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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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9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32화
232화
손님은 정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선 운양은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손님이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데, 갑자기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보이는 것은 오직 미인의 얼굴뿐.
“하, 하, 하, 운양이라 합니다. 저희 풍운장을 찾아오신 걸 환영하는 바입니다.”
그의 얼굴이 초운보다 더 벌게졌다. 본인은 알지도 못했지만.
“저는 유하령이라고 해요.”
역시!
‘목소리도 기가 막히게 예쁘군!’
운양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최대한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개봉 제일의 기루인 추월루의 주인께서 이곳에 오시다니, 하, 하, 영광입니다.”
“호호호, 별 말씀을. 그런데 회주께선 지금 안 계시나 보죠?”
“회주께선 잠시 출타중이십니다. 먼 길을 오셔서 힘드실 텐데, 일단 앉으시지요.”
‘그리고 오래 이야기 나눠봅시다. 흐으…….’
유하령은 조용히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고마워요.”
그 웃음을 본 순간, 운양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오오! 완전 내 이상형이야!’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저런 미인이 내가 사는 세상에 있었다니!
맞은편에 앉은 운양의 눈빛이 몽롱하게 풀렸다.
‘나에게도 이런 미인과 마주 앉는 날이 있을 줄이야! 꿈이면 깨지 말기를!’
하지만 그의 꿈은 길게 가지 못했다.
“오빠! 손님이 오셨다며? 굉장한 미인이라던데.”
진소영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운양은 천국에서 나락으로 곧장 떨어졌다.
‘저, 저게 하필이면……!’
당연히 진소영은 운양의 마음을 눈곱만큼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운양을 향해 씽긋 웃고는 추월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진소영이라고 해요.”
“유하령이에요.”
“저는 운양 오빠와 그렇고 그런 사이죠.”
“소영아!”
운양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물론 진소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오빠? 사실이잖아. 어릴 때 함께 목욕도 하고 그랬는데 뭐.”
“그, 그건 다섯 살 때 이야기잖아!”
진소영은 들은 척도 않고 유하령에게 말했다.
“오빠가 원래 좀 순진해요. 그런데 무슨 일로 개봉에서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유하령은 진심으로 웃음이 나왔다.
홀로 개봉제일의 주루인 추월루를 일으킨 그녀다. 진소영의 마음을 왜 모를까?
보기가 좋았다. 자신도 저런 날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을 정도로.
“회주를 만나러 왔어요. 약속이 되어 있거든요.”
운양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그러셨군요. 하필 유 낭자께서 오시는 날에 맞춰 출타를 하시다니, 회주님도 참…….”
물론 속으로는 조금도 안타깝지 않았다.
독고무령이 없는 동안 자신이 상대해주면 될 테니까.
유하령도 아쉽다는 듯 가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호오, 그러셨군요. 그럼 언제나 오시죠?”
“적어도 사오 일은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동안 마음 편히 쉬시지요. 하하하, 태원에는 구경거리가 많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그대로 놔둘 진소영이 아니었다.
“오빠, 태원을 구경시켜드리는 일은 제가 할게요. 오빠는 바쁘잖아요.”
“그, 그래?”
‘저게!’
운양이 가자미눈으로 진소영을 노려보았다.
그래봐야 진소영은 눈썹 하나 끄떡하지 않았다.
‘흥! 어디서 나를 놔두고 엉큼한 생각을 해?’
유하령도 운양보다는 진소영이 편해 보였다. 여자끼리 이야기하다 보면 더 많은 것을 알 수도 있을 것이고.
“호호호, 그럼 부탁해요, 진 아가씨. 아, 그리고 오늘 오후부터 이삼 일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올 거예요. 운 공자, 그분들의 거처도 좀 부탁해요.”
어쨌든, 하남의 삼대미녀 중 한 사람인 추월 유하령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운양이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유 낭자! 하, 하, 하!”
제10장 태자를 만나다
바람 한 점 없는 북경의 무더위는 산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여름이 거의 다 지나갔는데도 모닥불 위의 솥 속에 빠진 기분이 들 정도였다.
석양이 지기 직전, 일행과 함께 남문을 통과한 독고무령은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린 후 전무호를 찾아갔다.
마음은 백화명에게 있었지만, 지금은 그곳을 찾아갈 수가 없었다.
전과 달리 자신은 드러난 상태. 만에 하나 백화명이 위험에 빠질지 모르는 일은 삼가야 했다.
전무호는 독고무령이 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밀호방의 정보원이 미리 전갈을 한 것이다.
그는 독고무령 일행을 깊숙한 후원으로 안내했다.
독고무령은 전무호의 집 일대에 적지 않은 무사들이 잠복해 있음을 알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다섯 이상이다. 그것도 능히 고수라 불릴 수 있는 자들이.’
결코 전무호를 위한 무사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신 외에 누군가가 와 있다는 말.
아니나 다를까, 후원에 도착하자 한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독고무령은 자신의 일행들에게도 주위를 경계하게 하고 선객(先客)을 향해 다가갔다.
“어서 오게나.”
선객, 동방명이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반겼다.
그가 황궁을 나와 전무호의 집에 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독고무령은 표정이 굳어졌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별로 안녕하지 못했네.”
그 또한 의외의 답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는 게 있기에 독고무령은 가볍게 받아쳤다.
“누가 감히 금의위 도독 어른을 곤란케 했는지 모르겠군요.”
“일단 앉게. 말해줄 테니.”
독고무령이 자리에 앉자 동방명이 입을 열었다.
“본래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되는데, 자네가 온다고 해서 나왔다네.”
반가워서 마중 나왔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래야 할 만큼 일이 긴박하게 흐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은룡산장을 치면서 피해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로 인한 추궁은 없었습니까?”
“험, 피해가 많긴 했지만, 동창도 위세가 꺾였는데 누가 우리를 뭐라 하겠나?”
금의위의 피해는 그래도 덜했다. 독고무령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적을 섬멸하는 것보다 은룡산장을 붕괴시키는 일에 주력했으니까.
하지만 도찰원과 제왕성의 피해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전체 피해 인원인 칠백 중 오백이 그들일 정도로.
그 바람에 도찰원은 동창을 누르는데 한몫하고도 큰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수백 명의 목숨도 권력만은 못한 모양이군.’
독고무령은 쓴웃음을 지으며 질문을 돌렸다.
“삼왕께서 돌아가셨다 들었습니다. 범인은 알아내셨습니까?”
동방명의 눈빛이 찰나 간에 반짝였다.
“남들은 다 자결이라 하는데, 자넨 그리 생각하지 않나 보군.”
“권력을 지닌 사람들은 쉽게 자결을 하지 않지요. 더구나 탐욕까지 지녔다면 더욱 그러할 테고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 각설하고, 나 역시 그리 생각한다네. 다만 범인에 대한 것은커녕 그가 타살되었다는 증거조차 잡아내지 못해서 답답할 뿐이지.”
“범인은 몰라도, 범인을 사주한 자는 죽은 사람 가까운 곳에 있을 겁니다. 그의 죽음으로 가장 이득을 볼 수 있는 사람 말이지요.”
“증거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네.”
사주한 자가 누군지는 안다는 말. 하긴 그가 누군지 짐작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문제는 증거였다.
독고무령은 일단 그 이야기를 뒤로 미루고 다시 물었다.
“그 일 때문에 직접 이곳까지 오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말씀해 보시지요.”
“놈이 태자 저하까지 위협했네.”
“태자 저하를?”
“노태군이 태자 저하를 압박해서 군을 움직이려 했던 모양이네. 한데 놈이 어떻게 알았는지, 태자 저하를 협박해서 군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고 하더군.”
제왕성은 그 덕에 귀원장을 쉽게 공략하고 은룡산장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 모든 일이 위지천백의 계획에 따른 흐름일 가능성이 컸다. 아니, 분명 그런 듯했다.
“금의위에선 어떻게 대처하실 생각이십니까?”
동방명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돌려서 답했다.
“태자 저하께서 극비리에 나를 불러 모든 것을 말씀해 주셨네.”
“원하시는 것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만.”
동방명은 독고무령의 질문이 떨어지자, 숨을 깊게 들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흙탕물이 된 황궁을 정화시켜 주시길 바라시더군.”
“도독께서 직접 여기까지 나오신 걸 보니, 그 일과 연관해서 저에게 바라는 게 있으실 거 같은데요.”
당연히 그래서 나왔다.
동방명이 독고무령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미리 짐작해서 말해주니 말하기가 한결 편했다.
“그 일을 자네가 맡아주었으면 하네.”
“강호의 일개 무부가 황궁의 사건에 끼어들면 일이 커질지 모르는데도 말입니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네. 일단 태자 저하를 만나보게나.”
태자와 암천사신 독고무령과의 극비 만남.
그것이 바로 그가 직접 나온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 * *
그날 밤 해시가 넘어갈 무렵.
독고무령은 일행과 함께 전무호를 따라 황궁으로 들어갔다. 금의위 복장으로 갈아입었기에 수상하게 보는 자는 없었다.
그러고는 순찰을 도는 자들을 쉬게 하고, 그들이 마치 순찰위사인 것처럼 태자궁에 접근했다.
동창의 위세가 무너진 이상 누구도 금의위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했다.
태자궁 안으로는 독고무령 혼자 들어갔다.
기다렸다는 듯 환관 하나가 어둠속에서 나오더니 그를 안내했다.
뜻밖에도 환관이 안내한 곳은 정실이 아닌 지하밀실이었다.
지하밀실은 그리 넓지 않았지만, 밀담을 나누기에는 더 없는 장소였다.
그가 밀실로 들어간 지 반각가량이 지나자, 한 사람이 반대편 통로에서 내려왔다.
서른쯤 되어 보이는 나이. 몸은 연약해 보이지만, 눈빛만큼은 별똥별처럼 살아 있었다. 태자 주양이었다.
“동방 도독이 추천한 사람이 그대인가?”
“독고무령이 태자 저하를 알현하옵니다.”
지나치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은 독고무령의 인사에 주양은 눈을 반짝였다.
이 나라의 태자를 대면하고 눈빛 한 점 흔들림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생각보다 젊군.”
“젊다는 것과 능력은 사실 별 상관이 없지요.”
“의외여서 말한 것뿐이니 기분 나빠할 것은 없다. 일단 앉지.”
주양은 손을 저으며 독고무령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독고무령이 앉기를 기다려 질문을 던졌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들었겠지?”
“들었습니다.”
“할 수 있겠느냐?”
조금은 못미더운 표정이다. 하긴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이상은.
“저에 대해 얼마나 아시는지요?”
주양은 독고무령이 산서 강호에서 어떤 위치인지 알지 못했다. 위지천백이란 이름조차 최근 들어 아는 터였다.
“도독은 그대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군.”
“그 말만으로 저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그 말이 왠지 처연하게 들렸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믿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는 말투.
독고무령은 더 이상 말을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믿고자 하셨으면 무조건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실 수 있겠습니까?”
여기까지 온 이상 되돌아갈 길도 없다. 일단은 동방명을 믿듯이 독고무령도 믿는 수밖에.
그렇게 생각한 주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지.”
독고무령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믿음에 대해 왈가왈부해봐야 시간만 아까울 뿐이다.
“먼저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왕께서 태자 저하께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요?”
주양의 가늘고 긴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며칠 전의 일을 떠올리고는 짜증내듯이 말했다.
“산서의 무인인 위지천백에게 왕의 칭호를 하사하자고 하시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