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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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7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44화
44화
그 모습을 보고 풍천이 중얼거렸다.
“지금 경치 구경할 땐가? 한가하기는…….”
화청백은 주위를 살펴보던 행동을 멈추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끄응, 정말 얄미운 소리만 골라서 하는군.’
풍천은 화청백이 어떤 생각을 하든 상관없이 황산의 경치를 감상하며 뒤따라갔다.
‘없는 사람을 찾아서 뭐하겠다는 거야?’
그런데 풍천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구양종이 기회를 잡았다는 듯, 풍천의 말을 흉내 내며 다그쳤다.
“자네! 지금 경치 구경할 땐가? 우리가 왜 여기에 왔는지 잊었나?”
풍천이 눈을 껌벅이며 대답했다.
“남이야 걸어가며 경치를 구경하든, 날아가는 황새 거시기를 보든 구양 형이 뭔 상관요? 내가 뒤로 처지기를 했어요, 아니면 가는 길을 방해했어요?”
일시지간 말문이 막힌 구양종은 말을 더듬으며 억지로 몰아붙였다.
“그, 그래도 초령 낭자를 구하러 왔으면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할 것 아닌가!”
“혹시 누가 숨어 있나 살펴봤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한 거요?”
“그, 그랬나? 그럼 말이라도 하지…….”
‘제길.’
구양종은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나선 자신을 탓하며 화청백의 뒤를 급히 따라갔다.
뒤에서 풍천이 비웃는 것만 같아 뒤통수가 뜨거웠다.
그때 풍천이 석초산을 향해 넌지시 말했다.
“경치 하나는 정말 끝내주네요. 그죠?”
석초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풍천을 상대해 봐야 이득 될 게 없다는 걸 만난 첫날부터 안 사람이었다.
‘저 자식하고 말 섞어봐야 나만 머리 아프지.’
연화봉까지 가는 길은 험하고도 험했다. 정상을 오르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래쪽에 가는 것인데도 그랬다.
일행은 하늘을 향해 솟구친 창날 같은 암봉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전진했다.
양쪽으로 펼쳐진 수백 장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아득하고, 그 사이사이는 구름이 휘어 감고 있었다.
가히 운해(雲海)를 헤엄쳐 가는 느낌.
인세를 벗어나 환상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연화봉 밑에 도착한 것은 미시(未時)가 지나 신시(申時)가 되었을 때였다.
“위태곤! 어디 있느냐!”
화청백이 소리쳤다. 목소리가 협곡에 메아리치며 한참 동안 울렸다.
바로 그때 휘파람소리가 들렸다.
휘이이익!
사람들은 광명정 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절벽 중간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귀혼신마대의 무사였는데, 그는 손을 들어 협곡의 안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침내 유령총이 지척이라는 생각이 들자 구출대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토록 험한 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백초령을 구하겠다는 의욕에 차서 왔는데, 갑자기 스산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이곳은 신마성의 영역. 저들이 약속을 지킬까?
놈들은 마인들이다. 마인들도 약속만큼은 쉬이 어기지 않는다하나, 그렇다고 해서 정파인과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수는 없었다.
“갑시다.”
화청백이 강하게 말하며 먼저 움직였다.
일행 모두가 그를 따라서 귀혼신마대 무사가 가리킨 쪽으로 향했다.
풍천도 그때만큼은 제법 신중한 표정으로 뒤따라갔다.
‘앞에는 신마성 놈들이 득시글거리고, 뒤에는 수상한 놈들이 침을 질질 흘리면서 따라오고……. 지미, 이제는 백초령 구하는 게 문제가 아니네.’
협곡 안으로 이백여 장을 더 들어가자 저만치 대여섯 명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구출대가 다가가자, 맨 앞에 서 있던 남호가 냉랭한 어조로 말하며 비웃듯이 입술 끝을 비틀었다.
“꽤나 굼뜨군.”
화청백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잔소리는 필요 없다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위태곤은 어디 있지?”
“계집을 구하겠다고 적진으로 들어오다니, 겁이 없는 건지 용기가 있는 건지 모르겠군.”
화청백의 목소리도 차가워졌다.
“그건 그대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위태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남호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화청백을 노려보았다.
그때 풍천이 말했다.
“자기 집 앞이라고 강아지 새끼처럼 짖어대는군. 신마성에는 전부 저렇게 주제를 모르는 사람만 있나?”
이번에는 화청백도 말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풍천이 한 말 중 제일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남호는 풍천을 쏘아보더니 몸을 돌렸다. 말싸움해 봐야 피곤한 놈이란 것을 익히 아는 것이다.
“따라와라.”
남호와 귀혼신마대는 협곡 안으로 다시 백여 장가량 더 들어갔다. 구출대는 십여 장 뒤처져서 그들을 따라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절벽 쪽으로 걸어가던 남호와 귀혼신마대가 넝쿨이 늘어진 절벽 속으로 차례차례 사라지는 것 아닌가.
사람들은 의아해했지만, 곧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겉에서 보면 온전한 절벽처럼 보였다. 그런데 가까이 접근하자, 암벽이 통째로 갈라지면서 생긴 틈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앞에는 넝쿨이 늘어져 있고, 넓이는 양팔을 벌리면 닿을 정도였는데, 수십 장 높이까지 그렇게 갈라져 있었다.
풍천은 위를 쳐다보면서 어쩌면 꼭대기까지 갈라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화청백은 틈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이제 정말 외길이었다. 다시 나올 수 있을지, 아니면 이 안에서 뼈를 묻을지 하늘만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안으로 들어갔다.
절벽이 통째로 갈라진 틈바구니는 이십여 장을 이어졌다.
그리고 삼십 장쯤 가자 조금씩 넓어지더니, 너비가 이십오륙 장은 될법한 계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까마득하게 높은 절벽의 중간에는 안개 같은 구름이 걸쳐져 있고, 구름 사이로 은은한 햇살이 비친다.
신비스럽게 보이는 광경에 구출대는 감탄을 하며 안쪽을 살펴보았다.
계곡 안의 계곡, 유령곡(幽靈谷)은 길이가 백여 장 정도 되어 보였다. 그런데 마주보이는 계곡의 끝에 인간의 손길이 닿은 구조물이 서 있었다.
높이는 십 장 정도. 뾰족한 세모꼴로 생긴 탑이 절벽에 붙은 채 서 있었다.
그 탑을 본 구출대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하단의 폭은 오 장 정도 되었는데, 가운데에 시커먼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한눈에 봐도 탑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구멍이.
―유령총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이가 절로 악물렸다.
그때만큼은 백초령이 잡혀 있다는 것조차 한순간 잊었다.
천하 삼대신비 중 하나가 저기 있다.
천 년이 넘도록 강호인들에게 속살을 드러내지 않았던 신비의 땅이!
‘후우, 드디어 유령총인가?”
숨을 크게 들이쉰 화청백은 멈췄던 걸음을 떼었다.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걸음을 옮겼다.
풍천은 탑을 빤히 쳐다보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 탑 자체가 유령총일까, 아니면 탑은 그저 유령총으로 들어가는 입구일 뿐일까?’
그런데 이상했다. 탑의 형상이 어디서 본 듯한 모습이었다.
‘꿈에서 봤나?’
탑 바로 앞까지 다가간 구출대는 눈이 절로 커졌다.
뾰족한 탑은 멀리서 볼 때보다 더욱 거대했다.
주위의 거대한 바위를 깎아서 쌓은 듯했는데, 탑 전체에 빼곡하게 새겨진 기기묘묘한 조각이 탑을 더욱 신비하게 만들었다.
고통과 죽음, 즐거움과 절정의 환희.
지옥과 극락이 교차하는 조각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바위에 박아놓은 것처럼 생동감 있었다.
거기에 은은한 햇살이 비치니, 바라보는 사람은 그야말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모든 충격적인 광경도, 입구를 바라보는 순간 뇌리 속에서 지워졌다.
“화청백, 죽음이 겁나지 않는다면 따라와라.”
입구 앞에 서 있던 남호가 비릿한 조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화청백은 잠시 남호의 등을 바라보고는 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석초산이 급히 그를 불렀다.
“화 공자…….”
화청백이 고개를 돌리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방법이 없잖소?”
“그래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때로는 죽음이 기다리는 줄 알면서도 가야 할 때가 있는 법이오. 위태곤이 약속을 어길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나에게 다른 선택이 없소.”
그때 구양종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우리도 여기까지 왔으니 할 만큼 했다고 봅니다. 이제 저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하지요.”
안으로 몇 걸음 들어갔던 남호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후후후, 겁이 나나 보군. 걱정 마라, 비록 우리가 마도라 하지만, 너희들에게 약속을 어길 정도는 아니니까.”
구양종이 눈울 부라리며 소리쳤다.
“앞에 있는 탑이 유령총이라면 이제 위태곤이 나와도 되지 않느냐!”
“우리 역시 유령총의 내부를 공개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도 안으로 들어오라고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정 겁이 나면, 너는 들어오지 마라.”
이를 악문 구양종의 얼굴이 벌게졌다. 이제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흥, 위태곤이 얼마나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인지 들어가서 확인해 봐야겠군. 화 형, 저도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코웃음 친 구양종은 화청백을 향해 말하면서 슬쩍 풍천을 바라보았다.
사람 속 긁기 좋아하는 놈이 웬일로 조용히 서 있는 게 아닌가.
기회였다.
“풍천, 두려우냐? 들어가기 싫으면 이곳에 있어라.”
풍천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탑 상단의 조각을 가리키며 기종탁에게 물었다.
“저어어기, 팔다리가 꺾인 채 울부짖는 사람이 있는데, 얼굴이 꼭 누구 닮은 것 같죠?”
기종탁뿐만이 아니라, 뒤쪽에 있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풍천이 가리키는 곳을 올려다보았다.
복잡하게 뒤엉킨 조각들 중에 정말 팔다리가 꺾인 채 울부짖는 얼굴이 있었다. 그 조각을 본 사람들이 구양종을 힐끔거렸다.
‘정말 비슷하네.’
다른 사람은 긴장해서 쳐다볼 정신도 없는데, 어떻게 저걸 찾아냈을까?
진짜 신기한 사람이었다.
구양종은 대충 상황을 짐작하고 이를 부서지도록 악물었다.
‘빌어먹을! 상종을 말아야 하는데, 내가 무슨 짓을……!’
결국 구출대 모두가 안으로 들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등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드디어 유령총으로 들어가는 건가?
죽고 사는 것은 머릿속에서 떠오르지도 않았다.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딛는다는 것. 그 자체가 생사마저 잊게 만들었다.
풍천 역시 사조원과 함께 따라가는데, 뭐가 그리 고민인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뭘 잊은 거지?’
하지만 그도 탑 안으로 들어가며 눈앞이 어두워지자, 일단 고민을 구석에 쑤셔 박았다.
4
구출대가 남호를 따라 탑 안으로 들어갈 즈음이었다.
육십여 명에 이르는 무사들이 절벽의 틈바구니 앞에 도착했다.
선두에 선 자는 틈바구니가 있다는 걸 잘 아는 듯 망설이지 않고 그 앞으로 다가갔다.
굵은 눈썹과 짙은 수염, 갈색의 피부와 각진 턱, 강철처럼 강인한 인상을 지닌 자였다.
‘석 달 만에 다시 왔군.’
적암단주 반소규는 무채색의 눈빛을 빛내며 틈바구니를 노려보았다. 그는 구룡회의 유령총 조사 당시 적련방에서 파견된 다섯 사람 중 하나였으며, 살아서 돌아간 십팔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거라 다짐했거늘, 생각보다 빨리 왔군.’
그가 절벽을 바라만 보고 있자, 가슴에 적련 세 송이가 수놓아진 무복을 입은 중년인이 물었다.
“반 단주, 저 안쪽에 또 계곡이 있단 말입니까?”
그는 적련방의 중추 무력인 구련당(九蓮堂) 중 철련당 당주 고대강이란 자로, 적련방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절정 고수였다.
반소규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렇소. 아마 안으로 들어가면 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