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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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3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31화
231화
제9장 개봉에서 온 손님
쏴아아아!
장대비가 한 시진째 쉬지도 않고 쏟아진다.
먹구름을 하얗게 찢어발기며 떨어지는 번갯불에 온 세상이 창백하게 질린 표정을 짓는다.
하늘이 여름을 보내기 싫어서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만 같다.
‘무더위가 지난 후에 움직이겠다는 건가?’
독고무령은 풍운전의 이 층 전각에 서서 심해의 어둠보다 더 깊은 눈빛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제왕성에 다녀온 지 열흘이 지났는데도, 제왕성은 피곤에 지쳐서 깊은 잠에 빠진 사람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은룡산장이 무너진 지 어느덧 보름이 넘었거늘.
그렇다고 암천회가 제왕성을 치기에는 아직 힘이 완벽하지 않다.
‘천룡방이 어느 정도 힘을 보탤지가 관건인가?’
급하게 서두를 건 없다.
산서의 강호인들은 자파의 무사들을 화살받이로 내세운 제왕성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들과의 협상이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고, 그들 역시 제왕성보다는 암천회에 호감을 표시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제왕성과의 격차는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결정은 그때 가서 해도 충분하다.
정작 문제는, 위지천백과 황궁과의 일이다.
노태릉에게서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은 들었다.
금의위, 도찰원과 손을 잡은 것은 단순히 동창과 은룡산장을 상대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또한 이왕을 끌어들인 것도 목적이 따로 있었다.
전횡을 일삼는 동창을 약화시킨 후 태자마저 고립시킨다면 이왕이 황제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이왕의 입장에서 위지천백에게 무엇인들 못해주겠는가.
위지천백은 오래 전에 잊힌 무림왕의 칭호를 원한다 했다.
그가 무림왕이 된다면, 산서는 완벽히 제왕성의 천하가 된다. 황궁에서 왕의 칭호를 내린 이상 강호의 그 어떤 세력도 제왕성을 넘보지 못할 테니까.
어쩌면 암천회 역시 제왕성에 항거하려는 계획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 대역죄인이 되고 싶지 않다면.
그걸 노리는 걸까? 손 하나 까딱 않고 암천회를, 산서 무림을 발아래 두게 될 날을?
글쎄다.
그것은 자신이 아는 위지천백답지 않다. 그는 패왕.
‘무림왕’만으로는 욕심이 채워지지 않을 자다.
노태릉조차 아직 그의 진정한 욕망을 모르는 건가?
‘북경에서 소식이 오면 뭐든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겠지.’
북경을 떠올리자 백부인 백화명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을 떠나보내며 눈물을 글썽거리던 백모의 얼굴도.
‘잘 계시는지 모르겠군.’
그때 문이 열리더니 운양이 들어왔다. 왠지 굳은 표정이었다.
“회주, 북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마침내 기다리던 소식이 왔다.
독고무령은 번갯불로 인해 하얗게 타오르는 태원성을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그가 의자에 앉자 운양이 말했다.
“삼왕의 죽음이 공표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자살이라고 알려졌습니다만, 석연치 않은 점이 많습니다. 그리고 태자가 병중을 핑계로 일체의 활동을 접었다 합니다.”
“그럼 이왕이 모든 권력을 쥐었겠군.”
“현재로써는 그렇습니다. 더구나 금의위와 도찰원은 물론이고, 몰락한 동창마저 그의 눈치를 보는 판이라서 누구도 그에게 대적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합니다.”
“금의위는 어떻게 할 거라 하던가?”
“일단은 지켜볼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회주가 염려하신 대로, 황궁에서 위지천백에게 무림왕의 지위를 하사하려나 봅니다.”
‘역시.’
운양이 말을 이었다.
“이대로 있으면 손도 못써보고 제왕성에 굴복당하는 것이 아닌지 염려스럽습니다, 회주.”
독고무령은 무심한 눈으로 운양을 직시했다.
“운양, 내가 아는 한, 위지천백은 무림왕에 만족할 자가 아니다. 만약 거기에 만족할 자였다면, 그 전에 암천회를 힘으로 짓눌러서 보다 더 완벽하게 산서의 절대자가 되려 했을 거야.”
“그럼, 회주님 생각은……?”
“그가 그답지 않게 힘을 아끼고 있다는 것. 나는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 분명 우리들이 모르는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어. 그걸 알아야 돼.”
운양의 얼굴이 굳어졌다.
독고무령의 말을 듣다 보니, 등줄기를 타고 송충이가 스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밀호방의 모든 인원을 동원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산서는 물론이고, 산서 외부까지 최대한 정보망을 넓혀서 알아보게.”
독고무령은 말하는 와중에 품속에서 전표를 하나 꺼내 운양에게 내밀었다.
“경비가 얼마가 들던, 최대한 빨리 알아봐야 할 거네.”
운양의 눈이 한껏 커졌다.
‘오, 오만 냥!’
굳었던 표정이 단박에 펴지고,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돈은 귀신도 부린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제가 확실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틈을 타서 독고무령이 넌지시 말했다.
“자네가 정보를 모으는 동안 북경에 다녀와야겠네.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분명 황궁과 위지천백 사이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직접 가보지 않고는 겉만 맴돌 것 같네. 오래는 걸리지 않을 거야.”
상황으로 봐서 위지천백이 당장 움직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 전에 황궁의 일을 확실하게 파악할 생각이었다. 운이 좋아 황궁과 위지천백 사이의 고리를 끊을 수만 있다면, 의외의 성과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운양은 웬일로 별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저 전표를 곱게 접어서 품속에 넣었을 뿐. 가슴이 든든했다.
“그렇게 하시죠.”
독고무령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방을 나섰다.
장소천의 거처에 도착할 즈음에는 빗발이 거짓말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그때 언뜻 한 사람이 등을 보이며 길게 뻗은 전각을 돌아가는 게 보였다.
처음 보는 중노인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본회에 새로 들어온 사람인가?’
매일같이 십여 명의 새로운 사람이 암천회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는 상황이었다. 얼굴조차 보지 못한 사람이 본 사람보다 훨씬 많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의 노인도 새로 들어온 사람 중 하나인 듯했다.
‘누군지 모르지만 상당한 공력을 지니고 있군.’
강자가 많이 모인다는 것은 그만큼 암천회가 강해지고 있다는 말. 만족한 독고무령은 하늘을 슬쩍 한번 쳐다보고 장소천의 방으로 향했다.
소한은 건물을 완전히 벗어난 후에야 걸음을 멈추었다.
‘후우, 하마터면 마주칠 뻔했군.’
긴장이 풀리자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숨바꼭질을 하는 기분.
어차피 단시일에 어떤 일을 벌일 생각이 없는 만큼, 옆에서 암천회와 제왕성의 싸움을 구경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물론 가장 큰 관심은 장소천의 변화였지만.
‘혈왕의 기운을 완벽히 몰아내는 놈이 있을 줄이야.’
독고무령은 그에게 있어서, 전설의 혈왕릉(血王陵)을 발견한 이후 또 하나의 경이였다.
독고무령이 어디까지 오를까? 장소천은 어떻게 변화할까?
은근히 궁금해졌다.
‘위지천백이 꽤나 골머리가 아프겠군. 크크크…….’
그것을 지켜보는 재미 역시 쏠쏠할 듯했다.
소한은 입꼬리에 조소를 매단 채 객방 쪽으로 향했다.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눈빛이 최근 들어 많이 달라졌다는 걸. 복수에 한 맺혀 온기 하나 없던 눈빛에 미미한 열기가 서려 있다는 걸.
독고무령은 방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장소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왔느냐?”
안으로 들어가자 막위지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장소천은 무아지경에 빠져 운기를 하는 중이었다.
“좀 어떻습니까?”
“많이 좋아졌다. 며칠만 더 하면 막힌 혈맥을 모두 뚫을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히 몸만 좋아진 것이 아니라 공력도 빠르게 되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 이면에는 오로의 힘이 컸다. 치선의 선단도 적잖은 보탬이 되었고.
오로에게는 독고무령이 부탁했다.
장소천을 완치시키기 위해선 거의 바닥난 선천진기부터 되살려야 했다. 그가 닷새 간 내력을 쏟아 부은 것도 미약한 선천진기에 불을 당기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겨우 살려놓은 선천진기를 강하게 하려면, 누군가가 끊임없이 내력을 집어넣어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초절정 이상의 고수가.
오로는 두 말 없이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열흘. 장소천의 선천진기는 반 이상이 복구된 상태였다.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그보다 이 아이를 우리의 공동제자로 삼기로 했다.”
“공동제자로요?”
“죽을 때 가지고 갈 수도 없고, 누구에게든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
오로는 아직 장소천이 혈왕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걸 아는 사람은 제왕성의 무사들과 싸울 때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운양뿐.
삼괴조차 어디서 많이 본 놈 같다고만 할 뿐, 정작 장소천이 혈왕 본인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소천이가 누구든,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무슨 말이냐?”
정말 제자로 삼으려 한다면, 적어도 장소천이 전에 혈왕이었던 것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이었다. 설령 제자로 삼으려는 생각을 취소한다고 해도.
결정을 내린 독고무령은 장소천이 누군지,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막위지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는 독고무령의 이야기가 다 끝나자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장소천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믿을 수 없을 만큼 괴이한 일을 겪은 아이로구나. 너무 염려 마라. 혈왕의 정신이 완전히 사라진 이상, 이 아이는 우리에게 그저 장소천일 뿐이니까.”
독고무령은 장소천을 막위지에게 맡기고 방을 나왔다.
이제는 오로가 장소천을 돌봐줄 것이었다. 제자처럼.
정말 잘된 일이었다. 장소천이 오로의 제자로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장이생 부부와 장유유의 얼굴도 한결 밝아지지 않겠는가.
곧장 자신의 방으로 간 독고무령은 몇 사람을 불렀다.
일전의 북경행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여차하면 제왕성에서 심어놓은 자들과 충돌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자신의 손발처럼 움직일 사람들이 필요했다. 최소한 절정 이상의 고수들로.
그가 부른 지 일각이 되지 않아서 여섯 사람이 차례차례 방으로 들어왔다. 진사혁과 한무종, 관조운, 전유곤, 사공화정 그리고 모용설까지.
본래 그가 부른 사람은 다섯이었다.
그런데 모용설은 부르지 않았는데도 들어왔다.
독고무령이 북경에 간다는 것을 귀신 같이 알고 따라온 것이다.
그녀는 독고무령이 쳐다보자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북경에 가서 외숙부를 만나볼 생각이에요.”
물론 그게 이유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독고무령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모용설이 따라가는 게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대신 독자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 점을 명심하도록.”
“걱정 말아요. 회주님과 찰싹 붙어 다닐 생각이니까요.”
뜻이 묘한 말이었다. 말하는 표정이나 말투도 그렇고.
사람들은 듣지 못한 척 눈도 돌리지 않았다.
이미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사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독고무령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 * *
독고무령이 북경으로 떠난 다음 날. 사두마차 한 대가 십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태원에 들어섰다.
꾸밈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깨끗하고 고풍스러워서 범상치 않아 보이는 마차였다.
사두마차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대로를 가로지르더니 풍운장 앞에서 멈추었다.
마차가 멈추자, 호위무사들을 이끄는 듯한 중년인이 고개를 숙이고 마차에 대고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루주.”
마차 안에서 옥구슬 굴러가는 청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고했어요, 막 총관.”
“다른 분들도 곧 도착할 테니 먼저 들어가시지요.”
운양은 손님이 왔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누군데?”
초운이 벌게진 얼굴로 대답했다.
“개봉에서 왔다고 합니다.”
“개봉?”
운양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초운을 바라보았다.
호흡이 거칠고 얼굴이 붉다. 평소의 초운은 온데간데없고 사춘기 소년만이 앞에 있었다.
‘이놈이 왜 저러지?’
그때 초운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굉장한 미인입니다, 대형.”
미인이라는 말에 운양의 엉덩이가 저절로 의자에서 떨어졌다.
개봉, 미인!
문득 개봉의 추월루가 떠올랐다.
‘혹시……?’
“그래? 험, 그럼 만나봐야지. 미인을 오래 기다리게 하면 벌 받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