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3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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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화
휘두르기만 하면 당장 상대의 목을 칠 수 있었다. 그런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투항한 자의 목은 전장에서도 치지 않는 법. 이놈은 이제 죽은 놈과 같다. 죽은 놈의 목을 친다 해서 죽은 사람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거늘…….’
구양은은 그렇게 자위하며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 마음대로 하게. 어차피 자네가 아니었으면 잡을 수 있는 자도 아니었으니까.”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주.”
독고무령은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그리고 적수천을 향해 물었다.
“그대는 그렇다 치고, 저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은룡산장의 무사 중 그때까지 살아있는 사람은 모두 넷이었다.
거꾸로 진사혁 등과 구양은 일행에게 포위되어 있던 그들은 독고무령의 말이 떨어지자 적수천을 바라보았다.
적수천이 그들을 향해 말했다.
“비겁자라 욕하고, 얼굴에 침을 뱉어도 좋소. 나와 함께 암천사신의 종이 되라고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니, 그대들의 길은 그대들이 결정하시오.”
넷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자는 진사혁과 대치하고 있던 귀전단주 염초강이었다. 그는 질렸다는 듯 진사혁을 힐끔 쳐다보고는 땡감을 베어 문 표정으로 말했다.
“젠장, 어차피 떠나고 싶어도 보내주지 않는데 어쩌겠소?”
푹.
그는 검을 땅에 깊숙이 박아 넣고 말을 이었다.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좋다던데, 나도 사사자와 함께하겠소. 어디 맘대로 굴려보쇼.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 하겠소?”
그가 적수천을 따르기로 결정하자 다른 사람들도 무기를 내렸다.
진사혁 등은 독고무령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았다.
백천산 계곡을 공격했던 때를 생각하면 팔다리 하나쯤 잘라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들보다는 제왕성에 더 원한이 많은 만큼, 그들이 제왕성을 상대로 몸 바쳐 싸운다면 그럭저럭 용서해줄 마음도 있었다.
문제는, 저들을 과연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의문을 갖자 독고무령이 말했다.
“이들의 약속을 믿을 수 없겠으면 이 자리에서 죽이시오.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등을 맡길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적수천을 비롯한 은룡산장의 무사들은 눈을 질끈 감고서 생사의 결정을 기다렸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 진사혁이 곤을 붕붕 휘둘러서 간담을 서늘하게 하긴 했지만.
“나는 은혜를 배신으로 갚는 놈을 제일 싫어한다오. 명심하쇼.”
그렇게 상황이 정리되자, 독고무령은 일단 부상자를 먼저 손보게 했다.
그러고는 구양은과 함께 있는 괴인들에게 다가갔다.
구양은을 제외한 나머지 네 사람은, 구양은의 숙부가 되는 구양지승과 동생뻘인 구양효 그리고 장로인 엽위와 추자웅이었다.
독고무령이 묻자, 구양은이 지나온 상황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들이 화상을 입은 것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불이 붙은 전각 안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라 했다.
모두 일곱 사람이 뛰어들었는데, 두 사람은 내상이 깊어 불길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분사(焚死)했다고 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나마 다섯 사람이라도 그 상황에서 살아나왔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구양가의 사람들이 좋아하겠군.’
독고무령은 그들이 운기를 해서 몸을 다스릴 동안 적수천에게 명을 내렸다.
“이제부터 그대들을 실혼대(失魂隊)라 부를 것이니, 앞으로는 항상 눈 밑의 얼굴을 가리도록. 이 세상에서 사라진 사람들이니까.”
적수천은 독고무령의 말뜻을 알아듣고 순순히 응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내 명이 떨어지기 전에는 함부로 손을 써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오.”
“명심하겠습니다.”
적수천은 고개를 숙인 채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독고무령이 그런 적수천에게 넌지시 말했다.
“내가 한 말만 제대로 들었어도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왜 내 말을 새겨듣지 않았는지 모르겠군.”
적수천은 독고무령의 뜬금없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독고무령이 살짝 목소리를 바꿨다. 일전에 적수천을 만났던 그날의 목소리로.
“위지천백을 얕봐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소?”
적수천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그는 그 목소리를 모를 수가 없었다.
눈을 부릅뜬 적수천은 독고무령을 바라보며 말을 더듬었다.
“다, 당신은……? 그, 그럼…… 암문이…… 암천회?”
* * *
탕!
술잔이 세차게 탁자를 때리며 술 방울이 튀었다.
술병을 잡은 위지성은 빈 잔에 술을 따르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안주도 없이 연거푸 다섯 잔을 비운 그는, 다시 여섯 번째 술잔을 채웠다.
‘왜, 왜 내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거지?’
장유유를 만나기 전만 해도 그녀가 자신을 받아들일 거라 자신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혼돈이었다.
장유유가 자신과의 만남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싫다고도 하지 않았다. 왜 강제로 데려왔냐며 따지지도 않았다.
무관심.
그랬다. 그녀는 자신을 마치 소가 닭 보듯 했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그녀는 담담히 그러냐는 식으로만 대답할 뿐이었다.
미칠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웃는 법이 없었다.
환한 웃음을 보고 싶거늘!
그는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목구멍에 털어 넣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동안에는 그 이유를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다.
하지만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오늘은 반드시 알아내고 말겠다!”
그는 자신을 채찍질하듯 말하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곧장 장유유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오늘은 이대로 넘어갈 수 없소. 어디 말해보시오. 내가 싫소?”
위지성은 다그치듯이 말하고 장유유를 빤히 쳐다보았다.
장유유는 평소 안 하던 행동을 하는 위지성의 눈을 한 점 흔들림 없이 마주 보았다.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겼다. 멀쩡한 정신으로는 말하기가 힘들어 술을 마신 듯했다.
“공자에 대해선 별 다른 감정이 없어요.”
위지성은 답답한 마음에 언성을 높여 물었다.
“그런데 왜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거요?”
장유유는 물끄러미 위지성을 바라보았다.
‘제왕성이 싫으니까요. 당신들이 우리 장원을 공격해서 사람들을 죽였잖아요! 우리 아버지가 다친 것도 다 당신들 때문이라고요!’
그렇게 쏘아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장가장이 위험해질지 모르는 것이다.
사실 더 답답한 사람은 위지성이 아니라 장유유였다.
그녀는 결국 말을 돌려서 위지성을 설득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할 게요. 저에겐 이미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 당신과는 혼인할 수가 없어요. 이해해주세요.”
사실이었다. 그러다 보니 말하는 도중에도 독고무령이 떠올라 아련한 눈빛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알고 있을까?
‘벙어리오빠, 보고 싶어요.’
위지성은 장유유의 눈빛을 보고는,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직감했다.
‘이, 이런……!’
장유유가 누군가의 여인이라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만일 알고 있었다면, 제왕성으로 데려오는 것을 반대했을 것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여자를 빼앗는 걸 싫어했다.
어머니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평생 가슴앓이를 하는 걸 옆에서 지켜본 것이다.
그로선 자신의 아내가 평생 가슴앓이 하는 걸 원치 않았다. 그건 행복이 아니라 아픔이었다.
“왜, 왜 그 말을 하지 않았소!”
장유유는 위지성의 반응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단지 화가 나서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여자라는 것 때문에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로 말하지 않았다는 것, 말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아니냐는 것처럼 들렸다.
그녀의 생각을 확신시켜주듯 위지성이 짜증내듯이 말했다.
“제길! 내가 미리 알았으면, 아예 데려오는 것도 반대했을 거요.”
“그럼…… 우리를 보내주실 수 있나요?”
그 말에는 위지성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의 주관과 장유유를 원하는 마음이 갈등을 일으켰다.
그가 툭 던지듯이 물었다.
“누구요?”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누구냐는 말.
독고무령의 이름을 밝힐 수는 없는 일. 그렇다고 거짓처럼 말하면 위지성이 이상하게 여길지 몰랐다.
장유유는 사실대로 말하되, 살짝 돌려서 대답했다. 이름을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제 오빠의 친구예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죠.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도 허락을 하셨어요.”
위지성은 잘게 떨리는 장유유의 눈빛 속에 그리움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녀의 눈빛 어디에도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구석이 없는 것이다.
문득 며칠 간 혼자서 애달았던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훗, 후후후, 아하하하하. 나 위지성이 완전히 바보가 되어버렸군.”
“미안해요, 위지 공자.”
“당신이 미안해할 일이 뭐 있소. 오히려 무턱대고 숭산에서 여기까지 데려온 우리가 잘못한 것이지.”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몸을 돌렸다.
위지성이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이생과 소설향이 방으로 들어왔다.
장이생은 방문과 창문 쪽을 둘러보고는 나직이 물었다.
“뭐라 하더냐?”
“다행히 강제로 혼인을 강행할 생각은 없나 봐요.”
반색한 장이생 부부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 휴우, 다행이구나.”
“그래도 독한 사람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다. 하아, 가슴이 조마조마했는데…….”
제왕성의 장로가 소림까지 찾아왔을 때, 함께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이생의 몸이 좋지 않아 갈 수 없다고 하는데도 그들은 절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럼 장유유만이라도 데려가겠다면서.
부모 된 입장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소림의 힘을 빌려서라도 그들의 뜻을 막아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장이생은 그 생각을 접어야만 했다.
저들의 뜻에 반한다는 것은 제왕성과 적이 되겠다는 말. 당장 장가장이 위험해질지 몰랐다.
또한 만에 하나, 장가장을 조사하다가 전에 벌어진 일을 알아채기라도 할 경우, 자신들은 제왕성이 무너지기 전까지 도망자 신세가 될 게 분명했다. 당연히 장가장은 끝장날 것이고.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그런 상황에서 장유유가 말했다.
일단 부딪친 다음에 기회를 보자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을 거라면서.
그런데 뜻밖에도 생각지도 못했던 위지성이 그들을 도와준다.
지난 며칠이 몇 년보다 길게 느껴졌던 두 사람의 얼굴이 오랜만에 펴졌다.
장유유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도하자, 위지성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조금 기다리면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때까지만 참으세요.”
그래도 걱정되는지 소설향의 말에서 염려가 한가득 묻어나왔다.
“우리야 참을 수 있다만……. 그 아이가 알면 어떤 일을 벌일지 그게 걱정이구나.”
“오빠는 냉정한 사람이에요.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그랬으면 좋으련만…….”
* * *
위지성이 장유유의 방에서 나설 즈음, 한 마리 전서응이 제왕성에 내려앉았다.
전서응의 다리에는 검은 전서통이 하나 달려 있었는데, 능효는 전서통 속의 전서를 보자마자 즉시 위지천백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반시진, 제왕성의 주요 간부들이 모두 제왕전에 모였다.
“드디어 북풍이 불기 시작했다. 제왕대전을 치름에 있어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준비를 완벽히 갖추어라!”
위지천백의 목소리가 제왕전을 뒤흔들었다.
달단이 남하하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이제 곧 산서북부가 전쟁의 위협 속에 긴장감이 맴돌 터였다.
시작할 때가 된 것이다.
천하를 거머쥘 때가!
제왕전에 모였던 모든 간부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허리를 숙였다.
“예, 성주!”
“명만 내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