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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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1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38화
238화
독고무령이 장소천에게 물었다.
“자네, 유 소저를 봤나?”
“아니, 누군데 그러나?”
자신의 거처에서 벗어난 적이 거의 없는 장소천이다. 유하령이 그의 거처를 찾을 이유가 없는 한 두 사람은 만날 일이 없었다.
“가지, 내가 소개시켜줄 테니까.”
독고무령은 장소천과 함께 방을 나섰다.
“사혁, 유 소저를 내 방으로 모셔오게나.”
진사혁이 대답하기 전에 모용설이 먼저 말했다.
“제가 가서 모셔올게요.”
유하령이 모용설과 함께 방으로 들어선다. 독고무령은 그녀를 보고 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 아름다워졌다고 생각했다.
아마 부친에 대한 걸 확실하게 알고 난 후, 찌꺼기처럼 마음 한구석에 쌓여 있던 앙금을 말끔히 털어낸 때문인 듯했다.
그녀는 구름을 밟고 걷듯이 유유한 걸음걸이로 독고무령에게 다가오더니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중요한 일로 출타했다고 들었는데, 일은 잘 처리되었나요?”
“그렇습니다. 오래 기다리셨는데, 지루하지는 않았습니까?”
“주위에 재미있는 분들이 많아서 심심하지 않게 보냈어요.”
“다행이군요. 여기는 제 친구인 장소천입니다.”
유하령의 눈이 장소천을 향했다.
장소천은 얼이 빠진 사람처럼 유하령을 보더니,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입을 열었다.
“장소천이라 합니다.”
“유하령이에요.”
장소천이 엉겁결에 한마디 더했다.
“아, 예. 정말 이름도 아름다우시군요.”
유하령은 피식,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고마워요.”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온갖 미사여구가 들어간 칭찬을 셀 수도 없이 들어보았다. 그 중 장소천의 칭찬처럼 유치한 말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 유치한 칭찬이 그리 싫진 않았다.
장소천은 반쯤 정신이 없었다. 자신이 뭐라고 말했는지도 기억나지 못했다.
아마 자신이 얼마나 유치하게 느껴지는 말을 했는지 알게 된다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것이 분명했다.
“왜 그러고 있나? 자리에 앉지. 유 소저도 앉으시지요.”
독고무령이 멍하니 서 있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 덕에 장소천은 멍청한 모습을 유하령에게 더 보여주지 않아도 되었다.
유하령과 장소천이 의자에 앉자 모용설도 독고무령 옆에 앉았다.
독고무령은 모용설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제지해봐야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모두가 자리에 앉은 다음에야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대단한 분들이 함께 오셨더군요.”
“사부님과 인연이 있어서 오신 분도 있고, 제 부탁을 받고 오신 분도 있지요. 제왕성과 싸우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싶어요.”
“도움이 되기에 충분한 분들이오.”
그때 유하령이 뜻밖의 말을 했다.
“아마 근시일 내에 황보세가에서도 사람들이 올 거예요.”
“황보세가에서?”
“대공자가 가주를 설득했어요. 제왕성이 백운서원에 비밀거점을 마련한 것만으로도 황보세가는 자존심을 상한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물론 속마음은 조금 다를 수도 있어요. 표면상으로는 그 일에 대해 따지겠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남하할지 모르는 제왕성의 야욕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뜻도 숨어 있다고 봐야 할 거예요.”
“황보세가라…….”
그들의 합류는 독고무령으로서도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황보세가는 삼성맹의 주축이 되는 오대세가 중 하나. 제왕성과 관계된 일을 독자적인 판단만으로 결정하지는 않았다고 봐야 했다.
결국 그들이 합류한다는 것은, 삼성맹이 이번 일에 끼어들기로 작정했다는 뜻.
천룡방에 이어 삼성맹이 제왕성을 상대하겠다고 암천회와 손을 잡은 형국이다.
천하팔패 중 세 곳이 산서에서 얽혀들기 직전인 상황. 이 일을 알면 천하가 뒤흔들릴 것이었다.
‘시간이 문제군. 일이 터지기 전에 위지천백을 막지 못한다면, 격류가 모든 것을 덮칠 것이다!’
그때 유하령이 물었다.
“운양이라는 분에게 들으니, 천룡방도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라고 하던데요. 사실인가요?”
“그렇소. 아마 며칠 사이에 그들도 도착할 거요.”
“굉장하군요. 세상이 독고회주와 암천회에 대해 알게 되면 깜짝 놀랄 거예요.”
진심이었다. 이제 이십 대의 독고무령을 중심으로 거대한 폭풍의 회오리가 돌고 있다.
희대의 풍운아!
그게 현재의 독고무령을 간략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었다.
지금이야 황하 이남에선 독고무령에 대해 아는 사람이 드물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그를 주시할 것이었다.
유하령은 진정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독고무령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천룡방마저 온다면 힘의 결집이 어느 정도 완성될 거 같은데, 제왕성을 공격할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것이 있으신가요?”
“몇 가지 생각해놓은 것이 있었소. 그런데 문제가 생겨서 그 모든 것을 파기하고 새로운 대응책을 세워야 할 판이오.”
“어떤 문제이기에 모든 계획을 포기해야 한다는 거죠?”
독고무령은 제왕성과 황궁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굳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아도 유하령이라면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하령은 독고무령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얼굴이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간악한 자가 그리도 엄청난 일을 꾸몄다니…….”
“지금까지 돌아가는 걸로 봐서, 그는 그 모든 걸 오래 전부터 진행시켜온 것 같소. 적어도 이십 년 전부터 말이오.”
“세상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위지천백을 단순히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는 마인으로만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다.
위지천백은 능히 효웅이라 불릴 만한 자다. 천하를 거머쥐려는 자를 어찌 단순한 마인이라 할 수 있을까.
유하령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위지천백이 정말 나라라도 세운다면, 그만큼 복수하기가 어려워질 것 아닌가.
“그를 상대하기가 쉽지 않겠군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그가 아무리 철저하고 완벽하게 일을 꾸며도 어딘가에는 약점이 있을 것이오.”
“독고 공자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독고무령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한 관건은 속도요. 틈이 보여도, 어물거리며 쳐다만 보다가는 한순간에 다시 메워질 거요. 그에게 손쓸 순간도 주지 않고 단숨에 모든 것을 마무리 지어야만 승리할 수 있소. 나는 그때까지 힘을 최대한으로 모을 생각이오.”
“그럼 그를 칠 기회를 포착하는 게 중요하겠군요.”
독고무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저 없는 무심한 말투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어쩌면 그럴 기회가 곧 올 것 같소.”
‘위지천백, 제왕대전을 연다고 했던가?’
깊고 깊은 눈빛 저 안쪽에서 한광이 번뜩였다.
* * *
두두두두두두…….
삭막한 황야를 달리는 수천 필의 말발굽 소리!
모래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오르며 지축이 흔들린다.
“호이이! 호이이이!”
“멈추지 말고 달려라, 달단의 용사들이여!”
와아아아!
그들은 저 멀리 띠처럼 펼쳐진 장성이 보이자 손에 들린 창칼을 높이 쳐들고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수천의 기마병이 내지르는 환호와 괴이한 기음은 떨어진 거리가 십 리나 되는데도 장성을 지키는 수비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수비대의 군사들은 낯빛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빌어먹을! 달단 놈들이 몰려온다!”
“너무 많아! 설마 우리만으로 저놈들을 막을 수 있다고 보는 건 아니겠지?”
“씨발! 어차피 도망쳐도 몇 걸음 도망 못 쳐! 죽더라도 몇 놈은 죽이고 죽자고!”
수비대의 숫자는 전부 해봐야 일천 정도다.
새카맣게 밀려드는 달단의 기마병을 막기에 일천의 군사는 턱없이 적었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죽을 거라면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군병들이 모두 죽음을 각오했을 때였다.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던 달단의 기마병들이 전진을 멈추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가.
“저것들이 왜 멈추지?”
병사들은 의아함과 안도감이 뒤범벅된 상태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지나도 그들이 전진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기마병 뒤로 개미떼처럼 보이는 보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길! 대체 몇 명이야?”
“오만 명도 넘겠는데?”
“저놈들을 기다린 건가?”
차라리 바로 쳤다면 공포감이 덜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할 새도 없이 죽든 살든 결정이 되었을 테니까.
그런데 적이 멈춰 서서 기음만 질러대자, 시간이 흐를수록 병사들의 가슴에 공포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쓰벌놈들, 공격하려면 어서 하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혹시 알아? 그냥 위협만 하고 물러갈지?”
“저놈들이 할 일 없어서 여기까지 왔겠냐? 분명 공격할 거다. 분명히…….”
병사들은 공포감을 덜기 위해 수다를 떨었다. 그런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몸이 오그라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적은 날이 저물어갈 때까지 전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해가 지면 공격하려고 그러나?
병사들은 그런 생각을 하며 전면을 노려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어? 저놈들, 저기다 파오를 세우잖아?”
파오는 몽골식 이동천막집이다. 파오를 세운다는 것은 그곳에 머물겠다는 뜻이었다.
털썩.
긴장이 풀린 병사들은 더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루의 목숨이 더 연장되었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 * *
태양이 중천에 떠오를 무렵, 천룡방 무사들이 풍운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제왕성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대여섯 명씩 조를 이루고 성문을 통과했다.
근 두 시진에 걸려서 도착한 무사의 숫자는 모두 이백여 명. 예상했던 것보다 많지 않은 숫자였다.
그런데 그들 안에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섞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사람들은 천룡방의 장로들이었는데, 그들 중에 천룡무존 북리중현이 있었던 것이다.
천하팔패 중 한 세력의 주인, 오존 중 한 사람. 그런 자가 직접 수하들을 이끌고 태원에 나타난 일은, 그야말로 강호의 호사가들이 알면 사흘 밤낮을 떠들어댈 일대사건이었다.
하지만 그의 등장은 비밀스럽게 처리되었다. 풍운장 안에 제왕성의 간자가 없으란 법은 없으니까.
독고무령은 북리중현과 천룡방의 장로들을, 풍운전의 내실에서 암천회의 간부들과 함께 맞이했다.
오로와 진원명 등은 부르지 않았다. 삼괴는 독고무령이 오지 못하게 했고.
독고무령은 그가 들어오자,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넸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북리중현도 웃으며 마주 포권을 취했다.
“잘 있었는가?”
북리중현의 옆에는 천룡방 팔대장로 중 넷이 서 있고, 그 뒤에는 천룡십팔객 중 다섯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독고무령이 자신들의 주군인 북리중현을 평배로 맞이하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북리중현이 그에 대한 불만을 말하지 않는 이상 나설 수는 없는 일. 눈만 부릅뜨고 독고무령을 노려보았다.
그걸 보고는 독고무령의 옆에 서 있던 육풍원이 같잖다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쳐들었다.
“거, 눈에서 힘 좀 빼지?”
눈을 부릅뜬 자들의 시선이 육풍원을 향했다.
어이가 없다는 눈빛. 아마 나이만 좀 젊어보였다면 당장 한소리 했을 것 같은 표정들이었다.
장만익이 쓴웃음을 지으며 나섰다.
“육 형, 이해해주시구려. 아직 회주를 몰라서 그러니.”
“이해? 솔직히 말해서, 장 형만 아니었으면 이 자리에 나오고 싶지도 않았수. 그런데 어디서 회주에게 눈을 부릅떠? 죽을라고.”
육풍원의 말에 가시가 있다는 것을 북리중현이 왜 모를까. 그는 담담히 웃으며 육풍원에게 말했다.
“산서의 전마가 성질 좀 있다고 들었는데, 과연 들은 대로군.”
“내 비록 성질은 좀 더럽지만, 그래도 남의 뒤통수는 치지 않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게 어떻겠나?”
“나중에 하면 사실이 달라지기라도 한답디까?”
육풍원이 계속 쏘듯이 말하자 독고무령이 나섰다.
“그 일에 대해선 방주님과 이야기 나눈 것이 있습니다. 이제 그만 하시지요.”
독고무령까지 말리자 육풍원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렸다.
“뭐 회주가 그리 말한다면야 들어야지…….”
북리중현에게도 대들던 육풍원이 독고무령의 한마디에 꼼짝을 못한다.
천룡방의 장로들과 십팔객은 의외라는 눈으로 독고무령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독고무령은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북리중현만 바라보았다.
“앉으시지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