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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제 229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500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암천제 229화

 

229화

 

 

 

 

 

 

옆에 있던 진사혁이 풀썩 웃으며 말했다.

 

“백 형? 언제부터 백씨가 되었지?”

 

독고무령의 입가로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네. 내 피가 백씨의 피인 것만은 분명하니까.”

 

“응? 그래?”

 

처음으로 듣는 말에 진사혁의 눈이 커졌다. 그러다 장난기가 동한 표정으로 천수옥에게 나직이 물었다.

 

“이보쇼, 여기 이 친구가 누군지 아쇼?”

 

천수옥은 진사혁의 갑작스런 질문을 받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이 친구가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소?”

 

천수옥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이름이라면…… 백무령이라고…… 했소만.”

 

진사혁이 나름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무령이라는 이름은 맞소. 그런데 우리는 회주를 백무령이라고 부르지 않지요.”

 

“그럼……?” 

 

천수옥과 도청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진사혁과 독고무령을 번갈아보았다. 미처 회주라는 말을 깊게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홍려려는 그 두 사람보다 눈치가 빨랐다.

 

그녀는 ‘회주’라는 말과 ‘무령’이라는 이름에서 진사혁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서, 설마…… 백 소협의 이름이 그럼…… 독고…… 무령?”

 

순간, 천수옥은 입을 쩍 벌리더니, 똑똑 끊어지는 말투로 한 자씩 내뱉었다.

 

“헉! 암, 천, 사, 신!”

 

반면 도청진은 입을 꾹 다문 채 토용(土俑)처럼 몸이 굳어버렸다.

 

-흥, 솔직히 말해서, 그가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느냐? 쳇, 앞에 있으면 한번 붙어볼 텐데…….

 

전날, 독고무령 앞에서 코웃음 치며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삼인삼색의 반응. 다시 봐도 참 순한 사람들이다.

 

독고무령은 피식 웃으며 담담히 말했다.

 

“내가 독고무령인 것은 맞소만, 백무령인 것도 맞소.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말고 편하게 대하시오.”

 

그러나 독고무령의 정체를 안 이상 어떻게 편하게 대한단 말인가.

 

천수옥이 먼저 허리를 굽히며 다시 인사를 했다.

 

“암향단의 제팔 조장, 천수옥이 회주를 뵈오!” 

 

그제야 도청진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칠 조장 도청진이…… 회주를 뵈오.”

 

독고무령은 담담한 목소리로 마주 인사를 했다.

 

“암천무신의 입회를 반기는 바요.”

 

장난기가 다분히 섞인 말투.

 

“에……. 그게……. 하, 하…….”

 

난감해진 도청진이 벌게진 얼굴로 말을 더듬는데, 진사혁이 속도 모르고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암천무신? 여기 도 형의 별혼가? 자네와 비슷하군.”

 

그때 마침, 마당에 모여 있는 자들 중 누군가가 세 사람을 불렀다.

 

“조장! 거기서 뭐하는 거요? 빨리 오쇼!”

 

도청진에겐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다. 

 

“회주,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사제, 사매, 가보자!”

 

그는 천수옥과 홍려려의 소매를 억지로 끌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더 있으면 얼굴이 사과보다 더 빨갛게 달아오를 것만 같았다.

 

독고무령은 그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고는 몸을 돌렸다,

 

“사혁, 자네에게 부탁할 말이 있네.”

 

나직이 말하며 걸어가는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눈빛도 심해의 어둠처럼 가라앉았다.

 

혼자 제왕성에 침투할 생각이라고 하면 보나마나 가만있지 않을 게 뻔했다.

 

일단 기세로 누르는 수밖에.

 

진사혁은 느닷없는 독고무령의 변화에 잔뜩 긴장해서 반문했다.

 

“무슨 부탁인데……?”

 

 

 

* * *

 

 

 

억만 년의 세월 동안 그러했듯이, 관제산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서 천하를 굽어다 보았다. 

 

백 년도 못살면서 세상이 자신들의 것인 양 설치는 인간들이 가소롭다는 듯.

 

하지만 그러한 관제산도 결국은 땅 위에 얹힌 수많은 산 중 일부분일 뿐이었다.

 

‘어쩌면 이 땅도, 저 하늘에서 보면 별것 아닐지도 모르지.’

 

중턱에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선 독고무령은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수십 개의 화톳불이 듬성듬성 피어오르며 관제산의 산자락을 밝히고 있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은 저 거대한 제왕성의 가장 깊고 구석진 곳에 있다.

 

‘염마귀는 잘 지내고 있나 모르겠군.’

 

그러고 보니 자신을 소악마라 부르면서도 한 번도 인상을 쓰거나 욕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문득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장은 만날 수가 없었다.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 것이다.

 

휘이이잉!

 

한줄기 거센 바람이 관제산 중턱의 바위 위를 쓸고 지나갔다. 바람이 쓸고 간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뎅, 뎅, 뎅…….

 

멀리서 자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릴 무렵.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내성 깊숙한 후원의 기다란 건물 지붕 위에 내려섰다.

 

검은 그림자는 어둠에 몸을 묻고 바람처럼 흐르더니, 단숨에 십여 장 떨어진 건너편 삼층 전각 위까지 날아갔다.

 

그 후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나타났다 싶으면 사라지고, 사라졌다 싶으면 십여 장 밖에서 홀연히 나타나면서 삼층 전각의 처마로 스며들었다.

 

전각 주위를 지키는 경비무사는 모두 열다섯. 하지만 누구 하나 암향호접무를 펼치는 그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다.

 

간단히 경비무사들의 눈을 따돌린 독고무령은 집법전 안으로 스며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노태릉의 숨넘어가는 목소리가 내실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누, 누구냐!”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단 한 점도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했다. 진기로 음파가 차단된 상태인 것이다.

 

게다가 마혈을 제압당해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귀신도 모르게 제압당하다니. 

 

아무리 긴장이 풀려 있었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노태릉은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 닥치자, 스멀거리는 공포에 안절부절못했다.

 

그때 독고무령의 무심한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흔들었다.

 

“여기서 나는 소리는 방문 밖에서도 못 듣는다. 지금부터 질문을 할 테니, 그대는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도록.”

 

“네놈은 누군데 감히……!”

 

노태릉은 눈을 치켜뜨고 상대의 귀면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미 정신이 흔들린 그의 눈빛으로는 강아지조차 겁줄 수가 없었다.

 

귀면의 인피면구를 쓴 독고무령은 눈빛 한 점 흔들림 없이 검을 빼들었다.

 

“들어오면서 모두 다섯을 잠재웠지. 그대 하나 더해진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순간, 노태릉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독고무령이 한 말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다섯은, 집법전 내부에 은잠해 있는 경비무사의 숫자였다. 좋게 표현해 잠재웠다는 것이지, 죽였다는 말이었다.

 

‘이놈은 살귀다!’

 

독고무령은 노태릉의 입이 닫히자 검을 목에 가져다 댔다.

 

“죽을 것인지 살 것인지, 선택은 그대가 하도록.”

 

목이 길게 그어지며 피가 배어나왔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단호한 행동.

 

노태릉은 협박해서 통할 상대가 아님을 알고, 일단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왜 나를 찾아온 것이냐? 뭘 알고 싶어서…….”

 

“제왕성의 최종 목적.”

 

“그, 그게 무, 무슨……?”

 

“위지천백은 은룡산장을 무너뜨렸다고 만족할 사람이 아니다. 분명 다음 목표가 있을 거야. 어디지?”

 

“나는 잘…….”

 

“암천회인가?”

 

노태릉은 입을 꾹 닫았다.

 

독고무령은 상관없다는 듯 연이어 물었다.

 

“천룡방이나 신마벌인가? 아니면…… 황궁?”

 

순간적으로 노태릉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주시하지 않았으면 보지 못했을 정도로 짧은 순간의 흔들림이었다.

 

“역시 그런가 보군.”

 

“나,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이놈!”

 

독고무령의 귀면에 하얀 웃음이 번졌다.

 

“나이 어린 소녀를 간음하고 죽이는 더러운 자가 꽤나 신의 있는 척하는군.”

 

노태릉의 두 눈이 홉떠졌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네놈이 죽인 화종문이라는 자가 말하지 않던가? 그 이야기를 몇 사람에게 했는지 말이야.”

 

화종문은 마인걸과 함께 그 일을 알고 있는 두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가 사람을 보내 죽인 자였다. 노태릉은 이를 악물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역시. 그놈이었군! 혹시나 마가 놈이 아닌가 했는데…….”

 

“마가가 누군지는 모르겠고, 이제 거래를 시작해볼까?”

 

“차라리 돈을 주겠다. 네놈이 입을 쩍 벌릴 만큼.”

 

“돈이라……. 얼마나 주겠다는 거지?”

 

노태릉이 자신 있게 말했다.

 

“은자 만 냥을 주겠다.”

 

아무리 봐도 백 냥짜리 전표도 구경해보지 못한 놈처럼 보였다. 만 냥이라면 평생 떵떵거리며 먹고살 수 있을 터. 넙죽 받지는 않아도 마음이 흔들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독고무령은 품속에서 뭔가를 하나 꺼내들고 노태릉의 눈앞에 내미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적수천에게 받은 오만 냥짜리 전표였다.

 

“이런 것 열 장을 준다면 생각해보지.”

 

노태릉의 얼굴이 누렇게 떴다.

 

오만 냥짜리 전표는 집법전주인 자신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상납 받을 때도 쓰기 좋게 백 냥 짜리로 받았으니까.

 

중원 최고의 전장인 북경전장의 직인이 찍힌 걸로 봐서 가짜는 아닌 것 같았다.

 

열 장이면 오십만 냥. 자신이 감당할 한계를 훌쩍 넘은 액수다.

 

‘날강도 같은 놈!’

 

노태릉은 돈으로 거래할 생각을 포기했다.

 

화종문이 죽은 이상 자신의 비리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강력하게 발뺌하면 될 일이니까. 

 

그럼에도 거래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의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호위무사 다섯을 소리 없이 죽인 놈이다. 제왕성의 이름으로 협박한다고 먹힐 놈이 아니었다.

 

“대체 뭘 원하는 것이냐?”

 

“위지천백의 계획에 대해서 뭐든 말해봐. 정 생각이 안 나면 내가 도와주지. 척추를 모조리 부수면 어릴 때의 일도 생각날 거다.”

 

말을 하면서 검으로 쿡쿡 찌른다. 그냥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니다. 검날이 두세 푼 깊이로 파고든다.

 

가슴을 타고 주르륵 흐르는 핏물.

 

신음이 잇새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크윽!”

 

노태릉은 한여름인데도 오싹한 느낌에 몸이 절로 떨렸다.

 

‘악귀 같은 놈!’

 

“기억이 안 나면 내가 먼저 한 가지를 물어보지. 황궁의 이왕과 손을 잡았다고 들었는데, 맞나?”

 

뒤통수를 후려치는 충격에 노태릉은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 그걸 어떻게……?”

 

“그 다음에 하려고 하는 일은?”

 

“나, 난……. 끄윽!”

 

머뭇거리자 검이 비틀리며 제법 깊게 파고들더니 갈비뼈를 긁었다.

 

“여차하면 팔다리의 힘줄을 잘라놓고 물어볼 수도 있다는 것만 알아두도록. 자, 말해봐.” 

 

노태릉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살고 싶었다.

 

“정말…… 말하면 살려주는 것이냐?”

 

“나는 한번 말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지.”

 

나중에 또 이용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한번 배신한 놈은 두 번도 배신하는 법.

 

하지만 노태릉은 독고무령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조, 좋다. 내가 아는 것은 다 말해주지.”

 

 

 

독고무령 노태릉을 대면한 지 반시진가량이 흐른 후 방을 나왔다.

 

노태릉은 누워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일각 정도면 혈도가 풀어진다고 했다. 일각이 일 년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제길, 혀라도 깨물 힘이 남아 있었으면 자결이라도 했을 텐데!’

 

그는 그렇게 자위했다. 정말 그랬을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당장 중요한 것은 지난 일이 아니었다. 가슴의 상처야 며칠만 지나면 나을 터. 중요한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고 가슴의 상처를 바라보았다.

 

“응?”

 

목이 움직였다. 마혈이 풀렸다는 말.

 

그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보았다. 뻐근하긴 해도 움직이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그때였다. 방문 밖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전주님, 별일 없으십니까?”

 

호위무사였다.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모습을 보면 의심을 품을지 모르는 일.

 

“별일 없…….”

 

황급히 대답하던 노태릉은 말끝을 흐리며 턱을 덜덜 떨었다.

 

죽였다는 호위무사가 살아 있다니.

 

‘그럼…… 정말로 잠만 재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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