역시 성주와 같은 마음입니다.”
젠장! 또 독고무령이 먼전가?
북리중현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때 위지천백이 핏대 선 북리중현을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위지천백이오. 천룡방의 주인이 직접 올 줄은 미처 몰랐구려.”
북리중현은 엉겁결에 포권을 취했다. 자신도 모르게 살짝 고개까지 숙이며.
“북리중현이외다.”
뒤늦게 자신과 독고무령의 대응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낀 북리중현은 손을 내리다 말고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어렴풋이나마 자신과 독고무령의 차이를 느낀 것이다.
인정하기는 죽도록 싫었지만, 자신은 위지천백의 기세에 눌렸다. 독고무령은 눌리지 않았거늘.
‘빌어먹을.’
위지천백을 꺾기 위해 온 사람이 기세에서 눌리다니.
그런데 그러한 북리중현의 표정과 멈칫거림이 위지천백의 판단력을 흔들었다.
‘알력이 있다는 게 사실이었나 보군. 저건 절대 거짓된 행동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