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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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8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38화
38화
여인은 그를 놔주지 않았다.
쭈그렁 늙은이도 아니고, 돈 한 푼 없는 건달도 아니었다.
이십 대 나이에 비단옷을 입고, 그녀가 본 어떤 남자들보다 잘생긴 얼굴을 지닌 청년이었다.
그녀는 놓치면 죽는다는 각오로 풍천의 팔을 붙잡아서 자신의 가슴에 품었다.
풍천은 차마 그녀의 팔을 강제로 떼어내지 못했다.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몸을 던지는 여인을 내동댕이치기에는 풍천의 마음이 너무 여렸다.
여인의 풍만한 가슴 감촉이 좋아서 그런 것은 절대로! 진짜로! 아니었다.
‘가슴이 겁나게 크네.’
솔직히 그런 마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여인은 풍천이 강하게 뿌리치지 않자 결사적으로 달라붙었다.
“그러지 말고 한 잔 하고 가요, 공자님. 비싸게 안 받을 게요.”
“글쎄, 술을 마시러 온 게 아니라니까요?”
여인은 손바닥으로 풍천의 가슴을 툭 치고는 눈웃음을 지었다.
“아이, 응큼도 하셔라. 여자와 자려고 왔으면 그렇게 말하시지.”
헉! 그게 아니라니까!
하지만 풍천이 외치기도 전에 여인이 바짝 붙더니 빠르게 속삭였다.
“나를 따라와요.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하면 제가 천상에 오르는 기분을 느끼게 해줄 게요. 아마 어린애들하고 놀 때하고는 비교도 안 될 거예요. 어서 가요, 공자님…….”
눈 가장자리가 붉어지고, 입에서 단내가 풍겼다. 여인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달아오른 상태였다.
‘이 여자가 정말!’
풍천은 더 참지 못하고 여인의 팔을 강제로 떼어내려 했다.
바로 그때, 삼 층 계단 위쪽에서 장한 하나가 고개를 내밀며 손짓을 했다.
“그 손님을 놓아줘라. 나를 찾아오신 분이다.”
여인은 바로 풍천의 팔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냥 풀어주기에는 너무나 아쉬웠다.
“올라가서 제가 모실게요.”
그녀가 포기하지 않자 장한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풀어주라니까. 그 공자는 네가 상대할 분이 아니다. 주인을 부르기 전에 풀어줘라.”
여인은 그제야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풍천의 팔을 놓았다.
손님을 화나게 하는 여인은 며칠 동안 일을 못하게 하는데, 만약 그리되기라도 하면 그녀에게는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그녀는 삼십 명이 넘는 밀월루의 여인 중 나이가 가장 많았다. 얼굴도 예쁜 편이 아니었고.
당연히 찾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술 취한 뜨내기 아니면, 고약한 버릇을 지닌 손님만이 그녀를 찾을 뿐.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푼돈밖에 만질 수가 없었다. 그나마 그 돈도 주인에게 반을 바쳐야 했는데, 남은 돈으로는 두 아이와 병든 부모가 먹고살기에 빠듯했다.
그러니 며칠 동안 일을 못한다면, 두 아이와 부모가 굶어야 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풍천의 팔을 놓은 여인은 삼 층을 흘겨보고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올라가보세요, 공자님.”
풍천은 머쓱한 표정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삼 층으로 올라갔다. 다른 곳으로 옮겼으면 싶었지만, 이제 와서 이동하기도 어정쩡했다.
삼 층은 천으로 가려진 칸막이가 아니라, 완전한 별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풍천은 의자에 앉으며 실내를 둘러보았다.
붉은 등불이 구석에 걸려 있고, 사방 벽에는 요사스러운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남녀가 얽힌 그런 그림이.
그나마 여인이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아마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다 내보낸 듯했다.
고개를 돌린 풍천은 앞에 앉은 흑의 장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원래 이런 곳을 좋아하쇼?”
흑의 장한, 악진표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게…… 험,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 사실 나도 이런 곳인 줄 몰랐네. 아는 사람에게 조용히 이야기 나눌 곳이 없냐고 물었더니 이곳을 소개해 주지 뭔가.”
풍천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악진표을 째려보며 툭,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어떻게 나인 줄 알았소?”
“청부를 받아간 자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는데 자네가 신검문에 들어오지 뭔가. 혹시나 해서 역추적을 했더니 천풍장에 의외의 사람이 있더군.”
“의외의 사람?”
“당시 청부를 한 대원사에서 한 시진 동안 모두 서른한 명이 나왔는데, 그중 한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그곳에 살더군.”
결국 그 멍청한 영감 때문이란 말이군.
특급 청부를 맡았으면 최대한 조심해서 움직여야지 말이야, 왜 바보같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
‘만나면 그냥 콱!’
짜증이 난 풍천은 더 이상 그 문제를 따지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왜 만나자고 한 거요? 청부자와 직접 만나지 않는다는 게 본인의 원칙이란 걸 몰랐소?”
“서로의 안전을 위해선 그게 좋겠지. 하지만 워낙 급한 일이어서 어쩔 수 없었네.”
“급한 일? 백무천이 죽기라도 했소?”
“그게 아니네.”
“그럼 뭐요? 내가 맡은 일은 그거밖에 없는데. 설마 지금 돌아가서 백무천을 죽이라는 말은 아니겠죠?”
‘백무천이 너 같은 놈 손에 죽을 사람이냐?’
악진표는 언강생심, 그런 욕심은 부리지도 않았다.
“그도 아니면…… 계약을 파기하자는 거요? 흠, 그거라면 내 미리 말하는데, 계약금은 돌려줄 수 없소. 뭐 얼마 안 되는 돈이니 당신들도 돌려달라고 하지 않겠지만 말이오. 하, 하, 하.”
풍천은 나직이 웃으면서 ‘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했다.
그러나 악진표는 계약파기를 위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네. 내가 자네를 만난 것은 다른 일 때문이네.”
“다른 일? 다른 청부를 하겠다는 거요? 하아, 이거 내가 바빠서 다른 일은 맡을 수가 없는데…….”
“다른 청부를 하겠다는 게 아니라…….”
“뭐 그래도 청부금만 마음에 든다면 생각해 볼 수도 있지요. 하, 하, 하.”
선가장에서 준 돈이 있으니, 조금만 더 모으면 위약금을 갚을 수 있을 것이었다.
‘황금 열 냥짜리만 돼도……. 아니지, 기왕이면 스무 냥짜리 청부면 더 좋지. 물론 저번처럼 백무천을 죽이라는 어이없는 청부만 아니라면 말이야.’
그 정도면 위약금을 갚고도 남을 텐데.
‘남은 돈으로 집을 고쳐야지. 번듯해진 집에서 여우같은 마누라와 함께 토끼 같은 자식들을 키우는 거야. 흐흐흐흐.’
풍천은 행복한 미래를 떠올리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저 자식, 왜 저런 웃음을 짓는 거야?’
악진표도 슬슬 짜증이 났다.
어쩌다 저런 놈에게 청부를 해서…….
하지만 당장 아쉬운 것은 그이니 참는 수밖에.
그는 화제를 돌려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백초령을 구하기 위해서 유령총으로 가는 길이겠지?”
“어? 어떻게 알았습니까?”
“소문을 들었지. 그런데 유령적도 없을 텐데, 어떻게 구할 생각인가?”
유령적에 대해서도 알고. 좌우간 수상한 자들이었다.
“유령적이 없다고 누가 그럽니까?”
“내가 듣기로는 백무천에게 유령적이 없다고 하던데, 그게 아니란 말인가?”
“에이, 없으면 어떻게 백초령을 구합니까?”
풍천은 손사래까지 치며 말도 안 된다는 투로 말했다.
일단은 최대한 버텨야 했다. 가짜라는 게 벌써부터 알려지면 일이 복잡해질지 몰랐다.
“흐음, 유령적이 있단 말이지?”
악진표가 눈을 반쯤 감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자, 풍천이 불쑥 물었다.
“근데 왜 그 일을 궁금해하는 거요?”
“하하하, 천하에서 제일 신비하다는 유령총과 관계된 일인데, 관심을 갖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관심을 갖는 거야 누가 뭐라고 하나? 자신을 불러내서 한다는 말이 그 이야기니까 문제지.
“그 일 때문에 나를 불러낸 거요?”
“반은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럼 나머지 반은?”
“그야 첫 번째 청부에 대해서 할 말이 있기 때문이네.”
풍천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맛을 봤다. 달짝지근한 게 제법 값비싼 술 같았다.
“꽤나 비싼 술인가 본데요?”
“한 병에 은자 두 냥짜리니 싼 술은 아니지.”
풍천은 술잔을 내려놓고 악진표를 바라보았다.
“어디 말해 보쇼. 뭘 바라는 거요?”
악진표도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술잔을 내려놓더니 풍천을 향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벌어지는 일을 우리에게 알려주게. 물론 유령총에 도착한 이후의 상황도 알려줘야겠지.”
“얼마나 줄 건데요?”
대뜸 대가부터 묻는다.
그 자식, 돈은 되게 밝히는군.
악진표는 짜증이 났지만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황금 열 냥을 주겠네.”
“계약금으로 말입니까?”
“…….”
“설마 그게 다라는 말은 아니겠죠?”
이 자식이 돈독이 올랐나? 황금 열 냥이 어디 옆집 똥개 이름인 줄 아나?
하지만 그렇다고 말하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으음, 좋네. 그럼 이십 냥을 주지. 어때, 됐나?”
‘주군께서 뭐라고 하지 않으실지 모르겠군. 그래도 어차피 제거할 놈이니…….’
악진표가 나름 머리를 굴리는데, 풍천이 등을 의자에 깊숙이 기대더니, 턱을 쳐들고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유령총의 비밀을 황금 이십 냥에 사겠다? 너무 도둑놈 심보라는 생각이 안 드쇼?”
악진표의 눈에서 냉기가 쏟아졌다.
목구멍에 구멍이 뚫려야 정신을 차릴 놈이군!
그러나 풍천은 끄떡도 하지 않고 그의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눈깔에 힘주면 누가 겁먹을 줄 알고?’
오히려 목소리를 착 깔고, 하기 싫으면 마라는 투로 말했다.
“사실 유령적에 대해서 말한 것만 해도 황금 열 냥은 받을 만한 정보죠. 뭐 귀하도 그 정도는 아실 거라고 보고……. 일단 황금 스무 냥을 선불로 주쇼. 남경전장의 전표면 더욱 좋겠죠. 그리고 정보를 건넬 때마다 황금 열 냥씩 주쇼.”
이런 날도둑놈이 있나!
“말도 안 되는 소리! 세상에 어떤 정보가 황금 열 냥씩 한단 말인가?”
“유령총의 정보라면 하오문도 그 정도 돈은 줄 거요. 팔 때는 그 세 배를 받고 팔겠지만 말이죠. 당신들은 그만한 돈이 없나 보죠?”
악진표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나마 붉은 불빛 때문에 크게 표 나지는 않았다.
어딘가 모자란 놈 같아서 철저히 이용하고 제거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런 놈이어서 오히려 말이 통하지 않아 이용해 먹기가 쉽지 않다.
그냥 지금 제거해 버릴까?
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지금 죽이면, 자신도 주인에게 맞아죽을지 몰랐다.
악진표는 참을 인(忍) 자를 가슴에 새기며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열 냥은…… 너무 비싸네.”
“하기 싫음 말고…….”
“너무 억지를 부리는군. 자네도 정체가 밝혀지면 곤란해질 텐데?”
풍천은 눈을 치켜뜨고 악진표를 째려보았다.
“지금…… 협박하는 거요?”
“협박이라고 생각해도 좋네. 어차피 우리가 얻을 수 없는 정보라면 다른 놈들에게도 주고 싶지 않으니까.”
“후회하실 텐데?”
“후회는 자네가 하겠지.”
제법 세게 나오는데?
풍천은 그쯤에서 자신의 주장을 조금 굽혔다.
“좋습니다. 돈이 없다면 조금 깎아주죠. 한 건당…… 아홉 냥씩만 주쇼.”
“아, 아홉 냥?”
이 자식이 지금 장난하나!
악진표는 튀어나가려는 주먹을 가까스로 억제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머리가 지끈거리고, 심장이 벌떡거리며 터질 것 같았다.
“아직 상황파악을 못하는군. 나는 자네하고 장난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네.”
누군 장난하러 왔나?
“그럼 뭘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싫으면 여기서 이야기 끝내죠. 나도 가서 잠이나 자야겠수.”
그럴 수 없다는 게 악진표의 비애였다.
그는 이가 갈렸지만,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당장은 이십 냥 이상 줄 수가 없네. 일단 그걸로 시작해 보지. 자네의 정보가 정말 값어치 나가는 거라면, 내 위에다 말해서 받아주겠네.”
급할 게 없는 풍천은 일단 선금부터 챙겼다.
“그럼 일단 그 돈을 선금으로 주고, 위에다 연락해서 한 번 물어보쇼. 사실 유령총의 정보가 황금 열 냥이면 무지 싼 거요. 혹시 압니까? 인심 써서 더 주라고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