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4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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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7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47화
247화
문득, 독고무령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걸렸다.
자신이 비옥십팔호실의 소악귀라는 걸 알면 위지천백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자신이 천자무서를 익힌 걸 안다면 어떤 마음일까?
‘그러고 보면 하늘도 결국 너의 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상념에 젖어있는 그의 뒤로 모용설이 다가갔다. 그녀는 독고무령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많은 사람이 죽겠죠?”
독고무령은 검은 장막을 주시한 채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럴 거다. 우리가 이기든 위지천백이 이기든. 천하가 걸린 일이니까.”
모용설은 묵묵히 독고무령의 등을 바라보고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 소저를 만나봤어요. 참 좋은 분이더군요. 그분을 위해서라도 꼭 무사히 돌아가셔야 해요.”
독고무령은 고개를 돌려 모용설을 바라보았다.
“동생도 보살펴야 할 텐데, 그냥 남지. 왜 따라왔나?”
“그 아이도 이제 안정을 찾았어요. 혼자 설 나이도 되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회주 옆에 있을 때가 제일 편해요.”
모용설은 그 말을 하며 독고무령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독고무령도 모용설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가슴 한쪽에 모용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가 남자처럼 살아야만 했던 이유를 말하던 그날부터.
“살아서 돌아가면, 유유에게 말할 거다. 내 가슴에 또 한 사람이 들어섰다고. 그러니 돌아가서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라, 설.”
순간, 배 위가 조용해지고, 먹물처럼 시커먼 강물이 뱃전에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배 위에는 독고무령과 모용설만큼이나 심각한 사람이 또 있었다.
“누님, 누님도 배 돌아갈 때 타고 가쇼.”
“싫어.”
“누님이 안전해야 내가 마음 놓고 싸울 거 아뇨.”
“내가 없으면 천방지축 휘젓고 다니다 죽을 걸?”
“절대 안 그럴게요. 누님을 놔두고는 억울해서라도 못 죽는다니까요.”
“뭐가 억울해?”
“저번에 어쩔 수 없어서 덮친 거 말고는, 아직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했잖아요.”
퍽!
구양소현의 주먹이 진사혁의 배에 정통으로 꽂혔다.
“그런 말을 여기서 하면 어떻게 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해야지.”
싫지 않은 표정. 허락이나 다름없는 말이다.
진사혁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 말을 들으니 주먹이 아니라 칼이 배에 꽂혀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좌우간 돌아가요. 무조건 살아서 돌아갈 테니까.”
“많이 다쳐도 안 돼.”
“그럴게요.”
“정말이지?”
“그렇다니까요?”
구양소현은 곰처럼 순한(?) 진사혁의 눈을 올려다보더니, 갑자기 그의 가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잠깐 이리 와봐. 얼굴에 뭐 묻은 거 같다. 닦아줄게.”
그러고는 강시처럼 졸졸 딸려오는 곰을 끌고 아무도 없는 으슥한 곳으로 갔다.
잠시 후.
배가 강가에 도착하자 무사들이 날아 내렸다.
목적지와 해야 할 일들은 떠나기 전부터 정해진 상태. 그들은 별다른 명령이 없음에도, 십여 명씩 이뤄진 각 조별로 움직이며 어둠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광경은 마치 분하에서 피어난 새벽안개가 태풍을 따라 서쪽으로 밀려가는 것만 같았다.
강가의 백사장에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오십일 명.
독고무령과 북리중현, 진원명, 북천삼괴, 암천오로 등 각 세력의 원로와 강호명숙들, 거기다 철검위와 암천위에서 진사혁을 비롯한 열 명이 남은 상태였다.
유하령은 보이지 않았는데, 독고무령은 그녀를 황보광이 이끄는 삼성맹의 사람들과 함께 보냈다.
삼성맹은 암천회와 천룡방의 일행이 아닌 것처럼 제왕성에 들어가기로 한 상태. 그편이 그녀에게 더 안전할 거라 생각한 것이다.
구양소현과 모용설을 실은 배마저 되돌아가고 습기 찬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자, 북리중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군. 한단에서 잘 지내던 내가 왜 여기에 서서 새벽이슬을 맞고 있는지 말이야.”
독고무령은 무채색의 눈빛으로 어둠을 주시하며 화답하듯이 말했다.
“저기에 넘어서야 할 것이 있으니 오신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그보다 못하다고 보나?”
“아니라 생각하셨다면 여기까지 오시지도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북리중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위지천백에게 노태군이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 자존심이 상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사람들의 비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천하의 주인 중 하나라 자부했던 자신은 그동안 노태군의 눈치나 보고 지내왔는데, 위지천백은 노태군을 단숨에 무너뜨렸지 않은가 말이다.
그동안에는 그저 자격지심에 빠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 위지천백을 이겨보고 싶다는 마음이 숨어 있었던 듯하다.
그는 굳이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을 비웃는 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이 위지천백보다 뛰어나다는 걸.
“그가 정말 소문대로 강한 자라면 좋겠군. 그래야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을 테니까.”
‘충분히 만족할 거요. 당신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독고무령은 그리 생각했지만, 속으로만 간직한 채 출발을 알렸다.
“이제 출발하지요.”
* * *
분하를 출발한 태풍의 선두가 고교 남쪽 삼십 리 지점을 지날 즈음 태양이 떠올랐다.
서쪽으로 밀려가는 태풍은 폭이 이십 리, 길이가 십 리에 달했다. 제왕성 순찰대에게 들켜도 대규모 이동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터였다.
다행히 그곳까지 가는 동안 제왕성 순찰대와 조우한 조는 한 곳도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았다.
남은 거리는 백 리. 이제부터 진정한 제왕성의 영역인 것이다.
제왕성의 순찰대와 처음으로 부딪친 조는 도청진이 이끄는 암향단 제이조였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자들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제왕대전이 하루 남은 만큼 그냥 보내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 순찰대를 이끄는 자가 홍려려의 미색에 반해서 쉽게 길을 터주지 않았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 사문이 어디냐, 저 아가씨 이름은 뭐냐.
순찰대의 대주는 꼬치꼬치 캐물으며 일각 이상을 끌었다.
도청진은 울화가 치밀었지만 꾹 참고 별일이 없기만 바랐다.
그 사이, 천수옥이 이끄는 삼조가 도착했다.
천수옥은 순찰대주라는 작자를 도청진처럼 좋은 말로 상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무사통과와 제거,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마당이다.
그런데 순찰대주라는 놈의 면상을 보니 쉽게 보내줄 것 같지가 않았다.
“이자식이 어디서 내 사매를 넘봐!”
갑자기 도를 빼든 그는 단칼에 순찰대주라는 자의 목을 쳐버렸다.
피를 본 이상 끝장을 봐야 했다.
“모두 죽여!”
명령을 내릴 것도 없었다. 암향단 이조와 삼조의 무사들은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이미 순찰대 무사들을 향해 일제히 살수를 펼치고 있었다.
도청진과 홍려려도 무기를 빼들고 적을 공격했다.
천수옥과 도청진은 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들. 게다가 나머지도 고르고 고른 정예무사들이었다. 일개 순찰대의 무사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 이놈들이!”
“으악!”
“도망……. 켁!”
순식간에 순찰대 열 명의 목숨이 사라지고, 누렇던 땅이 붉게 변해버렸다.
천수옥은 도에 묻은 피를 쓰러진 자의 옷에 쓱쓱 닦아냈다.
강호에 나와 첫 번째 살인이었다. 막상 도를 내리칠 때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는데, 흥건한 핏속에 쓰러져 있는 자들을 보자 가슴이 뛰었다.
‘지미, 이 정도에 흥분해서 어떻게 제왕성과 싸운다고…….’
힐끔 보니 도청진과 홍려려도 자신과 마찬가지 마음인 듯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숨소리가 거칠었다.
그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최대한 차가운 목소리로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안 보이는 곳에 묻어.”
그러고는 수하들이 시신을 처리하는 사이 도청진과 홍려려에게 다가갔다.
“사형, 앞으로 질리도록 보게 될 거요. 너무 마음에 두지 마쇼.”
천수옥이 짐짓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하자, 도청진은 이마를 찌푸린 채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을 죽인다는 게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군. 좀 전까지만 해도 적진을 누비며 검을 휘두르는 게 제법 멋있을 거 같았는데 말이야.”
“그래도 별수 없잖수. 싸움이 벌어지면 적을 죽이는 수밖에. 우리가 살아야 하니까.”
“하긴, 그렇지.”
사형인 도청진의 마음이 여리다는 걸 누구보다 천수옥이 잘 알았다. 그는 도청진의 어깨를 툭 치고 씩 웃었다.
“좀 전에 펼친 일검은 완벽했수. 상대가 고수였으면 더 멋졌을 텐데……. 아마 사부님이 보셨다면 눈이 휘둥그레졌을 거요.”
도청진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그래?”
천수옥은 고개를 끄덕이고 홍려려를 바라보았다. 도청진이 첫 살인으로 마음이 무거워졌으니 사매도 당연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홍려려는 그의 생각보다 강했다.
“이제 정말 강호인이 된 기분이에요, 사형. 빨리 처리하고 가요. 다른 사람보다 늦으면 안 되잖아요.”
그녀는 당차게 말하며 검을 꽂았다.
다독이려던 천수옥이 머쓱한 표정으로 도청진을 바라보았다.
‘려 매가 원래 저랬나?’
둘 다 같은 생각을 하며 어깨를 으쓱 추켜올렸다.
다른 곳에서도 암천회나 천룡방의 무사들과 순찰대가 간혹 마주쳤다. 대부분이 별 다른 마찰 없이 무사통과했지만, 수상하게 여긴 순찰대와 시비가 붙은 곳도 있었다.
-싸움이 나면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제거하고 흔적을 지워라!
암천회와 천룡방의 무사들은 명령받은 대로 움직였다.
순찰대는 암천회 무사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간혹 제법 강한 자들이 있었지만, 암천회와 천룡방의 각 조에 한 명씩 섞여 있는 절정고수를 당해내지는 못했다.
오십 리를 가는 동안 다섯 곳에서 시비가 벌어졌고, 제왕성의 순찰대 오십 명이 힘도 못써보고 무너졌다.
그리고 땅에 묻혔다.
몇 사람이 도주하려 했지만, 뒤따라 밀려온 태풍에 휩쓸려 한 사람도 도망치지 못했다.
싸움이 벌어지지 않은 조는 삼성맹과 하남의 명숙들이 이동하는 조뿐이었다.
제왕성의 순찰대도 그들에게는 시비를 걸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에게 길을 가르쳐주며 친절을 베풀었다.
삼성맹이 산서로 넘어오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 더구나 풍운장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다 보니 정보조차 없던 터였다.
제왕성으로선 삼성맹이 설마 암천회와 손을 잡았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유하령이 함께 가는 조는 순찰대가 직접 제왕성까지 안내해주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떼어놓느라 설전 아닌 설전을 벌여야만 했다.
그렇게 방원 이십 리에 이르는 태풍은 한시도 멈추지 않고 서쪽으로 향했다.
이제 제왕성까지는 오십 리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정오 무렵.
제왕성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영천봉의 회색빛 암벽 위에 수십 명이 나타났다. 독고무령 일행이었다.
깎아지른 삼십여 장 높이의 암벽 위에 우뚝 선 독고무령은 무심한 표정으로 전면을 응시했다.
저 멀리 관제산의 산자락을 드넓게 차지하고 있는 제왕성이 보였다.
때마침 짙게 깔린 구름이 걷히고 있었는데, 구름을 찢어발기고 벼락처럼 내리꽂힌 햇빛이 제왕성 위로 쏟아지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정말 멋진 곳이군.”
북리중현이 진정 감탄했다는 듯 한마디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독고무령은 깊게 침잠된 눈을 한 채 나직이 말했다.
“멋지기만 한 곳은 아니지요.”
많은 사람의 아픔이 배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피눈물이 흘러 바닥이 붉게 변한 곳도 많다.
그중에는 외조부와 어머니의 피로 적셔진 곳도 있고, 자신의 눈물이 떨어져 메말라버린 곳도 있다.
아버지와 스승인 유백하가 죽어간 곳…….
제왕성은 그런 곳이었다.
독고무령이 상념에 잠겨 있는데 진원명이 물었다.
“언제 갈 건가?”
“해가 떨어지기 직전에 들어가도록 하지요.”
* * *
능효는 수하의 보고에 벌떡 일어났다.
“뭐야? 그게 사실이냐?”
“십 리 앞에서 멈춰 섰다고 합니다, 당주!”
“놈들이 이렇게 가까이 올 동안 순찰대들은 대체 뭐하고 있었단 말이냐!”
평소의 침착성을 잃고 버럭 소리를 지르던 능효는, 갑자기 떠오른 한 가지 생각에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니지, 그렇게 많은 놈들이 나왔는데 태원에선 왜 연락이 없었던 거지?”
“태원의 일은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순찰대 중 여섯 개 조가 연락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놈들에게 제거된 것이 아닌지…….”
“이런 젠장!”
적의 수가 천 명에 이른다고 했다.
제왕성을 전격적으로 공격하기에는 어림도 없는 숫자지만, 치고 빠지는 식의 공격은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문제는 상대가 독고무령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아는 그는 추측만으로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능효는 다급히 방을 나서 위지천백에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