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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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5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7화
27화
2
다음 날 아침.
정가장을 나선 풍천은 회빈의 거리를 뒤져서 골동품점을 찾아갔다.
그는 골동품점을 구석구석 뒤져서 한 가지 물건을 찾아냈다. 그리고 주인과 제법 긴 협상을 했다.
“툭 치면 부서지게 생겼는데 뭐가 그리 비싸요?”
“오래된 것이 원래 비쌉죠.”
“그래도 두 냥은 너무 비쌉니다. 한 냥만 하죠.”
“그렇게는 안 됩니다.”
“척 보니 동전 몇 이십 문쯤 주고 산 것 같은데, 한 냥이면 몇 배 이익입니까?”
“글쎄, 안 된다니까요?”
“안 되기는요. 장사꾼이 손해 본다는 거, 다 거짓말이라고 하더군요.”
“다른 사람은 거짓말할지 몰라도 나는 절대! 거짓으로 물건을 팔지 않습니다요.”
협상은 무려 한 시진 동안 이어지고, 생애 가장 긴 협상에 지친 골돌품점 주인은 결국 은자 한 냥에 물건을 넘겼다.
그러고는 골돌품점을 나선 풍천이 저만치 멀어지자, 퉤! 가래침을 뱉고 욕을 한 바가지나 한 다음 돌아섰다.
“젊은 놈이 말이야, 왜 저리 짜? 아침부터 재수 더럽게 없네. 에이, 칠십 문밖에 안 남았잖아?”
그래도 풍천은 즐거웠다.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을 구했다. 그것도 두 냥짜리를 한 냥에.
한 시진 말싸움하고 한 냥을 벌었으니 엄청난 이익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얻을 이익은 더 클 터.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풍천이 골동품점에서 협상이라는 껍질을 쓴 말싸움을 하고 있을 때, 정가장의 무사들은 회빈 일대를 은밀하게 조사했다.
풍천이 말한 인상의 주인들을 찾기 위함이었다.
화청백은 무사들에게 설령 그들을 발견해도 절대 부딪치지 말고, 아는 척도 말고, 추적도 하지 말고 그냥 돌아오라고 했다.
그들을 자극하면 안 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자체였다.
그런데 새벽부터 시작된 조사는 사시가 넘어가도록 소득이 없었다.
정말 그들이 회빈에 있긴 있는 걸까?
화청백은 의문이 들었다.
회빈이 작진 않지만, 그렇다고 큰 도읍도 아니었다. 수십 명의 무사가 반나절을 조사했으면 뭔가 자그마한 결과라도 나와야 했다.
그런데 꼬리도 보이지 않다니.
만약 이대로 놈들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조사를 멈춰야 했다.
지금은 놈들도 지켜보고만 있을 것이다. 어차피 이 정도 수색은 그들도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조금 더 깊게 파 들어가면 저들도 뭔가 생각을 바꿀지 모른다.
화청백은 답답하기만 했다.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이냐, 이놈들!’
풍천이 돌아오자, 화청백과 석초산이 다그쳤다.
잠깐 나갔다 온다는 사람이 두 시진이 다 되어서 돌아오다니.
“놈들이 자네를 알아볼지 모르네. 행동을 조심해 주게.”
“대체 왜 멋대로 행동하는가?”
구양종은 혀를 차며 풍천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여간, 정말 대책 없는 친구군. 쯔쯔쯔…….”
풍천은 대답 대신 골동품점에서 사온 물건을 꺼냈다.
길이 한 자 가량의 낡은 가죽 주머니였다. 안에는 여덟 치가량의 기다란 물체가 들어 있었다.
“이걸 사러 갔죠.”
화청백이 이마를 찌푸리고서, 풍천이 내놓은 물건과 풍천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그게 뭔가?”
“유령적입죠.”
“…….”
모두가 멍한 표정으로 풍천을 바라보았다.
유령적은 없다. 그것 때문에 지금과 같은 계획이 세워졌다. 그런데 유령적이라니?
“자네 지금 장난하나?”
석초산이 속에 쌓이고 쌓인 분노를 마침내 겉으로 드러냈다.
구양종도 석초산을 거들었다.
“하여간 하는 짓하고는. 아무래도 지휘자를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화 형.”
하지만 화청백의 반응은 그와 달랐다.
“무슨 말인가, 풍 조장? 유령적을 사왔다니?”
풍천은 어깨를 으쓱 추켜올렸다.
“적에게 보여주려면 뭐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마디로 가짜라도 보여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 그럴 듯한 말이었다.
“그래서 그걸로 유령적을 대신하겠다는 건가?”
“가죽 주머니에 들어 있으니 저들도 몰라볼 겁니다. 거기다 주머니도 아주 오래된 것이어서 바로 의심하지는 않을 겁니다.”
“크기가 다를 수도 있잖은가?”
“품속에서 슬쩍 보여주죠 뭐.”
자신이 가짜를 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좀 더 구체적인 계획도. 하지만 그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멋진 계획일수록 극적인 상황에서 보여주는 게 더 값진 법이니까.
화청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흠, 좋은 생각이네.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군. 자네 말대로 해보세.”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풍천이 손을 내밀었다.
“스무 냥입니다.”
“음?”
“골동품이라서 제법 비싸더군요. 그래도 적의 눈을 속이려면 그럴 듯한 물건을 사야 할 거 같아서 비싸도 사왔죠.”
화청백은 가죽 주머니와 풍천을 두어 번 번갈아보고는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족히 한 냥은 됨직한 금두 하나를 꺼내주었다.
“이거면 되겠나?”
“제가 풍족하기만 해도 이 정도는 그냥 쓰는 건데…….”
풍천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금두를 받고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나중에 장사나 해볼까? 아무래도 장사 쪽으로 뛰어난 소질이 있는 것 같은데 말씀이야.’
구양종은 그런 풍천의 옆모습을 노려보았다.
‘분명 거짓말일 거다. 스무 냥? 열 냥이나 주었는지 모르겠군.’
3
찻잔을 입에서 뗀 백의 중년인은 곤혹한 표정을 지었다.
“일이 묘하게 흐르는군. 신마성이 백초령을 납치하다니.”
앞에 앉아 있던 흑의 장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령적이 뭔지는 몰라도 그만큼 중요한 물건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래도 유령총과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두고만 보실 겁니까?”
“일단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보도록. 백무천에게 유령적이 없는 이상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지는 않을 거다. 그때 가서 관여해도 늦지 않아.”
“그러다 일이 유야무야 끝나면…….”
“그러진 않을 거다. 신마성이 백초령을 납치했다는 건 뭔가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백무천이 없다고 한다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야. 더구나 백무천이 딸의 납치와 자신에 대한 협박을 그냥 넘어갈 것 같으냐?”
흑의 장한의 입가에 가느다란 웃음이 걸렸다.
“한바탕 폭풍이 불겠군요.”
“아무래도 그러겠지. 그것도 시뻘건 피바람이 불 게야. 나머지 일은 위에서 처리할 것이니 우린 굳이 앞으로 나서서 맞바람을 맞을 필요가 없다.”
“아, 이번 일에 풍천이란 놈을 내세웠다고 들었습니다. 그놈을 이용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상황을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백의 중년인의 이마에 주름이 그어졌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그놈이 청부를 성공할 가능성이 일 푼도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최악의 선택이었다.
하필 그런 놈에게 청부를 하다니!
오죽하면 그놈에게 청부한 흑의 장한을 패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아마 그동안 세운 공이 없었다면 정말 패 죽였을지 몰랐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했던 놈이 이번 일의 중심에 서 있었다. 자신들에게는 최고의 간자가 그들 사이에 끼어 있다는 말.
하지만 그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놈을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어차피 밑져봐야 본전 아니겠습니까?”
하긴 어차피 백무천을 죽이지 못할 놈이라면 이런 곳에라도 활용해야 했다.
“어떻게 이용할 생각이냐?”
“속하에게 맡겨주시지요. 최대한 이용하고 나서 제거해 버리겠습니다.”
백의 중년인은 찻물로 입술을 축이는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으로선 그보다 좋은 방법이 없었다. 풍천이란 놈이 백무천을 죽일 가능성이 없는 이상 그렇게라도 해서 본전을 뽑아야 했다.
“좋다, 진표, 네가 책임지고 놈을 이용해 봐라. 혹시 모르니 애들 몇을 보내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도록 하고.”
“예, 주군.”
“이번 일도 엉망이 되면……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백의 중년인은 나직이 말하면서 찻잔을 탁자에 놓고 눌렀다.
찻잔이 단단한 탁자를 파고 들어갔다.
흑의 장한, 악진표는 얼굴이 납덩이처럼 굳어진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자신의 얼굴에 찻잔이 박혀드는 기분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자식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그는 풍천을 철저히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제거하기 전, 무슨 잘못을 했는지 조목조목 알려줄 작정이었다.
4
신시(申時; 오후3시~5시) 초.
하얀 깃발이 웅풍객잔 이 층 지붕 위에서 바람에 펄럭였다.
풍천과 화청백 일행은 웅풍객잔에 방을 잡고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납치범들의 신경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정가장의 무사들은 완전히 철수한 상태였다.
피를 말리는 시간은 술시 초까지 이어졌다.
창밖이 석양으로 인해 점점 붉어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마음도 바짝 타들어갔다.
풍천은 기다리는 동안 눈을 감고 기운을 다스렸다.
사실 운기를 하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졸려서 하는 것이지.
만 근의 무게로 짓누르는 눈꺼풀에 힘을 주고 악착같이 견디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깜박 졸기라도 하면 사람들이 욕을 바가지로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눈을 감고 운기를 하면 조금 나았다.
물론 눈을 감고 있다 보면 더 졸릴 때도 있었다. 아니 아예 잠을 잘 때도 많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원심법(二原心法)을 익혔기 때문에 잠을 잔다고 해서 주위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니니까.
‘사부가 살아계실 때 이원심법을 찾아냈으면 좋아하셨을 텐데…….’
지금처럼 운기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듯이.
사실 풍천 정도의 고수가 졸리는 걸 못 참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무공이 절정에 이르면 신체의 상태를 조절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것도 그에게는 해당이 없는 말이었다.
오히려 그는 무공이 강해지면서 잠이 더욱 많아졌다.
사마걸은 죽기 전까지 그 사실을 애석해했다. 청부를 맡으면 며칠 동안 잠을 자지 않아야 할 때가 있는데, 졸음이 많으면 해결사에게 치명적인 단점이 된다면서.
‘사부는 내 머리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했지.’
어쩌면 사부를 만나기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몰랐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실하지는 않았다. 의원을 몇 명 만나 진맥을 해봤는데 모두 확실한 답을 내리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알아볼 작정이었다.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사부가 아니던가.
“곧 해가 질 텐데 놈들이 왜 연락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군요.”
구양종이 기다리기 답답한지 입을 열었다.
‘해가 질 때까지 연락한다는 말은 없었잖아.’
풍천은 구양종에게 핀잔을 주고 싶었지만, 눈을 뜨기 싫어서 그냥 놔두었다.
사실이 그랬다. 해가 질 때까지 깃발을 달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 후 연락을 한다고 했고.
놈들이 내일 연락을 한다고 해도 신검문 쪽에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면, 놈들도 마음이 급할 것이니 그렇게까지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을 거라는 점이었다.
점소이가 서신 하나를 들고 방을 찾아온 것은 어둠이 세상을 뒤덮은 직후였다.
“저기, 어떤 거지가 이걸 가져왔는데요?”
방문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기종탁이 서신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화청백은 서신을 빠르게 펴서,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풍천도 운기를 풀고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