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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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7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33화
233화
그 말을 들은 독고무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놀랄 만한 일이긴 하나 큰 불만은 없었다. 골칫거리였던 노태군을 죽였으니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군의 통솔까지 맡기자고 주장했지. 북쪽 달단(韃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그에게 군의 통솔을 맡기면 빠르게 대처할 수 있을 거라며 말이야.”
독고무령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림왕의 칭호를 내리는 것과 군을 통솔하는 것은 문제가 달랐다.
“뭐라 답하셨습니까?”
“지나친 일이니 안 된다고 했다. 그랬더니 폐하를 알현한 모양이야.”
“그럼……?”
“달단의 잔당들이 들썩이고 있다는 말에 폐하께서 허락하셨다.”
맙소사!
군통솔권까지 주어졌다면 제왕성을 무너뜨리기가 더욱더 어려워진다.
그가 급히 물었다.
“령은 내려졌습니까?”
“사흘 전, 폐하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정식으로 칙령을 문건으로 작성해서 산서로 보냈다. 사실 그 일 때문에 그대와의 만남을 더 서두른 것이지.”
빌어먹을 일이다.
왕의 칭호만 받아도 문제가 적지 않거늘, 군통솔권마저 주어지다니.
‘위지천백! 결국 그걸 노린 것이었더냐?’
사흘 전이라면 자신이 태원을 떠나던 날이다. 지금쯤 칙령이 전해졌을 터. 마음이 다급해졌다.
독고무령이 굳은 목소리로 주양에게 물었다.
“위지천백의 군통솔권을 회수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둘째숙부가 건재한 이상은 쉽지 않을 거다.”
“이왕을 보호하고 있는 자들을 제가 처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왕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틈을 타 폐하를 설득하신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차라리 죽이는 게 빠르다. 그러나 태자 앞에서 숙부인 이왕을 죽인다는 말을 했다가는 역반응만 나올지도 모르는 일.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태자가 먼저 말한다면 몰라도.
주양은 잠시 독고무령의 말을 생각해 보았다.
조정대신들 중 반수 이상이 이왕의 편에 서 있다.
반면 자신의 편에 선 자들은 소수일 뿐이다. 불과 며칠 사이에 상황이 거꾸로 된 것이다.
하지만 이왕을 무장 해제시키면,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 또한 그리 어렵지 않을 듯했다.
다만 이왕을 누르려면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둘째숙부 주위에 있는 무사들은 강하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가능하겠느냐?”
“저희 역시 강합니다.”
“동창의 최고 정예 열셋을 소리 없이 처치할 정도의 엄청난 자가 있다. 동방 도독 곁에 있는 강호무사가 강한 것은 안다만, 그들조차 그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을 거다. 그래도 자신 있는가?”
“저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주양은 뜻밖이라는 눈으로 독고무령을 쳐다보았다.
“으음, 그게 사실인가?”
독고무령은 말없이 자신의 찻잔을 검지로 가리켰다.
순간이었다.
파스스스…….
자기로 된 찻잔이 가루가 되어 주저앉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주양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가루로 변해버린 찻잔을 주시했다.
“허어…….”
“어차피 삼왕을 죽인 범인과 열세 명의 동창고수를 죽인 자는 이왕과 한통속입니다. 사실 지금 상황에서는 증거가 굳이 필요 없다고 봅니다. 진짜 필요한 것은, 힘이지요. 누가 강하냐, 그걸로 옳고 그름이 결정될 것입니다.”
주양은 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그동안 자신의 모든 힘을 동원해 저들을 누르려 해도 증거가 없어 속이 탔다.
그런데 증거가 필요 없다고 한다.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서.
간단했다. 물론 모든 걸 잠재울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
“좋아. 그대가 그 일을 완수한다면, 둘째숙부와 조정의 대신들은 내가 책임지겠다.”
주양은 단호하게 말하고는, 조금 전보다 훨씬 밝아진 표정으로 독고무령에 물었다.
“강호에서는 별호라는 게 있다고 들었다. 강호에서 그대를 뭐라 부르는가?”
“암천사신이라 부릅니다.”
“호오, 암천의 사신이라……. 멋은 있는데, 너무 살기가 짙은 별호군. 그대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아. 격랑이 지나고 물결이 잔잔해지면, 나, 주양의 이름으로 멋진 별호를 하나 지어주지.”
* * *
안개가 자욱한 새벽녘.
독고무령은 전무호의 안내를 받아 일행과 함께 이왕의 거처로 접근했다. 금의위로 변복한 터라 누구도 그들이 이왕의 거처에 접근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더구나 동방명이 미리 손을 써놓아서 근처에는 어림군도 보이지 않았다.
독고무령은 일행에게 밖을 맡기고, 혼자서 안으로 스며들었다. 금의위의 복장을 벗고서.
이왕의 거처에 잠복해 있는 호위무사는 모두 열둘.
모두 절정에 근접하거나, 절정에 도달한 고수들이었지만, 독고무령의 살수를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독고무령은 그들을 하나하나 소리 없이 잠재웠다.
때로는 허공을 격한 채 사혈을 짚기도 하고, 때로는 벽을 격한 채 상대의 심맥을 끊어버렸다.
하나, 둘, 곳곳에 은잠해 있던 자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죽어갔다.
누군가가 상황을 눈치 챈 것은, 열둘 중 아홉이 숨을 멈춘 직후였다.
방문이 소리 없이 열리더니, 고저 없는 차가운 목소리가 밤공기를 흔들었다.
“모두 주위를 살펴봐라. 몇 사람의 생기가 사라졌다.”
독고무령은 그와 동시에 또 한 사람의 심맥을 끊어놓고는, 전각을 빠져나와서 지붕 위로 올라갔다.
순간, 방에서 나온 청의인이 허공으로 솟구치며 쌍장을 휘둘렀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장력이 쐐기처럼 휘돌며 밀려들었다.
독고무령은 느낌만으로도 상대의 무위가 절대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느끼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런 자가 황궁에 있었다니!’
독고무령은 소란을 피하기 위해서 암향호접무를 펼치며 상대의 장력을 피했다.
미처 파악하지 못한 자였다. 기운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절대의 경지에 이른 고수라는 말.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저러한 고수가 이왕의 곁에 있었을 줄이야!
‘누구지?’
그때 살아남은 두 명의 무사가 지붕 위로 올라와 독고무령을 쫓아왔다.
찰나 독고무령의 모습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두 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조심해라!”
청의인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그의 외침이 밤하늘에 울려 퍼짐과 동시, 두 줄기 벼락이 추적자들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헉!”
“컥!”
독고무령은 단숨에 두 사람을 죽이고는, 지붕 맞은편에 내려선 청의인을 바라보았다.
그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불과했다.
청의인은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수하들이 비명 한번 내지르지 못하고 모두 죽다니.
살수가 절대의 경지에 이른 고수가 아니고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독고무령을 노려보았다.
“네놈은 누구냐?”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닌 것 같군.”
“하긴.”
일단 죽이고 볼 일이다. 정체를 아는 것은 나중에 차근차근 조사해도 되었다.
청의인은 스윽, 걸음을 내딛었다.
순간 그의 모습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독고무령은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고 뒤로 스르르 물러났다.
자신 못잖게 고절한 신법. 좌우에서 밀려드는 칼날 같은 기운. 역시 짐작했던 대로 절대경지의 고수였다.
쉬익!
그가 서 있던 자리를 한 줄기 바람이 훑고 지나가는가 싶더니, 지붕의 기와가 칼로 무를 자른 것처럼 반듯하게 잘려나갔다.
동시에 독고무령의 두 손이 엇갈리며 허공을 향해 뻗었다.
귀혼낙의 일수가 삼 장을 격한 채 어둠의 한곳을 꿰뚫었다.
“헛!”
어둠 속에서 짧은 경악성이 새어나왔다.
떵!
단발의 둔중한 소리가 울리고, 어둠 속에 은신했던 청의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독고무령은 무심한 눈빛으로 청의인을 보며 검을 뽑았다.
청의인은 너무도 태연한 독고무령의 행동에 은근히 오기가 치밀었다.
지난 십여 년, 산서제일의 신비인으로 불리며 천하를 조롱한 그가 아닌가. 그런데 오늘은 거꾸로 일개 살수에게 조롱당한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나로 하여금 무기를 뽑게 하는 놈을 만났군.”
청의인이 나직이 말하며 품속에서 반월처럼 휘어진 도를 꺼내들었다.
도신은 기껏해야 한 자 반 정도였는데, 도신을 타고 흐르는 영롱한 붉은빛만 봐도 예사 도가 아님을 짐작케 했다.
독고무령은 검을 사선으로 들어 올리며 나직이 말했다.
“위지천백의 개에게 사정을 봐줄 생각은 없소. 그러니 최선을 다하도록.”
청의인의 두 눈에서 싸늘한 한광이 쏟아졌다.
찰나였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검과 도에서 뻗어 나온 강기가 얽혀든 순간!
어둠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안개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의외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어쩌면 소리가 나지 않아서 더 살벌하게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지붕의 기왓장이 깎여나가며 먼지구름처럼 퍼져 가는데 소리는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뒤로 삼 장씩 물러났다.
물러난 거리는 비슷했지만, 표정은 확연히 차이가 났다.
독고무령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인 반면, 청의인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이를 악문 청의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천하에 너 같은 놈이 있었다니…….”
“나 역시 의문이오. 그대 정도의 사람이 위지천백 아래에 있다니.”
청의인은 독고무령이 위지천백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네놈은 혹시 독고무령이라는 놈이 아니더냐?”
“알면 되었소.”
독고무령은 짧게 말하고 검을 들어 청의인을 가리켰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곧 사람들이 몰려올 터. 그 전에 싸움을 끝내야 했다.
그때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청의인이 뒤로 죽 물러나더니 허공으로 몸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절대고수인 그가 이왕을 버려두고 도주할 거라 생각 못했던 독고무령은 한 발 늦게 몸을 날렸다.
바로 그때, 한 줄기 전음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오늘은 패배를 인정한다만, 다음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밀천의 하늘은 두 번의 패배를 용납지 않으니까. 다음에 보자, 암천사신!>
독고무령은 어스름 속으로 사라진 청의인을 쫓지 않았다.
그의 신법은 자신 못지않아서 쫓는다 해도 잡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어쨌든 목적을 달성한 상황. 이제는 뒷일을 처리하는 것이 더 급했다.
독고무령이 이왕의 거처를 빠져나오자 일행들이 다가왔다.
“회주,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이걸 입으세요.”
독고무령은 모용설이 내민 금의위의 옷을 걸치고 관모(官帽)를 썼다.
“가지.”
관모 때문에 곰보다 더 커 보이는 진사혁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회주, 지붕 위에서 싸운 사람은 누구지? 겁나게 강한 것 같던데.”
독고무령은 청의인이 한 말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밀천의 하늘이라는 말을 하더군.”
관조운과 사공화정, 한무종이 동시에 ‘억!’소리를 냈다.
“밀천객?”
천하에서 밀천의 하늘이라 지칭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 산서제일신비인 밀천객뿐이었다.
* * *
관제산의 하늘로 날아오른 이십여 마리의 전서구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위지천백은 제왕전의 창문을 통해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때가 되었군!”
그가 만인을 짓누를 기세를 품은 채 돌아서자, 위지성과 등후양, 영호진광을 비롯한 제왕성의 모든 간부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경하드리옵니다, 아버님!”
“경하드리옵니다, 형님!”
“경하드리옵니다, 성주!”
“무림왕 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제왕전이 그들의 외침에 뒤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