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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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7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34화
34화
5
적막이 감도는 신검전 안.
서신을 탁자에 내려놓은 백무천의 얼굴은 돌을 깎아 만든 것처럼 굳어 있었다.
서신은 회빈에서 긴급하게 날아온 것으로 곽구에서 벌어진 일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중 백무천을 경직시킨 내용은 다름 아닌 교환 장소였다.
‘유령총에서 교환하기로 했다고?’
다른 곳도 아닌 유령총이라니.
그 말인 즉 호랑이 입안으로 들어와서 교환하자는 말이 아닌가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백유현을 바라보고는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그날만큼은 백무천과 백유현, 단 두 형제만이 마주 앉은 상태였다.
백유현도 서신을 읽어보았기에 백무천 못지않게 굳은 표정이었다.
“너무 위험합니다. 청백이 왜 놈들을 막지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막지 못한 게 아니라, 막지 못했겠지. 초령이의 목숨이 걸려 있으니 말이야.”
백유현도 그 정도는 이해했다. 그러나 무리를 해서라도 무조건 곽구에서 교환을 성사시켰어야 했다. 백초령이 조금 다치더라도. 최소한 유령총까지 가는 것보다는 덜 위험할 테니까.
‘그 일에 대한 판단은 풍천이 옳았어.’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아니 이상하다기보다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해야 더 맞는 말이었다.
서신에는 유령적과 백초령을 교환하려 했다고 했다.
있지도 않은 유령적이 어디서 생겼단 말인가?
그에 대한 의문은 서신을 읽으며 간단히 해결되었다. 풍천이 회빈의 골동품점에서 사왔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상대는 유령적의 생김새를 모르는 듯 쉽게 속아 넘어갔다고 했다.
언뜻 생각하며 피식 웃음이 나올 내용이었다. ‘게으른 놈이 제법 재치가 있군.’ 그렇게 여기면서.
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뭔가 모순이 있었다.
풍천은 그 가짜 유령적을 진짜처럼 말하면서 상대를 속였고, 상대는 그의 말에 넘어가 가짜를 진짜처럼 생각했다고 했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형님, 아무래도 놈들이 진짜로 유령적의 생김새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야 서신에도 그런 것 같다고 적혀 있지 않은가?”
“단순 추측이 아니라 정말 그런 것 같단 말이지요.”
백무천은 등을 깊숙이 기대며 이마를 찌푸렸다.
“그들이 정말로 유령적의 생김새조차 모른다? 모르면서도 유령적을 요구한다? 흐음, 그거 참, 도무지 알 수가 없군.”
“그런데 초령이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풍천이 가짜를 자신만만하게 진짜처럼 내밀었다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백무천은 찌푸렸던 이마를 펴며 백유현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백유현이 백무천의 눈을 직시한 채 나직이 말했다.
“풍천은, 그들이 유령적의 생김새를 모른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풍천이 어떻게 그걸 안단 말이냐?”
“그래서 의문입니다. 만약 제 추측이 사실이라면, 아무도 모르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었다는 것인데…….”
백무천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서신의 내용대로라면, 풍천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제 역할을 충실하게 잘하고 있었다. 그것만 해도 어딘가.
나머지 의문은 나중에 풍천을 만나면 알 수 있을 터. 지금은 당장 알아낼 수 없는 일로 인해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놈들이 유령총에서 초령이와 유령적을 교환하겠다고 한 점이다. 풍천에 대한 의문은 나중으로 미루고 그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백유현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그것만 해도 그의 머리가 뛰어나지 않았다면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었다.
“유령총까지 가서 확인을 하게 되면 청백이 지닌 유령적이 가짜라는 게 탄로 날 것입니다. 그전에 초령이를 구해내야 합니다.”
“이미 하루가 지났다. 이삼 일 후면 유령총에 도착할 터인데 가능하겠느냐?”
“청백이도 유령적이 가짜인 만큼 시간을 벌면서 본문의 지원을 받으려고 할 겁니다. 저들은 초령이를 확보한 이상 여유가 있는 상태이니,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 하루 이틀 정도는 더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루 이틀이라……. 그럼 사흘에서 최대 닷새 정도군.”
“그 시간이면 원군을 보내서 청백이를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으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백무천이 생각해도 그 이상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좋아, 그럼 지금 즉시 회빈으로 전서구를 띄워서 청백이에게 시간을 끌라 하고, 지원할 사람들을 소집해라. 그리고 경천산장과 검각에도 도움을 요청해라. 소수의 정예 고수를 보내달라고 해.”
“예, 형님. 한데…… 구룡회의 나머지 세력에는 연락하지 않을 것입니까?”
“저번 유령총 조사가 실패하고 신마성을 자극하게 된 것도 몇몇 방파가 욕심을 부렸기 때문이었지 않느냐? 그들은 아마 초령이의 안전보다 유령총의 비밀에 대한 걸 더 욕심낼 거다. 그럼 초령이가 위험해질 수 있어.”
백유현은 백무천의 말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룡회는 천의맹과 신마성의 위협에서 살아남기 위해 손을 잡은 사이일 뿐, 신의로서 맺어진 단체가 아니었다. 아마 유령총에 대한 비밀을 차지할 수 있다면, 서로에게 검을 겨누고도 남을 세력이 적어도 셋 이상은 되었다.
“알겠습니다.”
백무천은 명을 내리고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백유현이 몸을 돌리자 나직이 물었다.
“유현, 최근 본문 내에서 이상한 바람이 일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그에 대해서 아는 게 있느냐?”
백유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형님. 혹 우려되는 게 있으면 소제에게 말씀하시지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으음, 아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아무래도 초령이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구나.”
백유현은 백무천을 잠시 바라본 후 다시 몸을 돌렸다.
‘이상한 바람이라…….’
제4장. 여기서 그만두면 노마가 비웃는다
1
풍천 일행은 육안에서 밤을 지내고 날이 밝자마자 남쪽으로 달렸다.
두 시진을 달린 그들은 장점, 모환을 지나 곧장 동성 쪽으로 향했다.
곽산이 멀지 않은 만큼 언제 천혈궁의 무사들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 신경이 곤두섰다.
위태곤이 천혈궁으로 하여금 도발하지 못하게 한다고는 했지만, 그들의 말이 모두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풍천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걱정은커녕 오히려 그런 상황을 은근히 바랐다.
‘놈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재미없는데…….’
하늘도 심심했는지, 동성이 백여 리가량 남았을 무렵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천혈궁 절혼당 당주 강도위는 인상을 쓰며 계곡을 바라보았다. 신검문의 무사 십여 명이 계곡을 통과하는 게 보였다.
평소라면 당연히 내려가서 놈들의 앞을 막고 차디찬 웃음을 지었을 것이었다.
‘저승으로 가고 싶어서 환장한 놈들이 호랑이 아가리에 대가리를 들이미는구나!’ 그렇게 소리치며.
하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신마성주의 둘째 제자인 위태곤이 사자를 보내서 그들을 통과시키라고 한 것이다.
“신검문 놈들을 그냥 보내줘야 하다니, 짜증이 나는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뛰쳐나가 피를 보고 싶거늘!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한 놈이 자신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저 자식들, 천혈궁 놈들이잖아?”
강도위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다.
‘저 자식들? 저 개자식이!’
말을 한 놈은 감청색 비단옷을 입은 젊은 놈이었다.
무사라는 놈이 비단옷을 입고 다니다니. 신검문의 간부 아들쯤 되나보군.
그렇게 생각한 강도위는 옆구리의 칼을 움켜쥐었다.
저런 건방진 놈을 그냥 곱게 보내면 강도위가 아니었다.
그는 목에 힘을 주고 냉랭히 소리쳤다.
“신검문 놈들이 이곳에 나타나다니. 간덩이가 부었구나!”
풍천은 숲 사이로 붉은 무복을 입은 자들이 보이자 상대의 신경을 고의로 건드렸다.
아니나 다를까 숲 안에 있던 자들이 곧바로 반응하는 것이 아닌가.
풍천은 ‘옳거니!’ 하면서 그들을 비웃었다.
“숨어 있는 놈들이 무슨 낯짝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풍 조장!”
화청백이 풍천을 말렸다.
마침내 천혈궁의 구역으로 들어온 상황. 놈들이 공격하지 않는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데 거꾸로 시비를 걸다니.
하지만 풍천은 태연했다.
“정말 놈들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지 한 번 시험해 보는 거요.”
“그래도 굳이 먼저 시비를 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앞으로 천혈궁 사람들과 자주 마주치게 될 거 아닙니까? 놈들의 마음을 확실하게 알아놓지 않으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겁니다.”
말은 그럴 듯했다. 속마음이야 전혀 딴판이었지만.
‘형의 원수들을 가만 놔둘 수는 없지!’
자신들만으로 천혈궁을 상대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어느 정도 기분풀이는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잘근잘근 밟아놓고 튀지 뭐.’
그런데 석초산이 바짝 다가와서 나직이 야단쳤다.
“쓸데없이 말썽피우지 마라, 풍 조장. 지금은 놈들과 다툴 때가 아니다.”
‘지미, 당신은 저놈들에게 당한 형이 없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겠지.’
풍천은 석초산을 쳐다보지도 않고 큰소리로 말했다.
“별것도 아닌 놈들이지만 오늘은 그냥 두라고요? 자라새끼처럼 바짝 겁먹은 놈들 혼내줘서 뭐하냐고요? 알았습니다, 그러죠 뭐.”
“내, 내가 언제……?”
석초산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은 그런 말을 입밖에 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강도위는 믿지 않았다. 얼굴이 벌게진 그는 칼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오냐, 이놈들! 내 죽이진 않아도 이대로 보내지는 않겠다!”
그는 앞장서서 숲을 헤치고 달렸다.
절혼당의 무사 삼십 명도 그의 뒤를 따라 달렸는데, 그들 중 하나가 강도위를 바짝 따라가며 말했다.
“저기 저 비단옷 입은 놈은 제가 맡겠습니다, 당주!”
“그 새끼는 내 것이다! 너희들은 다른 놈들을 처리해!”
강도위는 버럭 소리치고는 숲을 빠져나갔다.
풍천은 그들을 활짝 웃으며 반겼다.
“남자가 숨어서 조잘대면 안 되지, 아암!”
그러고는 화청백을 향해 소리쳤다.
“화 공자가 저 앞에서 달려오는 멧돼지 같은 놈을 맡으시죠!”
느닷없는 상황에 화청백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정말 대책 없는 놈이군. 조용히 지나가도 모자랄 판에 일을 벌이다니!’
그때 나한조가 강도위를 살펴보고는 머릿속에서 이름을 끄집어냈다.
“저자는 천혈궁의 절혼당주인 귀명도(鬼鳴刀) 강도위라는 잡니다, 공자.”
풍천이 강도위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 강하게는 안 보이는데, 저자가 당주란 말이죠?”
“칼에서 귀신의 울음소리가 나면 일대가 피바다로 변한다는 소문이 있는 자네. 조심하지 않으면 장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할 것이네.”
“하긴 자라치고는 덩치가 조금 크군요.”
강도위는 달려오던 그대로 칼을 빼들고는 풍천을 향해 몸을 날렸다.
“죽어라, 이놈!”
풍천은 뒤로 슬쩍 두어 걸음 물러섰다.
풍천을 공격하려면 화청백의 앞을 지나가야 할 판이다. 강도위는 별수 없이 화청백을 향해 도를 돌렸다.
피를 보기로 작정한 이상 한 놈 더 죽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별수 없이 화청백이 나섰다.
“어딜!”
화청백은 발검과 동시에 강도위의 도세 속으로 검을 밀어 넣었다.
따다당! 쩌정!
순식간에 삼초 구식의 변화가 일어나며 두 사람의 도검에서 불꽃이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