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4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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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2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47화
47화
“처음에는 분명히 네가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 하, 하. 그 점은 죄송합니다. 전에 제가 가지고 있었는데, 그만 깜박하고 아직도 가지고 있는 줄 알았지 뭡니까. 저기 서 있는 위태곤에게 물어보세요. 저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요.”
운조평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풍천을 노려보았다. 아마 눈빛이 정말 칼날이었다면 풍천은 수만 조각으로 갈라져 죽었을 것이다.
풍천은 그의 눈빛을 피하며 화청백을 재촉했다.
“달라니까요?”
화청백은 유령적을 풍천에게 넘겨주었다.
운조평과 말다툼을 하면서 이 각의 시간을 끌었다. 거기다 백초령마저 풀려나게 만들었다.
자신이라면 어땠을까?
솔직히,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이제 운은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풍천은 유령적을 넘겨받고 운조평에게 주기 전 한 번 더 질문을 했다.
“진위여부를 어떻게 확인하겠다는 건지, 정말 궁금한데 말이죠.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운조평의 입가에 싸늘한 냉소가 걸렸다.
“그걸 알면 죽어야 한다. 그래도 알고 싶으냐?”
“하, 하. 죽으면서까지 알고 싶지는 않군요.”
“그럼 이제 그걸 내놓아라. 네놈이 그러지 않았느냐?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개자식에 남자도 아니라고 말이다.”
운조평이 손을 내밀었다.
풍천이 유령적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이 약속을 지킬 거라는 걸 믿고 드리죠.”
“당연히 나는 약속을 지킨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유령적이지, 너희들의 목숨이 아니니까.”
하지만 풍천의 질문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근데 신마성에서는 여기에 몇 명이나 온 거죠? 한 백 명 되나요? 그중에서 당신이 제일 높은 사람인가 보죠? 혹시 더 높은 사람 안 왔어요? 왔으면 그 사람에게 넘겨줬으면 하는데.”
끝내 운조평의 인내심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폭발했다.
“네놈이 감히 나를 놀리겠다는 거냐!”
분노를 잇새로 씹어뱉는 운조평의 전신에서 은은한 묵기가 흘러나왔다. 유형화된 살기였다.
풍천은 두려워하기는커녕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히려 운조평을 다그쳤다.
“어? 너무 그러지 마십쇼. 유령적은 오래된 거라서 강한 충격을 받으면 부서진다니까요! 멍청한 짓 말고 기운을 거둬요! 위태곤! 유령적이 부서지면 다 저 사람 탓이야! 우리보고 책임지라고 하지 마! 약속도 어기지 말고!”
운조평은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유령적이고 뭐고 일단 풍천부터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유령적이 부서지면 유령총의 비밀을 밝힐 수가 없었다.
미친놈 하나 죽이고 유령총의 비밀을 묻어 버릴 수도 없는 일. 손가락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강하게 움켜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대로 살기를 방출시키지 못하면 몸 안에서 뒤엉킬 것 같았다.
바로 그때, 탑의 입구 쪽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당장 공격할 것 같던 운조평이 멈칫하고, 위태곤과 시마청의 신경도 입구 쪽으로 향했다.
당황하거나 흔들린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들의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풍천은 그들의 표정을 보고 싸늘한 기광을 번뜩였다.
‘드디어 시작이군!’
뒤따라오던 자들이 마침내 유령곡으로 들어온 듯하다. 그들과 신마성이 부딪친 듯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자신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가 된 것이다.
풍천은 위태곤을 향해 주머니를 던졌다. 더 이상 가지고 있으면 운조평이 참지 못하고 공격할 것 같았다.
“받으쇼!”
그러고는 뒤로 주르륵 물러나서 화청백을 재촉했다.
“우리는 이제 갑시다! 팔대신마나 신마성주의 제자가 설마 약속을 어기겠수?”
풍천이 서두르자, 기다렸다는 듯 화청백 등도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운조평은 풍천을 죽일 듯이 바라보았다.
아직 유령적의 진위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 보내서는 안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저들은 허락 없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으니까. 절대로!
위태곤도 그들을 특별히 제지하지 않고 운조평에게 주머니를 건넸다.
“사숙, 유령적을 확인해 보십시오.”
운조평은 주머니를 받아들고는 매듭진 끈을 풀어보았다.
안에는 오랜 세월의 흐름이 엿보이는 옥적(玉笛)이 하나 들어 있었다.
“내가 확인하고 올 동안 저놈들을 못 나가게 막아라.”
“예, 사숙.”
당연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막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야 저들의 피해가 커질 테니까. 그래야 백초령을 차지할 수 있을 테니까.
‘풀어줄 때 마음껏 날뛰어라, 화청백. 후후후후.’
한편, 구출대가 입구 쪽으로 걸어가자, 입구 쪽에 서 있던 무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빼들었다.
“아직 나갈 수 없다.”
화청백이 소리쳤다.
“우리는 약속대로 유령적을 건넸다. 비켜라!”
남호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유령적이 진짜라는 게 판명되면 보내주지.”
화청백은 그때까지 기다릴 마음이 없었다. 유령적은 진짜가 아니니까.
“흥! 우리는 할 만큼 했다! 네놈들이 원해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느냐! 비키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풍천은 마음이 더 급했다. 유령적이 가짜라는 걸 알게 되면 운조평이 미친 듯이 날뛸 게 분명했다.
‘아마 나부터 죽이려고 할 거야.’
혼자라면 두려울 것도 없었다. 백초령만 없다면 말이다.
그는 화청백의 말이 끝나자마자 검을 뽑아들고 귀혼신마대 속으로 뛰어들었다. 운조평이 나오기 전에 빠져나가야 했다.
“줄 거 다 줬는데 기다릴 거 뭐 있수! 비켜!”
목숨이 걸린 일. 풍천은 평소처럼 어영부영하지 않았다.
귀혼신마대는 풍천이 느닷없이 뛰어들자 일순간 멈칫하며 손을 쓰지 못했다.
그 순간은 그야말로 눈 한 번 깜짝일 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세 명의 목숨이 사라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쉬이익!
풍천이 몸을 한 바퀴 돌리며 검을 휘두르자 귀혼신마대 세 명의 무사가 그의 검 끝에 걸렸다.
단순한 검이지만 빠르고 정확했다. 게다가 흔들리는 등잔의 불빛으로 인해 시야가 흐릿한 터였다.
방어할 틈도 없이 목과 가슴이 쩍 갈라지면서 피가 솟구쳤다.
세 사람의 몸에서 뿜어지는 피는 광장을 한순간에 혼란으로 빠뜨렸다.
“놈들을 쳐라!”
“죽여라!”
“뚫고 나가!”
“관악! 초령이를 보호해!”
그 와중에도 풍천은 정말 유령이라도 된 듯 귀혼신마대 사이를 누볐다.
순식간에 귀혼신마대의 무사 둘이 더 쓰러졌다.
그들의 뒤쪽에 서 있던 자들이 손을 쓰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신마호령단은 놈들을 제압하라! 백초령만 빼고 나머지는 죽여도 좋다!”
위태곤이 악을 쓰듯 명을 내리며 달려들었다.
시마충도 특유의 웃음을 터트리며 공세에 가담했다.
“카카카카, 진즉 이랬어야 했어! 이놈! 네놈은 내가 죽여주마!”
몸을 날린 두 사람은 동시에 풍천을 노렸다.
위태곤은 백초령이 좋아하는 풍천을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싶었다. 시마충은 전부터 풍천의 팔다리를 부러뜨리고 싶었던 터였고.
풍천은 적들 중 가장 강한 두 사람이 동시에 자신을 노리자, 달궈진 불판에 앉은 사람처럼 펄쩍 뛰어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화 공자, 뭐하쇼! 전력을 다해서 뚫고 나가요!”
그는 통로로 통하는 길이 뚫리지 않자 화청백을 다그쳤다.
화청백도 급한 마음은 풍천과 다르지 않았다.
먼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자 둘을 물러서게 만든 그는 검을 움켜쥐고 좌우를 향해 소리쳤다.
“용 형, 구양 형, 내 좌우를 맡아주시오!”
용수명과 구양종이 화청백의 좌우에서 달려드는 자를 견제했다.
순간이었다. 화청백의 검에서 푸르스름한 검기가 안개처럼 피어났다.
화청백은 검기가 피어난 검을 앞세우고서, 통로를 막고 있는 신마호령단 무사들을 공격했다.
신마호령단 무사 둘이 화청백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졌다.
떠덩!
도검이 부딪치자 신마호령단 무사들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뒤로 튕겨졌다.
화청백은 오직 앞에 있는 자만 공격했다.
그의 좌우는 용수명과 구양종이 맡고, 후면은 비검당의 무사들이 방어했다. 중앙에 있는 백초령은 관악과 탁조원과 부양이 삼면으로 둘러싼 채 보호했다.
상황이 급변하자 신마호령단을 지휘하던 자가 나섰다.
그는 화청백의 검에서 피어나는 검기를 보고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단하구나, 화청백! 그 나이에 검기성형(劍氣成形)을 이루다니!”
화청백의 검기는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보인다는 것은 형을 이루었다는 말이며, 그 자체로 힘을 갖추었다는 뜻이었다.
천하오패천이라면 모를까, 그 정도 경지에 오른 고수는 대문파라 해도 다섯 명을 넘지 못했다. 그런데 완벽하진 않아도 화청백이 그러한 경지를 보인 것이다.
화청백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상대를 공격했다.
콰광!
신마호령단을 지휘하던 자는 화청백의 검력을 견디지 못하고 세 걸음을 물러났다.
그는 경악이 물결치는 눈으로 화청백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보기보다 더 지독하군!”
뒤로 한 걸음 밀려났던 화청백은 혼신을 다해서 공력을 끌어올리고는, 다시 일원천궁검을 펼쳤다.
“어디 막아봐라!”
그렇게 화청백이 통로를 뚫는 동안 풍천은 뒤쪽에서 위태곤과 시마청을 상대했다.
한 사람만 상대했다면 어려울 것이 목을 따 버렸을 것이다. 둘이라 해도 밀릴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주위 상황이었다. 장소가 좁은데다가 적과 동료가 사방에 널린 상황에서는 그의 마음대로 신법을 펼칠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밖이었으면 강시 늙은이를 정말 강시처럼 만들어줬을 텐데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불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틈날 때마다 신마호령단 무사들을 공격해서, 후면을 맡은 비검당을 도와주었다.
그럴수록 위태곤과 시마청은 풍천에게 치를 떨었다.
“개자식! 무공을 숨기고 있었구나!”
“이건 사기야! 어떻게 그런 신법이 있을 수 있지?”
“흥! 이걸로 놀라면 되나? 언제 기회가 되면 그 개눈깔이 튀어나올 만큼 놀라게 해주지, 강시 늙은이!”
풍천은 시마청을 놀리면서 시도 때도 없이 검을 뻗었다.
시마청과 위태곤은 갑자기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검을 피하느라 공격다운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쾅!
통로 쪽에서 굉음이 울리더니, 화청백을 막아섰던 자가 뒤로 나뒹굴었다.
뒤이어 용수명과 구양종이 전력을 쏟아내 신마호령단을 몰아붙였다.
“밀고 나갑시다!”
구출대는 백초령을 에워싼 채 신마호령단을 향해 밀려갔다.
상황이 악화되자 통로를 지키고 있던 귀혼신마대의 무사 십여 명이 안쪽으로 달려왔다.
화청백은 일원천궁검을 전력으로 펼치느라 진기가 많이 소모되었지만, 이를 악물고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모두 힘을 내서 통로를 뚫으시오!”
신마성 무사들은 구출대의 거센 공격을 받고 뒤로 물러나기에 바빴다. 그럴수록 화청백 등은 힘을 내서 더욱 강하게 몰아붙였다.
문제는 이십여 명이 움직이기에는 통로가 좁다는 것이었다. 십여 명이 뒤엉켰는데도 통로가 꽉 찼다.
언제 어느 때 누구의 칼날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 같은 편의 공격도 조심해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입구까지의 거리가 칠팔 장 정도 남았을 때였다. 입구 쪽에서 몇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가 맡겠다. 물러나라.”
그들 중 한 사람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며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다가왔다. 신마성 무사들은 방어에 치중하며 뒤로 물러섰다.
화청백은 나타난 자들을 보고 멈칫했다.
새로이 나타난 자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초로인 하나와 삼십 대 중반의 장한 넷. 그런데도 가슴에 무거운 쇳덩이가 얹어진 듯 답답했다.
“단주, 저희가 뚫겠습니다!”
그가 망설이는 사이, 뒤에 있던 탁조원과 부양이 먼저 앞으로 튀어나갔다.
구양종도 검을 움켜쥐고 두 사람을 바짝 뒤따라갔다.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강한 화청백의 무공에 충격을 받은 그는 가슴 저 깊은 곳에서 강렬한 호승심이 타올랐다.
‘내 진짜 실력을 보여주겠어! 지금까지는 화청백이 길을 뚫었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길을 뚫겠다!’
이를 악문 그는 전공력을 검에 주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