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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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4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42화
42화
“킬킬킬, 오냐, 이놈. 네놈을 죽인 다음 조금 쉬어야겠다.”
“쉬기 전에 일단 네놈의 주둥이를 찢어놓고…….”
오기산과 기독승은 살광을 번뜩이며 느릿하니 걸음을 떼었다.
풍천은 그들을 보며 이를 드러내고 하얗게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웃음이었다.
두 노인과의 거리가 일 장으로 줄어든 순간, 바람도 불지 않는데 풍천의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비단 장포가 펄럭였다.
찰나! 풍천의 몸이 대기 중으로 녹아드는 것처럼 흐릿해졌다.
막 공격하려던 오기산과 기독승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늙어서 눈이 침침해진 건가?
하지만 풍천을 제외한 다른 사물은 뚜렷하게 보였다.
기괴한 상황에 직면한 그들은 노회한 고수답게 무기를 휘두르며 일단 뒤로 물러나고 봤다.
“놈이 사술을 펼친다!”
“조심해!”
튕겨지듯이 뒤로 이 장 여를 물러난 두 사람은 눈을 부릅뜨고 풍천을 찾았다.
그때 풍천의 목소리가 그들의 귓속으로 동시에 파고들었다.
“편히 쉬게 해준다니까요?”
얼굴이 흙빛으로 물든 그들은 느낌이 조금만 이상해도 발작적으로 손과 무기를 휘둘렀다.
장력과 도기가 허공을 두드리고 갈랐다.
호숫가에 듬성듬성 자란 갈대와 잡풀들이 잘게 부서지면서 소용돌이치듯이 그들의 주위를 휘돌았다.
쉬지 않고 휘두르다 보면 언젠가는 걸리겠지!
공격권 안의 모든 것을 파괴하면 놈도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거다!
그런 마음이었다.
그러나 일대 십여 장을 폐허처럼 휩쓸어도 풍천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말만 그렇게 하고 도망간 것 아닐까?
손을 멈춘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비겁하게 사술을 쓰다니! 모습을 보여라, 이놈!”
“젊은 놈이 맞붙을 용기도 없느냐!”
그때였다.
욕을 퍼붓던 오기산이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동시에 그의 가슴에서 검첨이 툭 튀어나오고 핏물이 뿜어졌다.
“크윽!”
눈을 부릅뜬 채 이를 악문 오기산의 입에서 짓 씹힌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노오오옴!”
기독승은 오기산의 뒤를 향해 날아가며 기형도를 휘둘렀다.
오기산의 가슴에서 검이 튀어나왔다. 그렇다면 풍천이 오기산의 뒤에 있다는 말이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기독승의 도세는 허공만 가르고, 뱀의 혀처럼 갈라진 기형도를 움켜쥔 기독승의 팔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팔이 떨어져나간 곳에서 솟구치는 피분수!
“흐어억!”
안색이 흙빛으로 변한 기독승은 팔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오기산은 가슴이 꿰뚫리고, 기독승은 팔이 잘린 상황.
그제야 풍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약간 지친 모습.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그러나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는 그의 눈빛만큼은 오뉴월에 서리라도 내린 듯 차갑기 그지없었다.
“아마 지옥에 가도 심심하지 않을 거요. 나중에 동료들이 많이 갈 테니까.”
2
화청백 일행은 십 리가량을 쉬지 않고 달린 후에야 걸음을 늦추었다.
천혈궁 무사들은 추적해 오지 않았다. 하긴 이십여 명을 희생하고도 그들을 막지 못했으니 추적할 마음이 없을 것이었다.
겨우 숨을 돌린 그들은 부상자들부터 살펴보았다.
철저하게 방어 위주로 적을 상대한 덕에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화청백과 용수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래도 다섯 배나 되는 적들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 그 정도 부상으로 빠져나왔다는 건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이후였다. 또다시 공격받는다면 상황이 심각해질 것이었다.
과연 몇이나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후우, 풍천이 두 장로를 유인해 가지 않았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군.’
그들이 있었다면, 이곳에 있는 사람 중 반은 그곳에 남겨졌을 것이다.
화청백은 그걸 알기에 풍천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내가 너무 그 친구를 차갑게 대한 것 같군. 성격이 조금 이상해서 그렇지, 잔머리도 잘 쓰고 악하지도 않은 것 같던데……. 앞으로는 조금 부드럽게 대해 줘야겠어.’
말하는 게 조금 얄밉긴 하지만, 어쨌든 백초령을 구하겠다고 열심인 사람이 아닌가.
화청백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기종탁이 반가워하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조장님! 여깁니다!”
사람들은 기종탁이 손을 흔드는 곳을 바라보았다.
금방 숨넘어갈 것처럼 인상을 쓰고 있던 여공위와 백승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구양종 역시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풍천을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오기산과 기독승은 화양쌍검보다 한 수 위의 고수였다. 악독한 거야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하나도 아닌 둘에게 쫓겼으면서도 무사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정말 재수가 좋은 놈이야. 그 지독한 늙은이들을 떨치고 돌아오다니.’
일행이 있는 곳에 도착한 풍천은 먼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죽은 사람은 없었다. 제법 심하게 다친 사람이 몇 있었지만, 그 정도 피해야 어차피 각오한 터였다.
“모두 무사하군요.”
풍천이 화청백을 보며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화청백도 웃음을 지으며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운이 좋았네.”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두 늙은이를 유인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는데 말이죠. 하, 하, 하.”
얼굴도 두껍게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한다.
‘하여간…….’
화청백은 마음이 살짝 흔들렸지만 웃음을 지우지는 않았다.
“수고했네. 자네 말대로 그들이 있었으면 곤란할 뻔했어.”
“화 공자는 괜찮습니까?”
“나는 괜찮네.”
풍천은 째려보는 눈으로 화청백을 살펴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좀 더 열심히 싸우지. 그랬으면 두어 명은 덜 다쳤을 것 같은데…….”
저게!
화청백의 입가에 떠올라 있던 웃음이 일그러졌다.
네가 제대로 싸우지 못해서 다른 사람이 다쳤다는 투가 아닌가.
그래도 남자가 그 정도에서 흔들릴 수는 없는 일.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나도 열심히 싸웠네.”
“누가 뭐라고 했수? 그냥 그렇다는 말이지. 뭐 그 일 가지고 너무 자책감 갖지는 마쇼. 경험이 없다 보면 다 그런 거니까.”
뜻은 위로를 해주는 말인데, 말투는 영 아니었다.
화청백이 상기된 얼굴로 풍천을 노려보고는 몸을 돌리며 명을 내렸다.
“적이 언제 또 올지 모르니 이곳을 떠납시다.”
‘저런 놈은 절대 부드럽게 대해 줘선 안 되는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그때 풍천이 구양종을 보며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어? 구양 형도 거의 안 다쳤네?”
막 자리에서 일어나던 구양종이 눈을 부라렸다. 그는 화청백처럼 참지 않았다.
“그래서 불만인가!”
“거참, 무사해서 다행이란 말인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하쇼?”
풍천은 그를 째려보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구양종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그가 왜 모를까?
‘제기랄! 차라리 화 형처럼 가만히 있을 걸.’
자리를 털고 일어난 구출대는 곧장 장강을 건너기 위해 수향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배를 하나 빌려 타고 동릉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채 오 리를 가기도 전, 북쪽에서 삼십여 명의 무사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들을 보더니 풍천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 혼자 저들을 처리할 테니, 화 공자는 여기서 쉬고 있으쇼.”
달려오는 자들은 삼십 명이 넘었다. 더구나 가벼운 발걸음만 봐도 삼류 무사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혼자 상대하겠다고?
‘그래, 어디 죽지 않을 만큼만 혼나봐라.’
몇 사람은 그런 마음으로 풍천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중에는 화청백도 있었고, 수호검단 사람들도 있었다. 구양종이야 말할 것도 없고.
‘다 죽어갈 때쯤 내가 구해 줘야지.’
저도 사람인 이상, 은혜를 베풀면 알아서 모실 것이 아닌가.
하지만 비검당 사람들은 달랐다. 하는 짓이 얄밉긴 해도 같은 당의 조장이 아닌가.
석초산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힘을 합쳐서 상대하도록 하세.”
“걱정 마쇼. 저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풍천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검을 빼들었다.
창!
그때 뒤에서 나한조가 말했다.
“풍 조장, 대원보 사람들 같은데?”
“그래요?”
풍천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나한조는 달려오는 자들을 유심히 살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앞서서 달려오는 자가 대원보의 삼걸 중 하나인 원소진이네.”
“흐음, 난 또 천혈궁 놈들인 줄 알았네.”
풍천은 다행이라는 투로 말하며 검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구양종이 수상하다는 투로 말했다.
“이봐, 혹시 알고 있었던 것 아냐?”
“무슨 말입니까?”
풍천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속으로야 ‘그럼 내가 미쳤다고 혼자 삼십 명을 상대하겠다고 하겠어?’ 그런 마음이었지만.
구양종은 풍천의 행동과 말이 수상했지만 더 이상 따지지 못했다. 대원보의 무사들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어디서 온 분들이시오?”
선두에 선 원소진이 일행을 둘러보며 물었다.
화청백이 그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신검문의 화청백이라 합니다.
원소진의 눈이 한껏 커졌다.
“신검일수 화청백 소협? 허어, 이거 반갑소이다. 나는 대원보의 원소진이라 하오. 천혈궁 무사들이 근처에 무리 지어서 나타났다는 걸 알고 달려왔는데, 이게 어찌된 일이오?”
풍천은 옆에서 원소진을 쳐다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다 알고 온 거 같은데, 모르는 것처럼 묻기는…….’
부상이 심한 네 사람은 대원보로 보내기로 했다. 대원보라면 함께 움직이는 것보다는 안전할 것이었다.
부담이 덜어진 구출대는 곧장 수향진으로 향했다.
원소진은 대원보 무사 열 명으로 하여금 부상자들을 호위토록 하고, 구출대를 장강까지 호위하겠다며 따라왔다.
장강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는 상황. 화청백은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몸을 숨긴 자들은 화청백 일행이 대원보무사들과 함께 이동하는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제법 소식이 빠르군.”
“원소진이 직접 나오다니, 의외인데요?”
“순수한 의도는 아닌 것 같은데……. 하긴 상관없겠지. 어차피 이 일을 우리만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니까. 상황을 반 단주에게 알려라. 나는 저들을 계속 쫓겠다.”
“알았습니다, 당주.”
3
수십 채의 고루거각이 즐비한 곳에서도 가장 큰 전각의 이 층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거대한 황금빛 용상에 몸을 반쯤 눕히다시피 한 그 노인은 언뜻 보면 오십 대로 보였고, 또 달리 보면 칠십이 훨씬 넘은 것 같기도 했다.
나이를 짐작키 힘든 노인의 몸집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위엄 때문에 거대한 전각 안이 넓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남천신마(南天神魔) 혁련궁.
그랬다. 그 노인이 바로 천하오패 중 하나인 신마성의 주인이며, 북패천의 주인인 북천마존과 구마존의 첫째 둘째를 다투는 혁련궁이었다. 그리고 그가 있는 이 거대한 대전이 바로 신마성의 핵심부인 신마전이었다.
“둘째가 유령총 안에서 유령적의 진위를 확인하겠다고 제의했나 봅니다.”
혁련궁의 앞에는 뾰족한 도관을 쓴 회의 중년인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고 혁련궁의 답을 기다렸다.
천하의 남천신마 앞에서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사실만으로도 회의 중년인은 결코 범인이 될 수 없었다.
혁련궁도 회의 중년인을 인정하는지 그의 태도에 일말의 불만도 비치지 않았다.
“흠, 어리석은 아이는 아니니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저 역시 성주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소한 문제?”
“몇몇 세력들이 유령적에 대한 걸 알고 황산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
“이상한 일입니다. 둘째는 최대한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천혈궁에 도움을 요청하면서도 유령적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검문도 백초령의 안위를 생각해서 처음에는 다른 곳에 정확한 사실을 알리지 않은 걸로 알고 있지요. 그런데 그들은 신검문이 지원을 요청하기 전부터 움직였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는데 움직였단 말이지? 재미있군.”
“중간에서 비밀이 새어나갔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 쪽이라고 보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