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3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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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7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35화
235화
제1장 반가운 사람들
괴인들은 절벽을 등에 진 채 철저히 수비하며 은룡산장의 무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들 중 셋은 능히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듯 보였는데, 다섯이서 철저히 한 몸처럼 움직이며 적을 상대했다.
하지만 그들이 강한 만큼 은룡산장의 무사들도 강했다. 게다가 숫자가 세 배나 차이 났다.
보고 있는 중에도 괴인들은 연신 뒤로 물러나며 진세를 유지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나마 절벽이 뒤를 지켜준다는 게 그들에게는 다행이었다.
“저들을 구해야겠네, 사혁.”
“아는 자들인가?”
“포위하고 있는 놈들, 은룡산장 놈들이네.”
괴인들에 대한 것은 뒤로 미뤘다. 가까이 가서 확인한 다음에 말해줘도 늦지 않았다.
진사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은룡산장이라고?”
굳이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럼 당연히 구해야지!”
진사혁이 곤을 빼들고 달려갔다. 사공화정과 전유곤도 뒤따라 신형을 날렸다.
모용설은 독고무령이 움직인 다음에야 졸졸 따라갔다.
쉬익!
전유곤의 화살이 먼저 적을 향해 번개처럼 날아갔다.
진기가 실린 화살은 거의 일직선에 가깝게 이십 장을 날아가서 은룡산장 무사의 등에 깊숙이 틀어박혔다.
퍽!
“컥!”
느닷없이 등을 관통 당한 무사는 단말마를 터트리며 그대로 꼬꾸라졌다.
가슴으로 삐죽이 튀어나온 화살을 따라 분수처럼 뿜어지는 핏줄기.
그 옆에 있던 자가 홱 고개를 돌리더니, 십여 장 거리까지 접근한 진사혁 등을 보고 악을 쓰며 소리쳤다.
“조심해! 뒤에 적이 나타났다!”
고개를 돌린 적수천의 눈이 한껏 커졌다.
선두에 서서 달려오는 자. 덩치가 곰처럼 커다란 그는 분명 우현의 서쪽 계곡에서 봤던 자였다.
“광천곤(狂天棍) 진사혁!”
진사혁은 광천곤이 누구를 칭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적수천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대갈을 내지르며 곤을 휘둘렀다.
“우하하하! 맞다! 내가 진사혁이다, 이놈!”
괴인들을 상대하던 은룡산장의 무사 중 두 사람이 진사혁을 상대하기 위해 몸을 뺐다. 혈무단의 오대주 중 두 사람이었다.
“우리가 상대하겠소!”
그들이라면 진사혁을 당분간 막을 수 있을 터. 적수천은 그들에게 진사혁을 맡기고, 진사혁의 뒤를 바짝 따라오는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진사혁과 함께 있는 것으로 봐서, 다른 자들도 암천회의 고수들임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저만치 오연한 걸음걸이로 걸어오는 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
일순간, 적수천의 뇌리에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단신으로 검왕과 혈왕을 상대하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던 절대고수.
“아, 암천사신!”
적수천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은룡산장의 무사들은 적수천의 입에서 암천사신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벼락이 머리 위에 떨어진 듯 흠칫하며 괴인들을 향한 공격을 늦추었다.
다섯 명의 괴인은 그 틈을 이용해서 흐트러진 오행(五行)의 형태를 다시 갖추었다.
그 사이 진사혁은 혈무단의 대주 두 사람과 얽혀들고, 전유곤과 사공화정도 은룡산장의 무사들을 몰아붙였다.
절정고수들의 기운이 사방에서 부딪치며 수만 군사가 내지른 만큼이나 요란한 굉음이 계곡을 뒤흔들었다.
한편, 독고무령은 적수천이 자신을 알아보자 냉소를 지었다.
아직 자신이 암문의 주인 행세를 했던 사람이라는 것까지는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아마 그것까지 안다면, 싸우기 전에 머릿속에서 핏줄이 터질지도 몰랐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지. 내 손으로 은룡산장의 마지막을 장식하라는 운명…….”
독고무령은 적수천을 향해 다가가며 검을 뽑았다.
스르릉.
거리가 가까워지자 적수천의 안색이 급변했다.
괴인들만 해도 간단치가 않았다. 개개인이 자신의 수하들보다 강한 자들이었다. 숫자의 우세가 아니었다면 철저히 진세를 이룬 채 대항하는 그들을 몰아붙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 판에 암천사신이 네 명의 고수들을 데리고 합세했다.
그야말로 늑대를 상대하고 있는데 거대한 백호가 등 뒤에서 나타난 셈이다.
입술을 깨문 그가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전력을 다해서 이곳을 빠져나가라!”
암천사신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눈치만 보고 있던 은룡산장의 무사들은 명이 떨어지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땅을 박찼다.
그들이 도주하려 하자, 그동안 수세로 일관하던 괴인들이 일제히 그들을 공격했다.
“어딜 도망가려고!”
“네놈들이 갈 곳은 지옥뿐이다!”
적수천도 번개처럼 발도하며 독고무령을 향해 칼을 뻗었다.
“타앗!”
결판을 내기 위해 하는 공격이 아니었다. 전력을 다한 급습이라면 제아무리 암천사신이라도 멈칫할 수밖에 없을 터. 그 틈을 타 몸을 뺄 생각이었다. 상대의 힘을 역이용할 수 있으면 더 좋고.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판단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깨달아야만 했다.
쾅!
귀청이 먹먹한 굉음!
온몸이 터져버릴 것 같은 충격!
적수천은 이를 악물고 주춤주춤 물러섰다.
도를 통해 밀려든 기운이 발끝까지 치달리며 그의 모든 신경을 지배해버린 상태. 상대의 힘을 이용해 도주하기는커녕 서 있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비, 빌어먹을…….’
그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비틀거리자, 끝까지 그의 곁에 남아 있던 은룡산장의 무사들 중 두 사람이 독고무령을 향해 달려들었다.
“사사자!”
“저희가 맡을 테니 뒤로 물러나십시오!”
적수천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음에도 안간힘을 다해 소리쳤다.
“아, 안 돼!”
독고무령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두 사람을 향해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한 줄기 뇌전이 검신을 타고 죽 흐르는가 싶더니 검첨에 영롱한 구슬 하나가 매달렸다.
독고무령이 튕기듯이 검을 뻗은 순간, 달려들던 자들의 눈이 한껏 커졌다.
퍽!
엄지손톱만 한 구멍이 이마에 뚫리며 한 사람이 나가 떨어졌다.
동시에 완만한 호선을 그리며 흐른 독고무령의 검은 또 다른 자의 손아귀를 찢으며 칼을 튕겨냈다.
땅!
찰나, 독고무령의 좌수가 상대의 목을 움켜쥐었다.
목이 잡힌 자는 독고무령의 손이 뻗어오는 걸 보고도 피하지 못했다. 아니, 피할 수가 없었다.
일시지간 눈앞에 커다란 손만 보였다.
그와 함께 심장이 오그라드는 가공할 공포감이 밀려들었다.
피하면 온몸이 터져죽을 것 같은 기분!
암천사신의 일수는 가히 사신의 손짓이었다.
“자, 잠깐!”
적수천이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쳤다.
독고무령은 무심한 눈으로 적수천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지.”
손에 쥐어진 목을 부러뜨리는 게 더 급하다는 투다.
적수천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정을 했다.
“그 사람 하나 더 죽인다고 뭐가 달라지겠소. 손에 인정을 남겨 주시오!”
“그대들은 손에 인정을 남기고 손을 썼던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적수천은 벌게진 얼굴로 대꾸를 하지 못했다.
독고무령은 그런 적수천을 빤히 바라보고는, 손에 쥐어진 자를 저만치 던졌다. 어차피 마혈을 찍었으니 숨만 쉴 뿐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하긴 내가 그대들과 똑같이 할 필요는 없겠지.”
나직한 목소리로 몇 마디 내뱉은 독고무령은 적수천을 향해 돌아섰다.
눈이 마주친 순간, 적수천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어깨를 짓누르는 수만 근의 압력!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 정도의 먹먹함!
절대의 무형지기가 전신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핏줄이 툭툭 불거지도록 도를 움켜쥔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져버릴 것처럼 쿵쾅거렸다.
‘마, 맙소사! 이 정도였단 말인가!’
독고무령은 적수천을 무형지기로 묶어놓고 나직이 말했다.
“이제 이야기를 나눠볼까?”
그때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탕!
적수천이 도를 바닥에 던지고는 털썩, 무릎을 꿇은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행동. 독고무령이 눈을 좁히고 물었다.
“무슨 의미지?”
“패배를 인정하겠소.”
“무릎을 꿇었다고 해서 끝날 일이라 보는가?”
상대를 죽이기 위해 생사투가 벌어진 상황.
이긴 자는 살고, 지는 자는 죽는다. 그것이 현실이다.
적수천도 비참하게 삶을 구걸하다 죽고 싶지 않았다. 죽더라도 싸우다 죽고 싶었다. 더구나 상대가 암천사신이라면 죽어도 한이 남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가 귀원장에서 도주하고도 산서를 떠나지 못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죽이고 싶다면…… 죽이시오.”
죽음을 각오한 자가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이유로?
독고무령은 무심한 눈으로 적수천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지? 죽는 한이 있어도 무릎을 꿇을 자가 아니라 알고 있는데.”
“살 수만 있다면 살아야 하기 때문이오.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해야 할 일이라……. 은룡산장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적지 않지. 설령 살려준다고 해도 잘해야 종처럼 지내야 할 텐데, 그래도 괜찮단 말인가?”
입술을 질끈 깨문 적수천이 고개를 숙였다.
“살려만 준다면, 종이라도 되겠소.”
“죽지 않은 게 후회될 만큼 모욕을 당할지 모르는데도?”
“알고 있소.”
끈질기게 목숨을 구걸한다. 눈빛을 봐서는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왜 적수천이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걸까?
“일단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말해봐라. 정말 꼭 살아야만 할 이유가 있다면 생각해보지.”
적수천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독고무령은 은룡산장과 적대적인 관계. 과연 자신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달리는 말에 올라탄 상태.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는 잇새로 말했다.
“양부의 유해를 위지천백이 가져갔소. 그분의 유해를 찾아서 묻어주고 싶소.”
적수천의 말은 독고무령으로서도 뜻밖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살기 위해서 되도 않는 핑계를 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적수천의 눈을 직시한 독고무령은 그의 말이 진실임을 알아보았다.
만일 적수천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희대의 거짓말쟁이일 것이었다.
“의외군. 노태군이 양아들을 받아들인 것은 단지 자신의 인형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알고 있거늘.”
적수천이 왜 모를까?
그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당신의 말이 맞소. 하지만 그분의 마음이야 어떠하든, 나는 그분을 외면할 수가 없소. 아시오? 그분은 거리에서 다 죽어가던 거지 하나를 살려주셨소. 그리고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셨소. 그게 바로 나요! 나는…… 그분을 외면할 수 없소. 천하 모두가 그분을 증오하더라도, 나만은 그럴 수 없단 말이오! 부디 나를 살려주시오, 독고 회주! 나로 하여금 그분의 유해를 거둘 수 있게 해주시오! 그렇게만 해주면 당신의 발바닥이라도 핥겠소!”
쿵!
적수천은 할 말을 다하고는 머리를 땅에다 찧었다.
독고무령은 무심한 눈으로 적수천을 바라보았다.
가슴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치고 있었다.
-그놈을 살려줘라. 어차피 살려준다고 위협될 놈도 아니잖아?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적수천을 살려주라고 말하고 있었다.
양부의 유해를 찾기 위해서 치욕을 감수하는 적수천이 기꺼워 보인 듯했다.
‘나는 아버지의 유해도 찾지 못했지.’
독고무령은 씁쓸한 마음을 속으로 삼키고는, 저만치 서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괴인들을 돌아다보았다.
그들은 머리를 완전히 흐트러뜨린 상태여서 누군지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아마도 얼굴 여기저기에 난 화상자국을 감추기 위함인 듯했다.
독고무령은 그들 중 한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러고는 뜬금없는 말을 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보주? 괜찮으시다면 이자를 살려주고 싶습니다만.”
다섯 괴인 중 가운데 있던 자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독고무령이 자신을 알아본 것에 놀란 듯했다.
“많이 변했는데도 알아보는군.”
보주. 그랬다.
괴인은 행방이 묘연했던 구중철검 구양은, 바로 그였던 것이다.
독고무령이 그를 알아본 것은, 그가 펼친 검법 덕분이었다. 그나마도 철검원에서 그가 펼치는 검법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그때와 많이 달라진 구양은의 검을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철검보에서 뵈었을 때보다 더 강해지셔서 하마터면 보주님을 몰라볼 뻔했습니다.”
그제야 괴인이 구양은이라는 걸 안 진사혁 등이 놀라 소리쳤다.
“억! 구양 보주님?”
“살아계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구양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씁쓸한 어투로 말했다.
“하아, 다들 오랜만이네. 그래도 이렇게 살아있으니까 만나는군.”
간단하게 마주 인사를 건넨 그는 고개를 돌려서 적수천을 쳐다보았다.
태행산맥의 남쪽 줄기를 타고 올라오던 중 저들을 만났다.
처음에는 상대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저들 중 한 사람이 은룡산장을 들먹이지만 않았어도 어쩌면 그냥 지나쳤을지 몰랐다.
하지만 상대가 은룡산장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안 이상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싸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문제는 적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적을 죽이기는커녕 자신들이 밀렸다. 성급한 행동을 후회했을 때는 이미 구석으로 몰려서 빠져나가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때 독고무령 일행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제 상황이 거꾸로 되어서 자신들이 칼자루를 쥐게 되었다.
구양은은 상대가 은룡산장의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사지를 잘라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누른 것이 아닌 이상, 독고무령의 의견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적수천을 죽일 것처럼 노려보며 물었다.
“물을 테니 사실대로 말해라. 철검보를 칠 때 너도 있었느냐?”
적수천은 상대가 철검보주라는 걸 알고 절망에 찬 표정을 지었다.
독고무령과 구양은은 사정이 달랐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검을 주워들 수도 없는 일.
“아니오. 당시 나는 은룡산장에 있었고, 철검보를 친 것은 내 동생이었소. 나를 죽여 한이 풀린다면…… 죽이시오.”
그는 사실대로 말하고 목을 구양은에게 맡겼다.
구양은의 손에 들린 검이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