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6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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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7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65화
65화
몸을 억지로 일으키던 풍천은 떨어진 물건을 바라보았다.
형이 침대 밑에 숨겨둔 상자에서 얻은 목걸이였는데, 가슴을 적신 피가 스며들었는지 푸르스름하던 것이 붉게 변해 있었다.
그런데 그 목걸이를 본 순간, 그는 다시 한번 돌덩이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갑자기 뇌리가 멍해졌다.
‘서, 설마……?’
어이없는 가정을 떠올린 그는 갑자기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미친 듯이 웃어댔다.
“큭, 크크큭, 크크크크…… 미치겠군…….”
2
얼마나 지났을까.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온 풍천은 통로를 지나 석문 앞에 도착했다.
식은땀으로 온몸이 축축이 젖은 풍천은 피가 스며들어 붉게 변한 목걸이를 꺼내 들고 고개를 들었다.
석문 상단에 새겨진 열다섯 개의 신월이 보였다.
끝을 조금씩 잘라내면 그가 지닌 목걸이와 모양이 비슷했다. 그리고 목걸이에 난 구멍의 숫자도 신월에 있는 구멍의 수와 같았다.
‘이게 정말 진짜 유령적일까?’
십중팔구 그럴 가능성이 컸다. 형은 유령총에서 유령적을 주워오고도 무엇인지 몰랐던 것 같았다.
‘하긴 이곳까지 오지 못했다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겠지.’
자신이 진짜 유령적을 목에 걸고 다녔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머릿속에서 핏줄이 터져 죽을 사람이 족히 열 명은 넘을 것이다.
‘초령이는 나를 잡아먹으려고 할 거야.’
멍청이 때문에 생고생했다며 바락바락 욕설을 퍼부을 게 분명했다. 심하면 멱살을 잡고 흔들지도 모르고.
‘위태곤은 피를 뿜으며 뒤로 넘어질 거야. 크크크…….’
어디 위태곤이나 신마성 사람만 그러겠는가? 신검문의 사람들도 허탈감에 젖어서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풍천은 오랜만에 즐거워하며 미친 듯이 웃었다.
“크크크크, 와하하하하!”
눈물이 나올 만큼 실컷 웃은 풍천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았다면 저 문이 열리겠지.’
목걸이의 끝을 천천히 입에 가져다 댄 그는 목걸이의 구멍을 손가락으로 막고 불어보았다.
후우욱, 후우우욱.
“?”
열 번 정도 불어대자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은근히 오기가 생긴 풍천은 좀 더 세게 불어보았다.
후우우욱!
바람 빠지는 소리가 좀 더 크게 났다. 그 외에 다른 변화는 없었다.
부는 방법이 따로 있나?
‘지미, 피리를 불어봤어야 알지.’
풍천은 잠시 목걸이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구조를 살펴보았다.
입술을 대고 부는 곳 안쪽으로 약간 경사지게 갈라진 부위가 보였다. 아마도 공기가 그곳에서 갈라지며 소리가 나는 듯했다.
풍천은 목걸이의 끝에 다시 입술을 대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불어보면서 바람의 이동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았다.
그렇게 십여 번 불어보았을 때였다.
삐이이이.
조금은 서툴지만 피리소리가 났다.
풍천은 석문이 열리기라도 한 것처럼 뛸 듯이 기뻐했다.
“오호! 소리 좋은데?”
일단 소리를 낼 수 있게 된 이상 그 다음부터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풍천은 석문 상단에 새겨진 그림을 보며 그 순서에 따라서 목걸이를, 유령적을 불었다.
처음 불 때는 거친 소리가 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음색이 점점 맑아졌다. 그리고 곡조가 세 번째 반복될 즈음에는 그 소리가 어찌나 신비한지 유령적을 부는 풍천조차 기분이 묘해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풍천이 곡을 아홉 번째 반복해서 불고, 통로가 메아리치는 피리소리에 가득 찼을 때였다.
우우우웅!
석문 쪽에서 벌떼 날아다니는 소리가 났다.
풍천은 피리를 계속 불면서 눈알만 돌려 석문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그때였다.
쿠르르르릉.
천둥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석문이 느릿하게 돌기 시작했다.
풍천은 눈물이 절로 나올 만큼 기쁘고 목이 메었다.
석문이 열린다. 이제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이곳에서 바위에 깔려 죽지 않아도, 굶어 죽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래, 나는 단명할 상이 아니라니까!’
석문은 정확히 절반을 돈 다음 멈추었다.
풍천은 일단 가까운 곳의 등잔을 집어 들고, 반쯤 열린 석문을 보며 호흡을 조절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자, 엉망인 몸을 끌고 석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석문 안쪽은 짙은 안개와 어둠이 뒤섞여서 한 치 앞도 볼 수가 없었다. 등잔의 불빛도 안개에 반사되어서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를 맞이하는 건 괴괴한 적막감과 으슬으슬한 냉기뿐.
‘기분 더럽네, 정말 유령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잖아?’
하지만 풍천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다. 이제 죽으나 사나 안으로 들어가서 출구를 찾아봐야 했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열 걸음쯤 걸었을 때였다. 앞으로 내민 오른발이 허공을 짚으며 밑으로 푹 꺼졌다.
“으헉!”
대경한 그는 급히 왼발에 힘을 주고 버텼다. 명색이 천하제일을 다투는 신법의 고수가 볼썽사납게 꼬꾸라질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여기저기 엉망이 된 몸은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았다.
하루에 만 리를 나는 붕새라 한들 날개가 부러지면 참새만도 못한 법. 지금 그의 상태가 딱 그러했다.
사정없이 앞으로 꼬꾸라진 풍천은 비명을 내지르면서 날개 꺾인 참새처럼 손을 저었다.
“으아아아아아!”
안개 낀 어둠을 뚫고 수직으로 십여 장을 떨어졌다.
이제 진짜 죽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강렬한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다.
풍덩!
‘물?’
온몸을 얼려버릴 것 같은 차가움에 정신이 번쩍 든 풍천은 반사적으로 손을 저었다.
그의 몸은 물속으로 오륙 장을 잠겨들었다가 다시 떠올랐다.
허우적거리는 그를 백초령이 봤다면 아마 코웃음을 쳤을 것이었다.
‘장강의 수신(水神)? 수신이 다 얼어 죽었나보네.’
그렇게 말하면서.
푸악!
머리를 물 밖으로 내민 풍천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충격으로 인해 온몸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말짱했다.
“후욱, 후욱, 그래도 아직 죽을 때가 되지는 않았나보네.”
내심 안도한 그는 전후좌우를 둘러보았다. 온통 어둠뿐이었다.
그는 청광석을 꺼내기 위해 품속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곧 얼굴이 일그러졌다.
청광석이 하나도 없었다. 백초령이 그의 품속에서 꺼낸 후 다시 집어넣지 않았다는 게 그제야 떠올랐다.
‘으이그, 하나라도 남겨놓지…….’
맥이 빠진 그는 청력을 집중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불빛이 허공을 날아다니는 게 보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인광(燐光)인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불빛이 있는 곳으로 가면 물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불빛은 바위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으니까.
짐작했던 대로였다. 불빛을 따라가자 호수가 끝나고 바위가 손에 잡혔다.
바위 위로 올라간 풍천은 조금 전의 불빛을 찾아보았다.
바위에서 날아오른 불빛이 춤을 추듯 출렁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불빛의 움직임이 마치 따라오라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닌가.
풍천은 몸을 일으키고 불빛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아다니는 불빛은 모두 십여 개. 빛의 크기는 깨알만 했고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겨우 자신의 손금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의 밝기였다.
하지만 감각이 남다른 풍천에게는 그 정도 빛만으로도 움직이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최소한의 불빛이 있는 인근은 흐릿한 그림자로나마 상황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저벅, 저벅, 저벅…….
풍천은 행여나 다시 꼬꾸라질까 봐 검을 지팡이 삼아서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며 불빛을 따라갔다.
그때였다. 불빛을 따라가는 그의 머리 위 삼 장 높이의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눈이 나타나더니 그를 따라 움직였다.
3
지하는 풍천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깊었다. 한참을 걸은 것 같은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지하에 이러한 곳이 있다니. 혹시 기문진식에 갇힌 것이 아닐까? 오죽하면 그런 의심이 들었다.
그렇게 오십 장쯤 갔을 때였다. 두 다리가 먹먹해져서 더 이상 걷기가 힘들 지경이 되었을 즈음 저 앞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빛의 밝기는 매우 약했지만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마주친 그 빛은 풍천에게 희열에 가까운 희망을 안겨주었다.
풍천은 힘을 내서 빛이 흘러나오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빛은 반듯하게 뻗은 동굴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일 장 높이의 동굴은 안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는데 중간 중간 커다란 청광석이 벽에 박혀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인광처럼 보이는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청광석 때문에 보이지 않는 건가?
풍천은 좌우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다시는 그 불빛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저 안쪽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오……라…….”
사람 목소리 같기도 하고 단순한 바람 소리 같기도 했다.
풍천은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목소리의 정체가 뭐든, 어차피 그로선 동굴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동굴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길 이십여 장. 걸음을 멈춘 풍천의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거대한 광장이 앞에 펼쳐져 있었다. 직경이 족히 삼십 장은 되어보였고 높이도 십여 장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광장 곳곳에 아랫도리만 겨우 가린 수백 명의 남녀가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풍천은 눈을 두어 번 깜박이는 사이 광장에 있는 사람들이 산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우, 깜짝 놀랐네.”
그랬다. 온갖 자세를 취한 채 광장에 있는 사람들은 산 사람들이 아닌 석상들이었는데 바닥에 깔린 청광석으로 인해서 푸르스름하게 보였다.
‘여기가 바로 청광석이 나는 곳이었군.’
미로의 광장에 박혀있던 청광석도 여기에서 가져다 박아놓은 듯했다.
‘세상에, 청광석이 이렇게 지천으로 깔려 있다니! 하나만 가져가도…….’
풍천은 침을 꿀꺽 삼키며 석상을 둘러보았다.
석상이 취하고 있는 형상은 유령총으로 들어올 때 탑과 통로에서 봤던 것과 비슷했다.
석상의 얼굴에는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과 번뇌가 그대로 나타나 있어서, 한참 보고 있으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흐미, 유령총이라는 말이 거저 생긴 것은 아니군.’
하지만 놀람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등골이 오싹해진 그가 어깨를 가볍게 떠는데 등 뒤에서 음울한 목소리가 울렸다.
“한이 맺혀서 연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야.”
헉!
대경한 풍천은 홱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바로 그때 푸르스름한 빛이 출렁이는가 싶더니 허공에 눈의 형상이 하나 나타났다.
‘흡! 귀, 귀신?’
“후후후후…….”
조소가 나직이 울리면서 허공에 떠 있던 눈이 서서히 사라졌다.
물에 흠뻑 젖은 풍천의 몸이 잘게 떨렸다.
‘뭐지?’
그 사이 허공에 떠 있던 눈이 완전히 사라지고 광장 쪽에서 조금 전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령의 대지를 찾아온 자여, 이곳으로 와라.”
풍천은 다시 고개를 돌려 광장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광장의 끝에 조금 전에 본 눈이 떠 있었다.
귀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고개 한 번 돌리는 사이 수십 장을 움직일 수 있을까?
꿀꺽.
침을 삼킨 풍천은 그 눈을 바라보며 광장으로 발을 디뎠다. 한 발자국 움직이는 것도 힘들고 두려웠지만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설사 그곳이 지옥이라 해도.
‘귀신은 없어.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 겁먹지 마라, 풍천!’
초조한 표정의 그가 앞쪽에 있는 푸르스름한 석상을 몇 개 지난 직후였다.
앉아있는 석상 하나가 느릿하니 고개를 돌려 풍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