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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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3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6화
26화
제1장. 그래도 대장은 대장이니까
1
장한이 입고 있는 옷은 다름 사람처럼 평범했다. 그러나 신광이 흐르는 눈빛은 결코 평범한 자가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풍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단 빈자리로 갔다.
그때 일어났던 자가 구양종을 보며 포권을 취했다.
“구양 공자가 여기까지 올 줄은 미처 몰랐구려. 반갑소이다. 화청백이라 하외다.”
그 이름이 나온 순간, 풍천을 뒤따라가던 구양종의 눈이 커졌다. 그는 급히 포권을 취하며 마주 인사했다.
“구양종이 화 형께 인사드립니다.”
신검일수(神劍一秀) 화청백.
신검무제 백무천의 대제자. 그의 이름은 구양종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칠팔 년 전부터 청년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폐관에 들어가기 전까지 하남칠수(河南七秀) 중 하나로 꼽힌 사람이었다.
풍천도 놀라서 반쯤 감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어? 노형이 초령이의…… 둘째 아가씨의 큰 사형입니까?”
풍천은 무심결에 백초령을 ‘초령이’라고 말하다가 재빨리 둘째 아가씨로 바꾸었다.
화청백은 기괴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네. 내가 초령이의 큰 사형인 화청백이네.”
“정말 반갑습니다. 그러잖아도 둘째 아가씨가 엄청 자랑했었는데.”
자랑은 무슨! 사형이 나오면 큰일 날 거라고 했지.
하지만 백초령이 없는 자리인데 무슨 상관이랴.
‘제법 세게 생겼는데? 초령이 그것이 큰소리 칠 만해. 그런데 더 이상하네. 화청백까지 왔는데 왜 나보고 지휘하라고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풍천은 의아해하며 탁자 주위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비검당 사람들을 제외하고 여섯 사람이 더 있었다.
그중 한 사람만 복장이 달랐다. 나이도 석초산보다 열 살 이상 많아 보였고. 아마도 이곳 정가장의 장주이자 지부장인 정영위 같았다.
문제는 나머지 여섯 사람이었다. 모두 서른 전후의 나이인데도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내재되어 있었다.
‘호오! 대단한데? 신검문이 검각이나 경천산장보다 실력 면에서 반 수 위로 평가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군.’
하나하나가 자신의 기운을 안으로 갈무리할 정도의 고수들이었다.
언뜻 봐도 비검당의 조장들보다 강해 보였고, 심지어 석초산과 견주어도 아래가 아닌 듯했다. 아니 그중 하나는 석초산보다도 더 강할 듯했다.
‘저 사람들은 누구지?’
화청백은 풍천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며 실소를 지었다.
폐관에 들어가기 전 사마공유가 풍천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었다. 또한 오기 전에는 백무천에게 들었고, 오면서는 석초산과 비검당의 조장들에게 들었다.
사마공유는 풍천을 ‘좋은 놈, 재미있는 놈,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라는 말로 압축해서 말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판단은 조금 달랐다.
게으른 것이 특기고, 상대의 화를 돋우는 게 취미인 사람.
모두가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자세한 것은 만나보고 나서 직접 판단하라며.
그런데 직접 보니 사람들이 왜 그런 평가를 내렸는지 알 것 같았다.
‘사마 아우의 말대로 재미있는 친구인 것은 분명하군.’
그는 일단 풍천에게 다른 사람들을 소개했다.
“여기 이분이 회빈지부의 지부장이신 정 대협이시네.”
역시 생각대로 중년인이 정영위였다.
풍천은 포권을 취하며 슬쩍 고개를 숙였다.
“풍천입니다.”
“만나서 반갑군, 자네에 대한 말은 많이 들었네.”
풍천은 정영위를 수상한 사람 보듯이 흘겨보았다.
입술이 비틀린 채 잘게 떨린다. 웃음이 나오는 걸 억지로 참는 것 같은 표정.
무슨 말을 들었는데 저런 표정이야?
그때 화청백이 나머지 사람들을 소개했다.
“여기 이분은 신무전의 용 형이네.”
그가 소개하자, 여섯 사람 중 선 굵은 얼굴을 지닌 자가 일어나며 담담한 표정으로 포권을 취했다.
“용수명이라 하네.”
풍천은 신무전이라는 말에 용수명을 빤히 쳐다보며 포권을 취했다.
신무전(新武殿)은 신검문 내에서도 조금 색다른 곳이었다.
신무전의 인원은 열다섯에 불과했는데, 대다수가 중년 이상의 나이였고, 육십 세가 넘은 사람이 일곱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신검문에서 입수한 무공을 연구하고 발전시켜서 새로운 무공을 만들어내거나 신검문의 무공과 융화시켰는데, 검에 치중되었던 신검문의 무공이 그 덕분에 보다 다양해지고, 그 깊이도 깊어졌다.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경험도 많고 무공에 대한 이해도 깊어야 할 터. 그런데 용수명은 아무리 잘 봐줘도 서른 중반 정도에 불과했다.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거겠지?’
풍천이 용수명을 해부라도 할 듯이 훑어보는데, 화청백이 나머지 사람들을 마저 소개했다.
“이쪽은 수호검단의 형제들이네.”
수호검단?
풍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화청백이 몇 마디 덧붙였다.
“본문에는 사부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네. 들었는지 모르겠네만, 자네 사형인 공유 아우도 비검당주가 되기 전에 수호검단의 조장으로 나와 함께 있었지.”
그러고 보니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신검문에선 뛰어난 기재를 선별해 십 년간 집중적인 수련을 시킨다고 했다. 아마도 그들로 이루어진 단체가 수호검단인 듯했다. 그리고 화청백이 바로 그 수호검단의 단주고.
‘그럼 형이 십 년간 집에 오지 않은 것도 수호검단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컸다. 그게 아니었다면 십 년 동안 연락 한 번 없었을 리가 없었다.
그가 침울한 표정으로 형을 생각하고 있는데, 수호검단의 단원들이 딱딱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진관악이라 하오.”
광대뼈가 유난히 튀어나온 자를 필두로 나머지 네 사람도 이름을 밝혔다.
“유종빈이오.”
그는 다섯 사람 중 키가 제일 큰 컸다.
“탁조원이오.”
그는 유종빈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다.
“부양이라 하오.”
그는 입술이 두툼해서 누구에게 한 대 맞은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그 입술에 큰 점이 하나 붙어 있어서 풍천은 하마터면 그를 보고 웃음이 나올 뻔했다.
‘누가 보면 검은 콩인 줄 알고 떼어내려고 하겠어.’
그때 마지막 한 사람이 튀어나올 것처럼 큰 눈으로 풍천을 노려보며 이름을 말했다.
“공수보요.”
풍천은 포권을 취하고 있던 손을 일일이 흔들어주었다.
‘골고루 섞였군. 사람이 북적거리는 시전에 나가도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겠는데?’
인사를 나누는 일이 끝나자 화청백이 빈 의자를 가리켰다.
“자, 이제 대충 소개가 끝났으니 자리에 앉지.”
“그러죠 뭐. 구양 형도 앉으쇼.”
털썩, 의자에 앉은 풍천은 사람들이 자신을 괴이한 눈으로 쳐다보든가 말든가, 화청백이 자리에 앉자마자 질문을 던졌다.
“저기, 이곳에 가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잠시 후.
내막을 알게 된 풍천은 앞에 놓인 찻잔을 노려보았다.
자신을 선임한 것은 군사인 백유현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 지휘자로 선임한 것이 아니었다.
‘적의 경계심을 약화시키기 위한 거라고? 한마디로 얕보이기 위해서 나를 내세운 거란 말이잖아?’
그 덕에 자신의 능력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 영업에 지장이 없는 건 다행인데…… 기분은 무지 더러웠다.
‘킁, 군사라는 양반이 되게 멍청하군. 그리고 문주도 그렇지, 척 보고 알아봐야지 말이야.’
눈이 동태눈이야? 그런 눈으로 신검무제는 무슨!
그렇다고 불만을 쏟아내기도 그랬다.
이러나저러나 어쨌든 백초령을 구하기 위함이라지 않는가.
‘그건 그렇고…… 지미, 뭐? 유령적이 없다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유령적이 없다니.
형이 목숨을 바쳐서 유령적을 구하지 않았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거짓말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백무천은 딸의 목숨을 걸고 거짓말을 할 정도로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만약 그가 욕심 많은 사람이었다면 신검문이 지금보다 배는 더 커졌을 것이었다.
‘그 비싼 금잉어를 잡아먹은 나를 웃으면서 봐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아암!’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유령적도 없이 앞에 나서서 백초령을 구하라는 말인 즉, 자신더러 앞에 나서서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그 틈에 자기들은 백초령을 구해내려고 하겠지?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기분이 상한 풍천은 툭툭 쏘듯이 물었다.
“좌우지간, 저에게 대장 역할을 하란 말이죠?”
“물론이네.”
“저들이 의심하지 않겠수? 유령적도 없다면서요?”
“자네는 우리와 달리 고급 옷을 입게. 그리고 행동을 거만하게 하게. 그럼 내가 대충 보조를 맞출 테니까.”
마치 무대에 선 잡극의 배우가 된 기분이다.
‘쳇, 초령이 고것 때문에 이게 뭐야?’
풍천은 슬쩍 구양종을 곁눈질했다.
구양종의 입에 가느다란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럼 그렇지, 네깟 놈이 무슨 지휘자야?’ 꼭 그렇게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고소하다 이거지?’
약이 오른 풍천은 화청백에게 딱 한 가지만 요구했다.
“좋습니다. 뭐 어떻게 되든 한 번 해보죠. 단! 화 공자를 제외하고는 일이 끝날 때까지 모두 제 명령을 들어야 합니다. 그게 아니면 저 안 할 겁니다.”
“이봐, 풍 조장.”
“앞장서면 제일 먼저 죽을지 모르는데, 그 정도는 해주셔야하지 않겠습니까? 한참 중요한 상황에서 갑자기 제 말을 안 들으면 저만 병신처럼 멍하니 있다가 죽을 거 아닙니까?”
느닷없는 요구에 화청백은 눈살을 찌푸렸다.
방 안에 있는 사람 중 풍천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순히 연극을 하는 것과, 약속을 하고 명령을 따르는 것과는 상황이 달랐다.
더 큰 문제는, 풍천이 어떤 엉뚱한 명령을 내릴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거절할 수도 없었다.
풍천의 말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었다. 비상상황에서 행동이 일치되지 않으면 그만큼 위험이 가중될 테니까.
또한 적이 협상을 거절하고 손을 쓴다면, 풍천이 제일 위험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흠, 석 부당주, 어떻게 생각하시오?”
석초산은 화청백의 질문에 얼굴이 구겨졌다.
풍천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마치 백 장 절벽 끝에 발끝만 걸치고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저 자식, 좌우간 가까이 해선 안 될 놈이라니까.’
풍천의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니 당장 거부하고 싶었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이 자식아!’ 그렇게 소리치며.
‘제기랄! 저 자식이 이런 기회를 그냥 지나치지 않을 텐데…….’
어떤 짓을 할지 몰라 불안했다. 그런데 거부하고 싶어도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석초산은 입안에 모래가 가득 든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지나친 명령만 하지 않는다면, 그 정도는…… 큰 무리가 없을 것 같군요.”
그가 승낙한 이상 다른 사람은 표정만 일그러뜨릴 뿐 나서서 반대하지 못했다.
화청백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반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는 풍천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좋네, 그럼 그렇게 하지.”
그제야 풍천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걸렸다.
“뭐 구양 형이야 이미 이야기했으니 물을 것도 없고……. 그럼 제가 한 번 멋지게 처리해 보죠.”
순간, 구양종의 입가에 떠올랐던 웃음이 똥 씹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저 자식, 분명 나 때문에 저런 요구를 한 걸 거야!’
풍천은 구양종의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건 그렇고…… 지부장님, 혹시 본문에서 연락 못 받았습니까?”
정영위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떤 연락 말인가?”
“제가 적에 대한 신상정보를 본문에 보냈거든요.”
가만히 듣고 있던 화청백이 눈을 크게 떴다.
“자네가 그들에 대해서 알아냈단 말인가?”
구양종을 제외한 사람들 모두 놀란 표정으로 풍천을 바라보았다.
풍천은 적과 만나서 할 연기를 미리 해보였다.
눈을 옆으로 흘기며, 턱을 쳐들고, 거만하게.
“물론이죠. 그 정도야 뭐…….”
사람들은 모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뱃속에서 거품이 부글부글 끓는 기분이랄까?
군사인 백유현이 풍천을 앞세우기로 한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적이 자신들만큼만 흔들려도 살아서 돌아올 확률이 삼 할은 더해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풍천의 면상을 한 대 후려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