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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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0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31화
31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풍천은 어이가 없었다. 그 말은 곧 자신더러 죽음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신마성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약속? 훗, 납치범들의 약속을 믿으란 말이지?”
“네놈들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을 텐데?”
“싫다면?”
“그럼 별수 없지. 네놈들이 찾아올 때까지 유령총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단 그렇게 되면 백초령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 후후후, 하루에 손가락 하나씩 잘라서 보내줘도 백무천이 고집을 피울지 모르겠군.”
“네놈들이 원하는 건 유령적이 아니냐? 지금 여기서 교환하면 되는데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들려고 하는 거지?”
“나 역시 네놈들을 믿을 수 없으니까. 한 번 속인 놈들은 두 번도 속이는 법이거든.”
‘여우같은 놈! 의심은 더럽게 많군!’
풍천은 위태곤이 쉽게 넘어가지 않자 눈을 부릅뜨고 더욱 강하게 소리쳤다.
“어차피 초령이를 구할 수 없다면 유령적을 부숴 버리겠다. 그리고 모든 힘을 동원해서 신마성과 싸울 것이다. 그에 대한 책임은 모두 그대가 져야 할 거다!”
“흥! 그럼 네놈들도 여기서 모두 죽게 될 텐데?”
“누가 죽을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
풍천은 냉랭히 소리치고 검을 뽑았다.
스릉!
풍천이 워낙 강하게 나오자 위태곤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말 이 계집이 죽는 꼴을 보고 싶단 말이냐?”
“나도 이판사판이야! 유령적이 부서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초령이와 유령적을 교환해!”
위태곤은 검을 백초령의 목에 더욱 바짝 가져다댔다.
“피를 보고 싶다면 보여주지!”
백초령의 목이 검날에 눌렸다.
금방이라도 피가 튈 것 같은 광경!
풍천은 품속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 쳐들었다.
“피만 보여도 유령적을 부셔 버릴 거다, 위태곤! 초령아, 미안하다! 오빠를 이해해다오! 백부님께서 구룡회의 힘을 모아 네 원수를 갚아줄 것이니, 저 하늘에 가서라도 신마성 놈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아라!”
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절절한지, 위태곤은 백초령의 목에 대었던 검에서 힘을 뺐다.
이 상황에서도 굽히지 않다니. 정말 지독한 놈이었다.
‘저놈이라면 정말 유령적을 부술지 모른다.’
그러면 끝장이었다.
오늘의 이야기가 사부님의 귀에 들어가면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올 거고, 후계자는 사형으로 확정될 것이 분명하니까.
위태곤은 이를 지그시 악물고 풍천을 노려보았다.
‘독한 놈!’
‘누가 이기나 보자!’
풍천은 가죽 주머니를 쥐고 있는 손에 서서히 힘을 주었다.
가죽 주머니가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때 화청백이 손을 들어 풍천을 제지했다.
“잠깐만 멈추게!”
‘이 양반이! 분위기 잡고 있는데 왜 훼방을 놔?’
풍천은 홱 고개를 돌려 화청백을 노려보았다.
“이 일은 내가 책임자요!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당신은 가만히 있어요!”
화청백은 눈살을 찌푸렸다. 풍천에게 지휘 책임을 맡기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적을 속이기 위해 거짓으로 그런 것일 뿐이었다.
“이제부터 내가 지휘하겠네.”
“글쎄, 내가 지휘하기로 했잖습니까?”
“무엇보다 초령이의 안전이 중요하네. 자넨 이제 뒤로 물러서.”
‘지미, 저놈이 좋아할 말만 골라서 하는군.’
풍천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화청백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바람에 자신이 지금껏 띄워놓은 분위기가 공염불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위태곤의 표정을 훔쳐봤는데 이미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어디 맘대로 해보쇼.’
맥이 빠진 그는 입술을 씰룩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화청백이 나서며 말했다.
“유령적을 내줄 테니 초령이를 풀어줘라.”
위태곤은 흔들렸던 마음을 빠르게 진정시켰다. 그는 화청백의 말을 듣고 나서야, 신검문은 백초령의 목숨을 포기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마터면 저 교활한 놈의 술책에 넘어갈 뻔했군.’
오빠를 이해해줘? 원수를 갚아? 다 개소리였다.
은근히 화가 난 그는 더욱 오기가 생겼다.
“화청백, 유령적은 유령총에서 진위를 확인한 후 건네받겠다. 백초령도 그때 풀어주지. 나와 신마성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마.”
위태곤은 냉랭히 말하고는, 백초령을 끌고 쪽문 안으로 들어갔다.
화청백이 황급히 소리쳤다.
“위태곤, 멈춰라!”
“우리도 구룡회와 전쟁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게 진짜 유령적이라는 것만 확인되면 백초령을 무사히 풀어줄 것이니 유령총으로 와라!”
위태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쪽문이 닫혔다.
“멈춰!”
화청백이 쪽문 쪽으로 달려가려 하자 시마충과 남호가 앞을 막았다.
“못 간다, 화청백!”
“케케케케, 이공자의 말씀을 듣지 못했느냐? 백초령의 목숨을 살리려면 이공자의 말씀대로 해라!”
그때였다. 밖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리고, 진관악이 외쳤다.
“무슨 짓이냐! 단주, 괜찮습니까?”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움직이면 공격할 것이다!”
화청백이 밖을 향해 소리쳤다.
“관악! 우리는 괜찮다! 싸우지 마!”
정면 대결이 벌어지면 놈들이 백초령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자극해서 좋을 게 없었다.
화청백에게 공격할 마음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시마충은 비릿한 조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놈들이 허튼 짓을 하지 못하게 막아라!”
순간 양쪽 창문이 활짝 열리더니 흑의 무사 넷이 안으로 들어왔다. 대기하고 있던 귀혼신마대의 대원들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풍천은 그 찰나의 틈을 이용해서 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저 교활한 새끼가!”
시마충이 욕을 퍼부으며 풍천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이자는 내가 막을 테니 빨리 가서 붙잡아!”
화청백이 악쓰듯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싸우는 것과 위태곤을 붙잡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풍천이 위태곤의 걸음만 세운다면 다시 협상을 해볼 수 있을 것이었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시마충은 화청백을 무시하지 못하고 칼을 열십자로 휘둘렀다.
검기와 도기가 정면으로 부딪치며 얽혀들었다.
쩌저정!
귀청을 뒤흔드는 격전음. 시마충과 화청백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두 걸음씩 물러섰다.
그사이, 풍천은 쏘아진 화살처럼 날아가며 좌수를 내리쳤다.
퍽!
한 치 두께의 나무로 된 쪽문이 금간 살얼음처럼 갈라지며 무너져 내렸다.
찰나, 쪽문 안쪽에서 싸늘한 광채가 번뜩이고, 흑의 무사 둘이 풍천의 상하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이크!’
풍천은 일단 뒤로 물러나며 공격을 피했다.
동시에 뒤쪽에서도 흑의 무사 둘이 달려들었다.
바로 그때, 밖에서 날카로운 피리소리가 울렸다.
삐이이익!
그 소리가 울리자, 시마충과 남호는 물론이고, 흑의 무사들도 부서진 창문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마음이 급해진 풍천은 뒤의 공격은 놔둔 채 곧장 쪽문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신형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린다 싶은 순간, 쪽문 안쪽에 있던 두 사람의 시야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헛!”
“놈이……?”
두 흑의 무사는 눈을 홉뜨고 뒤로 물러났다.
순간 섬뜩한 감촉이 그들의 목을 스쳤다.
‘어, 어떻게……?’
‘마, 말도 안 돼!’
어떤 고수든 상대를 죽일 때는 살기를 흘리기 마련이다. 하다못해 공격을 하다 보면 기운의 흐름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공포에 질릴 만큼 강하든, 삼류 무사의 허세처럼 미약하든.
그러나 그들은 상대의 기운을 단 한 점도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요혈이 뚫렸다.
죽어가면서도 소름이 돋은 그들은 풍천에게 달려드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입을 달싹였다.
“아, 안 돼, 물러…….”
하지만 그들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한 줄기 바람이 동료 둘을 덮치는 광경이었다.
바람이 지나간 곳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하나는 가슴에서, 하나는 목에서.
풍천은 뒤따라 들어온 흑의 무사 둘마저 단숨에 처리하고는 곧장 정면으로 날아갔다.
밖으로 통하는 문이 보였다.
풍천은 날아가는 그대로 방문을 걷어찼다.
쾅!
문짝이 통째로 뜯겨지며 밖으로 날아갔다.
풍천은 날아가는 문짝 위에 올라탄 채 밖으로 나갔다. 마치 근두운을 타고 날아가는 손오공처럼.
뒷마당 쪽에 있던 십여 명의 흑의 무사가 그의 전면을 막았다. 안에서 나온 남호가 그들을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풍천을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풍천이 무사히 나왔다는 것은 안에 있던 수하들이 당했다는 말이 아닌가 말이다.
“거기 멈춰라! 더 쫓아오면 백초령의 몸에서 피가 솟구칠 것이다!”
바닥에 내려선 풍천은 그의 말을 한쪽 귀로 흘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위태곤과 백초령은 보이지 않았다. 피리소리를 듣고 떠난 것인지 앞쪽도 소란이 가라앉아 있었다.
“위태곤! 정말 유령적이 부서지는 걸 보고 싶은 거냐!”
풍천이 허공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곧 숲 안쪽에서 위태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와하하하! 내 뜻은 이미 전했다. 백초령의 잘린 머리를 구경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라!”
그때 앞쪽에 있던 구양종과 수호검단의 단원과 비검당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리고 문이 떨어져 나간 공자묘 쪽에서 화청백과 석초산이 뛰어나왔다.
남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두 사람이 나온 이상 안에 있던 네 사람은 모두 당했다고 봐야 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 이공자를 따라간다, 가자!”
그러고는 풍천을 다시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수하들은 풍천보다 두 사람에게 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풍천이 뛰어들지 않았다면 그들이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 아닌가.
“두고 보자, 이놈!”
그는 흑의 무사들과 함께 숲속으로 뛰어들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풍천은 그들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유령적이 가짜인 이상 유령총에 도착하기 전에 백초령을 구해야만 했다.
그런데 화청백이 다급히 소리쳐서 풍천을 멈춰 세웠다.
“멈추게! 초령이를 다치게 할 셈인가?”
멈춰선 풍천은 화청백을 바라보았다.
“쫓지 않을 겁니까?”
“나 역시 쫓아가고 싶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잡지 못한 이상, 놈들을 자극하는 것은 최대한 피해야 하네.”
풍천도 모르지 않았다. 수하들이 죽었으니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멀어질 때까지 놔둘 수도 없는 일. 풍천은 적당한 이유를 대며 화청백을 재촉했다.
“놈들이 천혈궁의 구역으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더 멀어지기 전에 쫓아가죠.”
숲을 바라보는 화청백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초령이의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것만큼은 절대 안 되네.”
누군 백초령이 다치는 걸 바라서 서두르는 줄 아나?
풍천은 짜증이 났다.
안에서도 자신을 막아 일을 그르치더니 또 막는다.
백초령의 안전을 걱정하는 걸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 놈들이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다. 비록 진짜는 아니지만.
‘이러다 진짜로 유령총까지 가는 거 아냐? 형도 유령총에서…….’
그때 문득 든 생각.
순간 풍천의 눈 깊은 곳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맞아, 형이 맡았다는 비밀 임무가 정말 유령총과 관계있는 것이라면…….’
아직은 추측일 뿐이다. 그래서 더 가보고 싶었다. 그곳에 가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리고 잘하면, 독에 중독되어 죽어간 형의 한을 풀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쫓아가긴 하되 서두를 이유가 없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멍청하게!’
문제는, 백초령이다.
백초령의 목숨이 걸린 일만 아니어도 좋았을 텐데. 하다못해 진짜 유령적만 있어도.
‘끄응, 이러나저러나 그 말썽꾸러기가 문제군.’
문주에게 고자질이나 하고, 매일 뒤나 쫓아다니며 귀찮게 하던 백초령이다. 성격도 더럽고.
그런데 묘했다. 미워하려고 할수록 백초령의 얼굴이 더 떠올랐다.
울먹이는 얼굴, 자신을 보고 감격에 겨워하던 눈빛…….
‘감격까지는 아니어도 무지 반가워했는데.’
두 가지 생각이 풍천의 머릿속에서 팽팽하게 맞섰다.
―백초령이 너에게 뭘 해줬는데? 백초령은 화청백에게 맡기고, 너는 형을 위해서 유령총을 조사해!
―남자가 그러면 안 되지! 백초령을 먼저 구해! 유령총은 나중에 조사해도 되잖아!
형이냐, 백초령이냐.
유령총에서 만나기로 작정하면 느긋이 움직여도 되었다.
부지런을 떨 필요가 없다는 점. 그게 가장 큰 유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