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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풍전설 64화

무료소설 천풍전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207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천풍전설 64화

 

64화

 

 

 

 

 

 

이를 악문 풍천은 등잔을 하나 들고 계단 위로 올라갔다. 붕괴가 멈춘 통로는 바위로 꽉 차 있었다.

 

꺼진 등잔에 불을 붙이고 앞쪽에 있는 바위를 몇 개 치우자 제법 커다란 틈이 보였다. 하지만 사람이 통과할 수 있는 정도는 안 되었다.

 

“제기랄.”

 

외마디 소리를 질러 짜증을 낸 그는 등잔을 한쪽에 놓고 바위를 들어내 틈을 넓혔다.

 

사람 몸뚱이만 한 바위를 몇 개 들어내니 드나드는데 불편이 없을 만큼 공간이 생겼다.

 

“후우…….”

 

공간을 쳐다보던 풍천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밖으로 나가려면 오십 장은 뚫어야 한다. 이곳에는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 굶어죽기 전까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제길, 일단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

 

고개를 저어서 불안감을 털어낸 그는 공간을 넓히며 바위를 들어내 지하 계단 쪽으로 치웠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 안 되면 지하의 석문을 부숴보는 수밖에.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죽는 것은 마찬가진데 뭐.’

 

 

 

3

 

 

 

한 시진 걸려 오 장의 통로를 개척한 풍천은 힘이 났다. 이대로 계속 통로를 만든다면 밖으로 나가는데 이틀 정도 걸릴 듯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오 장을 넘어가자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바위를 계속 꺼내야 하는데 거리가 멀어질수록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큰 바위는 들고 나가기가 더욱 힘들었다.

 

그런데 정작 큰 문제가 생긴 것은 세 시진에 걸쳐서 십 장 가량 통로를 만들었을 때였다.

 

콰르르릉.

 

커다란 암반을 받치고 있던 바위를 들어내자 암반이 무너졌다. 문제는 암반이 무너지면서 주위의 바위까지 함께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크!

 

대경한 풍천은 쏜살같이 통로를 빠져나왔다.

 

“휴우, 큰일 날 뻔했네.”

 

안도의 숨을 내쉰 그는 허망한 눈빛으로 통로를 바라보았다. 애써 만든 통로가 반쯤 무너져 있었다.

 

사흘 굶다가 겨우 빌어먹은 걸 체해서 다시 토해내는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체념할 수도 없는 일. 그는 다시 바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4

 

 

 

유령총에 갇힌 지 꼬박 하루가 지났다.

 

그동안 통로는 세 번 무너졌고 풍천은 그때마다 무너진 통로를 고집스럽게 뚫었다.

 

그렇게 하루 동안 뚫은 거리는 십이삼 장 정도. 그런데 하늘이 풍천의 집념을 외면해버렸다.

 

이번에는 아예 거대한 암반이 통째로 통로를 막아버린 것이다.

 

허탈해진 풍천은 암반을 원수처럼 노려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아, 지미 쓰벌! 지금 누구 참을성을 시험하자는 거야, 뭐야?”

 

마음 같아서는 바위를 두들겨 패서 깨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 겨우 뚫어놓은 통로 전체가 무너지는 것은 물론, 자신도 깔릴지 몰랐다. 아니, 분명 그렇게 될 것이었다.

 

아무리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해도 이곳에서 바위에 깔려서 죽을 수는 없었다. 차라리 굶어죽고 말지.

 

“제길! 결국 여기서 죽을 팔잔가?”

 

가만? 어차피 죽을 거라면 유령총으로 들어가는 석문을 부숴볼까?

 

“좋아! 나도 이판사판이라고! 여기서 그냥 물러서지는 않겠어!”

 

결정을 내린 그는 스스로를 다그치며 바위를 발로 찼다.

 

사실 암반의 크기를 생각하면 그 정도 충격이야 파리가 날아가 부딪친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거대한 암반 위쪽에 모래로 받쳐진 채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주먹만 한 자갈 하나가 툭 떨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자갈은 옆으로 튀더니 팔뚝만큼 길쭉한 돌조각을 때렸다.

 

자갈에 얻어맞은 길쭉한 돌이 옆으로 넘어지고, 넘어지던 길쭉한 돌과 바위 사이에 끼워져 있던 납작한 돌이 부딪쳤다.

 

그 충격에 납작한 돌이 바위 사이에서 밀려 나왔다.

 

뒤이어 위쪽에 있던 바위가 중심을 잃으며 앞으로 조금씩 미끄러졌다.

 

우르릉.

 

나직한 천둥소리.

 

슬쩍, 소리 나는 곳을 돌아다본 풍천의 두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층층이 쌓여 있던 바위들이 밖으로 밀려 나오고 있었다.

 

“으헉!”

 

헛바람을 집어삼킨 그는 뒤로 돌아서 정신없이 달렸다.

 

우르르릉, 콰과광.

 

등 뒤에서 바윗덩이들이 굉음과 함께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더니 입구를 삼 장 가량 남겨놓고 통로가 한꺼번에 무너지면서 그의 몸을 덮쳤다.

 

몸을 바짝 낮춘 풍천은 비명 같은 외마디 고함을 지르며 신형을 날렸다.

 

“안 돼!”

 

입구가 코앞에 보였다.

 

그때 무너지던 바위가 그의 옆구리를 정통으로 가격하고 날카로운 돌덩이 하나가 그의 뒤통수에 떨어졌다.

 

퍽!

 

“끄윽!”

 

거센 충격에 정신이 아득해진 그는 입구 쪽에 비스듬히 서있는 바위 아래쪽으로 튕겨졌다.

 

 

 

우르릉, 우르르……. 투두두둑…….

 

굉음이 잦아들고 잔자갈 떨어지는 소리가 간간히 메아리를 일으키며 지하 계단을 울렸다.

 

모든 소리가 잠잠해진 것은 한참을 지나서였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초입은 통로에서 쏟아져 나온 먼지로 뿌옇게 변한 상태.

 

꺼지기 직전까지 흔들리던 등잔불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아가고, 안개처럼 자욱하던 먼지도 힘이 다한 듯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풍천은 보이지 않고 죽음과 같은 적막감만이 유령총의 지하 계단을 감돌았다.

 

 

 

 

 

제5장. 형이 남긴 선물

 

 

 

 

 

1

 

 

 

“으으으음.”

 

진한 약향이 흐르는 지하 석실의 한쪽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구석진 곳에서 약을 달이던 노인은 고개를 돌려서 한쪽 구석에 있는 침상을 바라보았다. 얼굴과 목을 하얀 천으로 감싼 자가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클클클, 깨어났군.”

 

노인은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구부정한 허리, 수세미처럼 헝클어진 백발, 검버섯과 골 깊은 주름으로 뒤덮인 얼굴. 나이를 짐작기 힘든 노인은 다리를 절룩거리며 침상으로 다가갔다.

 

괴이하게도 얼굴과 목을 하얀 천으로 감싼 자는 침상에 검은색 줄로 칭칭 묶여 있었다.

 

침상 앞에 선 노인은, 묶여 있는 자의 얼굴을 감싼 천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천이 다 풀어지자 이제 이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청년의 불그스름한 얼굴이 드러났다.

 

노인은 청년의 얼굴을 한참 동안 꼼꼼하게 살펴보더니 청년을 묶었던 검은색 줄을 풀어주었다.

 

줄이 거의 다 풀어졌을 즈음 한 사람이 지하석실로 내려왔다.

 

무거운 표정의 중년인, 다름 아닌 백무천이었다. 지하 석실은 신검전 지하에 있는 그의 전용 수련실이었던 것이다.

 

침상 앞으로 다가간 백무천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상태는 어떻소?”

 

“다행히 두 사람의 체질이 비슷해서 부작용은 없는 것 같소이다. 살도 제대로 다 붙었고.”

 

“다행이구려. 모든 게 귀수괴의, 그대 덕분이오.”

 

백무천은 내심 안도하며 청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신이 들었으면 일어나보거라.”

 

천천히 눈을 뜬 청년은 상체를 일으키고 백무천을 향해서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사부님.”

 

백무천은 청년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네가 누구더냐?”

 

청년은 고개를 들더니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대답했다.

 

“저는 사부님의 둘째 제자, 영, 호, 관입니다.”

 

백무천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는 영호관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이름을 잊지 마라.”

 

“예, 사부님.”

 

대답하는 청년, 영호관의 눈빛이 무저갱처럼 깊어졌다.

 

 

 

2

 

 

 

툭, 투둑.

 

무너진 통로의 끝에서 자갈이 툭툭 튀며 계단으로 굴러 떨어진 것은 통로가 무너진 지 반 시진 가량 지날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자갈이, 조금 지나니까 머리통만 한 바위가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불쑥, 손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잠시 후.

 

암석더미에서 몸을 끌어낸 풍천은 벌렁 드러누워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후욱, 후욱, 후우…….”

 

바위가 뒤통수를 때렸는지 뒷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끈적끈적한 느낌이 느껴졌다.

 

‘살긴 산 건가?’

 

 

 

통로를 빠져나온 것은 천행이 아닐 수 없었다.

 

무너지는 바위에 부딪친 그의 몸이 입구 쪽 바위 밑으로 튕겨지지만 않았어도 온몸이 으깨졌을지 몰랐다. 바위가 비스듬히 기울어진 탓에, 천장에서 떨어지던 바위가 그를 덮치지 않고 입구의 바위와 인(人)자로 어깨동무를 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안전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공간이 워낙 협소해서 옴짝달싹도 못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더구나 암석 하나가 뒤통수를 때리는 바람에 정신마저 잃은 상태였지 않은가 말이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어둠속에서 정신을 차린 그는 눈을 깜박이면서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보이는 것도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오죽했으면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을까.

 

‘사부님, 저 살고 싶어요. 아직 할 일이 많거든요. 하늘에서 보고 계시다면 저를 도와주세요.’

 

장가도 가야하고, 집도 고쳐야 하고, 천풍의 맥도 이어야 했다.

 

풍천은 사부의 혼이 돌봐주기를 바라며 바위에 맞은 충격으로 흐트러진 기운을 다스렸다.

 

그런데 독맥을 따라 흐르던 진기가 풍부혈을 지나 위로 올라갈 무렵 뒤통수가 쪼개질 듯이 아파왔다.

 

불현듯 지난 일들이 떠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심지어…… 사부와 만나기 이전의 일마저 어렴풋이 생각났다.

 

단편적으로 떠오른 그 기억은 생경하기만 했다.

 

남의 기억이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도 아니면 자신이 지금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든지.

 

‘뭐, 뭐지?’

 

그는 곧, 그 기억이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순간, 견딜 수 없는 악몽을 꾸는 사람처럼 온몸이 떨렸다.

 

사부를 만나기 전, 자신이 왜 생판 모르는 곳에 있었는지 마침내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어릴 때 일을 제대로 기억 못하는 건…… 누군가가 그걸 원했기 때문이었어. 제기랄, 제기랄!’

 

풍천은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워낙 어린 시절의 일이어서 단편적인 기억뿐이었다. 그나마도 너무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어서 모든 것이 희미했다.

 

확실하게 생각나는 것은 자신을 쳐다보던 애처로운 눈빛과 그 눈빛의 주인이 남긴 마지막 말 몇 마디뿐.

 

 

 

“모든 걸 잊고 살아라. 성도, 이름도. 네 신세를 생각하면 차라리 그게 더 나을 것 같구나.”

 

 

 

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희미하게나마 떠올랐다. 이름도 모르고 어디 사는지도 모르지만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제 자신에게도 떠올릴 수 있는 부모님의 모습이 생긴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한참 만에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물이 마른 그의 눈 깊은 곳에서 잔잔한 파도가 일었다.

 

‘급하게 서둘지 말자, 풍천…….’

 

중요한 것은 살아 있다는 것, 기억의 봉인에 금이 갔다는 것이다.

 

‘몸이 나은 다음에 천천히 떠올려보면 더 많은 기억을 되살릴 수 있을 거야.’

 

그는 일어나기 위해 몸을 뒤집었다.

 

온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팔꿈치로 바닥을 짚은 그는 몸을 조금 일으켰다. 극렬한 통증이 전신을 치달리며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한 부상을 입은 것 같다. 뒤통수뿐만이 아니라 이마도 찢어져서 얼굴과 가슴이 온통 피로 젖어 있었고 팔다리는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다.

 

‘이거 굶어죽는 게 아니라 피가 다 빠져서 죽게 생겼군.’

 

생각할수록 암담하고 착잡한 마음에 절로 힘이 빠졌다.

 

툭.

 

그때 뭔가가 품속에서 빠져 바닥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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