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4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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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4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40화
240화
몽골의 언어여서 석도명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일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유원위가 토씨까지 모두 알아듣고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곧바로 칼칼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준비는 다 끝나 있사옵니다. 중부와 남부의 위소가 완벽히 장악되는 대로 천하에 선언을 하실 것이옵니다.”
역시나 몽골의 언어였다. 그런데 한족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유창했다.
“그거 참, 그러고 보면 명이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도 신기한 일이란 말이야. 누군가가 들고 일어나도 벌써 들고 일어나서 나라를 뒤집었어야 하거늘.”
“그게 명의 저력이지요. 특히 강호의 세력들은 오랜 옛날부터 천자가 위급할 때마다 일어나서 외세를 막아왔는데, 아마 그들이 아니었다면 명은 진즉 무너졌을 것이옵니다.”
“그대의 주인이 젊을 때부터 강호에 몸담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참으로 대단한 분이시지요. 하나의 계획을 세우고 몇 십 년을 참고 기다릴 사람이 천하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하하, 그 정도 되니 내가 인정한 것이지.”
“어쨌든 한 분은 저 초원을 통일하시고, 한 분은 명의 땅에서 나라를 세우시게 되었으니, 역시 정통의 피를 이으신 분들은…….”
칼칼한 목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유원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석도명에게 전음으로 말했다.
<형님, 말뜻이 조금 이상합니다.>
<뭔데 그런가?>
<마치 위지천백과 알탄이 몇 십 년 전부터 알고 지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정통의 피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이 꼭…….>
순간이었다. 장막에 바짝 붙어있던 석도명이 섬뜩함을 느끼고 몸을 뒤로 뺐다.
쉭!
대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가죽으로 된 장막이 사선으로 길게 찢어졌다.
석도명은 즉시 뒤로 물러나며 유원위와 연사성에게 다급하게 전음을 보냈다.
<들켰다! 빨리 나가!>
유원위가 먼저 바깥쪽 장막의 갈라진 틈으로 몸을 던졌다.
바로 이어 연사성이 나가려는데 안쪽의 장막이 길게 갈라졌다.
쩌적!
“웬 놈이냐!”
안쪽에서 고함이 터져 나오며 강력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석도명이 검을 빼들고 연사성을 재촉했다.
<사성, 어서 나가!>
연사성도 도를 빼들고 소리쳤다.
<형님 먼저 나가십시오!>
하지만 안에서 밀려든 기운이 이미 몸을 덮치고 있는 상황. 석도명은 대꾸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장막이 갈기갈기 찢기며 두 기운이 맞부딪쳤다.
쩌정!
석도명은 이를 악물고 갈라진 장막을 노려보았다.
중원인으로 보이는 자가 두어 걸음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단 일격의 겨룸으로 가슴이 먹먹하다. 자신에 비해 하수가 아니라는 말. 아니, 얕보고 손을 쓴 거라면 자신보다 강하다고 봐야 했다.
상대도 의외라 생각했는지 노성을 내지르며 검을 뻗었다.
“쥐새끼 같은 놈!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숨어들었느냐!”
석도명은 조금도 방심하지 못하고 전력을 다해 막았다.
콰르릉! 쩌저정!
파오를 받치고 있는 기둥이 부러지며 벽력음이 울렸다.
뒤로 주르륵 밀려난 석도명은 바깥쪽 장막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시간이 없었다. 밖에 있는 병사들이 상황을 눈치 채고 몰려들 터였다. 완전히 포위되기 전에 빠져나가야 했다.
“사성, 빠져나가자!”
연사성도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하고 길게 갈라진 장막을 뚫고 밖으로 나갔다.
바로 그때.
“어딜 가려고 그러느냐!”
묵직한 목소리와 함께 가공할 역도의 기운이 뒤에서 밀려들었다.
석도명은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조금 전의 공격만 해도 받아내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보다 훨씬 강력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었다.
“빌어먹을!”
한소리 내지른 석도명은 탈출할 생각을 포기하고 밀려드는 기운을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쾅!
“크윽!”
찢겨진 장막 밖으로 튕겨진 석도명의 입에서 신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숨이 턱 막힌 석도명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검을 들어 올렸다.
장막 밖은 수십 명의 병사들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연사성이 그들과 대치하고 있어서 그나마 바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석도명은 입술을 세차게 깨물었다. 통증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자!”
소리를 내지른 그는 지체 없이 병사들의 머리 위로 신형을 날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파오 안에 있던 자들이 찢겨진 장막 사이로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그들이 막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면 영원히 빠져나갈 기회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알탄의 파오를 지키던 경비병들은 일반 병사들과 달랐다. 달단의 병사들 중 고르고 고른 용사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석도명과 연사성이 머리를 타넘으려 하자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공간을 넓혔다. 그러고는 칠팔 장을 날아간 석도명이 내려서자 다시 도약할 틈을 주지 않고 즉시 공격했다.
석도명은 경공으로 벗어날 생각을 포기했다. 어차피 심각한 내상을 입어서 경공을 펼친다 해도 얼마 가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사력을 다해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전진했다.
검기가 흐르는 검은 일개 병사들이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쩌저저정!
서너 명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고, 개중 한 명은 무기를 놓친 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때였다.
“네놈들은 아무 곳에도 갈 수 없다!”
파오에서 나온 자 중 하나가 날아들며 손을 휘저었다.
순간 대기를 찢어발기는 소음과 함께 백색 광채를 뿜어내며 륜(輪)이 날아들었다.
피하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 석도명은 이를 악문 채 륜을 쳐냈다.
쾅!
둔중한 소리와 함께 귀가 먹먹했다.
“웩!”
가슴에 쌓였던 핏덩이가 연이은 충격을 받자 제어할 새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석도명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빌어먹게도 탈출하기가 틀린 것 같다. 연사성도 수백 명의 적들에게 포위된 상태.
다행이라면 유원위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원위! 부디 너라도 살아라!’
그는 검병을 불끈 쥐고 고개를 쳐들었다.
륜으로 공격한 자가 삼 장 앞에 서 있었다. 양손에 륜을 들고 있는 자. 그는 바로 제왕성 제천각의 부각주인 백혈쌍마륜 황암이었다.
“첩자치고는 제법이군. 네놈은 누구냐?”
석도명은 황암의 말에 씩 웃었다.
“개소리 집어치우고 다시 한번 싸워보자.”
“건방진 놈! 어디 팔다리를 잘라도 그 입이 지금처럼 움직이나 보자!”
노성을 내지른 황암이 훌쩍 몸을 날리며 석도명을 공격했다.
석도명은 수비는 전혀 할 생각도 하지 않고 곧장 황암을 향해 검을 뻗었다.
생각지도 못한 석도명의 동귀어진식 공격에 황암이 흠칫하며 신형을 틀었다.
석도명은 거머리처럼 그를 향해 달려들며 전력을 다한 공세를 펼쳤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황암이 분노의 일성을 내지르며 륜을 휘둘렀다.
쩌저정!
찰나 간에 다섯 번의 충돌이 이어지며 석도명의 신형이 연신 뒤로 밀려났다.
그가 비록 전에 비할 수 없이 강해졌다 해도 황암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내상을 입은 상태가 아닌가.
그때였다. 뒷짐을 진 채 구경만 하고 있던 알탄이 말했다.
“놈들을 사로잡아라. 몇 가지 물어봐야겠다.”
사로잡히면 고문을 당할 것은 기정사실. 그리고 결국은 죽을 것이다.
“크하하하! 모든 일이 네놈들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석도명이 비장한 웃음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입에서 피가 튀며 어둠속으로 흩어졌다.
순간이었다. 석도명이 검을 거꾸로 들더니, 자신의 심장에 쑤셔 넣었다.
푹!
“네놈들은 내게서 한마디도 들을 수 없어. 크크크.”
심장에 검을 쑤셔 넣은 석도명이 하얗게 웃는다.
“형님!”
연사성이 그 모습을 보고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그 역시 살아날 수 없음을 모르지 않았다.
“오냐, 이놈들! 먼저 지옥에 가서 네놈들을 기다리마!”
연사성은 원한에 찬 외침을 토해내고는, 망설이지 않고 칼로 목을 그었다.
찰나, 한 줄기 피화살이 어둠 속으로 솟구쳤다.
“지독한 놈들!”
황암은 석도명과 연사성이 자결을 택하자, 짜증내듯이 욕을 내뱉었다.
한편, 유원위는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간발의 차이로 경비병들에게 들키지 않고 빠져나왔다. 복장도 달단 병사의 복장이고, 태연하게 행동한 그를 달단 병사들은 붙잡지 않았다.
하지만 석도명과 연사성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놈들에게 포위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돌아가서 함께 싸우다 죽을 수도 있었다. 회주에게 전할 말만 없었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들었던 말에 얼마나 무서운 뜻이 담겨 있는지.
그 말만큼은 반드시 회주에게 전해야 했다.
‘크흑! 형님, 함께 죽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사성, 한날 같이 죽자는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하다! 하지만 복수만큼은 반드시 해주겠다!’
돌아서는 유원위의 두 눈에서 어둠처럼 검은 눈물이 흘렀다.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피눈물이었다.
* * *
모래바람이 제법 강하게 불던 어느 날, 무사 십여 명이 태원으로 들어섰다.
동문을 지키던 장추는 목에 힘을 주고 그들의 앞을 막았다.
“정지! 어디서 온 누군가?”
무사들 중 하나가 말도 없이 명패 하나를 장추의 코앞에 내밀었다.
순간 명패를 본 장추는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석상처럼 굳어졌다.
명패를 내민 자가 금방이라도 혀를 찰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명패로 장추의 이마를 툭툭 치며 말했다.
“들어가도 되겠나?”
“드, 들어가십시오. 충!”
그렇게 장추의 얼을 빼놓은 그들은 곧장 풍운장으로 향했다.
독고무령은 풍운전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보며 반색했다. 황궁에서 손님이 왔다고 하더니, 거친 수염이 턱에 가득한 중년인, 전무호가 직접 온 것이다.
“어떻게 직접 오셨습니까?”
“도독께서 직접 가보라더군. 황궁에서 처리하기에는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 급박하다면서 말이야.”
독고무령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대인께 어느 정도의 권한이 주어져 있습니까?”
전무호가 수염이 가득한 턱을 씰룩이며 말했다.
“나에게는 별 권한이 없네.”
별 권한이 없다?
조금 이상한 말이었다. 군과 관을 움직이려면 본래의 지위인 금의위 천호장보다 더한 권한을 줘서 보내야 마땅했다.
그런데 권한이 없다니.
동방명이 사태의 급박함을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전무호를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냥 정보만 취합하라고 보내시지는 않은 걸로 보입니다만.”
“자네가 하면 되지.”
“예?”
전무호가 다시 턱을 씰룩였다. 잘못 보지 않았다면 분명 웃음이었다.
그는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독고무령에게 내밀었다.
“태자 저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거네. 꺼내 보게.”
독고무령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주머니를 받았다.
주머니에는 봉황 한 마리가 금실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안에 든 물건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짐작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뭔데 이렇게 고급스런 주머니에 담겨 있지?’
그는 주머니를 열고 안에 든 것을 꺼내보았다.
검집이 휘황한 빛을 흘리는 단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빛 용이 검병에서 검집까지 일체로 장식되어 있고, 검집에는 벽옥이, 검병에는 엄지손톱만 한 홍옥이 두 개 박혀 있었다.
독고무령은 검병을 바라보았다. 두 개의 홍옥 사이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용검령(龍劍令)
독고무령이 단검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든 순간, 전무호를 비롯한 금의위 위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금의위 천호 전무호가 삼가 용검령주를 알현하옵니다!”
독고무령은 전무호가 무릎을 꿇자 곤혹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그만들 일어나십시오.”
그의 손짓에 따라 전무호와 금의위 위사들의 무릎이 절로 펴졌다.
전무호는 독고무령의 가공할 공력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허, 이건 뭐…….’
그때 독고무령이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용검령주는 또 뭐고요?”
“태자 저하께서는 령주가 저하를 대신해 제왕성을 상대해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용검령은 태자 저하의 세 가지 신물 중 하나인데, 비상시에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요.”
독고무령은 손에 들린 용검령을 내려다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물었다.
“무림왕으로 임명된 자도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