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6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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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3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61화
61화
광장의 석문도 두께가 석 자나 되었다. 더구나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청석이 아닌가.
아마 이곳의 석문은 더욱 두꺼울지 몰랐다.
‘이 정도면 문이라고 하기보다 벽이라 해야 옳겠군.’
어떻게 이런 문을 만들 수 있었을까? 무게만 해도 수만 관은 나갈 텐데.
풍천은 유령총을 만든 자들에 대해 감탄하면서도 오기가 생겼다.
석문과 마주 선 그는 운기를 해서 손바닥에 팔성의 공력을 모았다. 그 정도 공력이면 결을 제대로 찾을 경우, 석문에 강한 충격을 줄 수 있을 것이었다.
‘자, 어디 볼까?’
숨을 몰아쉰 그는 석문을 노려보며 결을 찾았다. 바위 특유의 무늬가 희미하게 보였다.
씩 웃은 그는 공력이 집중된 손으로 석문을 후려쳤다. 머리통만 한 바위도 단번에 박살내버릴 수 있을 만큼 강하게!
퍽! 퍽! 퍽!
그러고는 석문에 귀를 바짝 댔다.
웅웅웅!
은은한 울림이 석문 저 안쪽에서 울리는 듯했다.
‘다섯 자 정도 되겠는데?’
광장의 석문과 두 자 정도의 차이. 그 정도면 시간이 걸릴 뿐 부수지 못할 것도 없다. 야금야금 파 들어가면 될 테니까.
‘좋았어,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거지 뭐.’
풍천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그가 즐거워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석문에서 시작된 울림이 곧 통로를 타고 번지는가 싶더니, 통로 전체가 무너질 것처럼 울어대는 것이 아닌가.
우우우웅!
울림은 단순히 울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통로의 천장에서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작은 돌가루들이 우박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쩌저적, 투둑! 투두두둑!
천장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상황.
“풍천! 무슨 짓을 한 거야!”
백초령이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풍천도 깜짝 놀라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뭐, 뭐야? 왜 이러지?”
통로의 울림은 열을 셀 시간이 지나서야 멈췄다. 천장에서 떨어지던 돌가루도 더 이상은 떨어지지 않았다.
풍천은 그제야 신마성이 왜 석문을 부수지 않고 유령적을 얻어서 열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석문에 충격을 주면 통로 전체가 무너질지 모르는 것이다.
‘휴우, 큰일 날 뻔했네. 유령적이 없으면 열 생각을 말아야겠군. 가만, 혹시 광장으로 통하는 석문도 부수면 통로가 무너지는 것 아냐?’
그럴지 몰랐다.
‘제길, 그럼 놈들이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건가?’
분명 밖에서 문을 여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랬으니까 운조평이 석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을 것이 아닌가?
하지만 밖에서 석문을 열 수 있다 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위태곤과 두 늙은이들이 밖에서 기다릴 거야. 고집이 보통이 아니게 생겼거든?’
싸움이 끝난 후라면 빠져나갈 가능성이 희박해진다.
혼자라면 가능성이 반반은 된다. 그러나 백초령과 함께라면 반반의 가능성이 불가능으로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혼자라도 도망칠까? 설마 내가 도망쳤다고 초령이를 죽이지는 않겠지? 위태곤이 초령이를 좋아하는 눈치던데…….’
그런데 위태곤과 백초령이 다정하게 서 있는 장면을 떠올리자 갑자기 화가 났다.
‘안 돼! 그 자식은 성격이 더러워서 초령이를 무지 괴롭힐 거야!’
그때 백초령이 그의 앞으로 다가오며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풍천, 이제 어떡하지?”
풍천은 코앞까지 다가온 백초령을 똑바로 바라본 채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나만 믿어.”
순간 백초령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그 말 한마디에, 힘껏 잡아당긴 활시위처럼 팽팽하던 긴장이 거짓말처럼 풀어진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마음이 편한 걸까?
누군가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게 이렇게 좋은 기분이라니. 가슴은 또 왜 이렇게 울렁이는 거지?
생경한 느낌이지만 싫지는 않다.
‘아이, 눈이나 돌리고 말하지, 부끄럽게…….’
기분이 한껏 달아오른 백초령은 상대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풍천인데도 그의 말을 무조건 믿기로 했다.
“알았어, 풍천만 믿을게.”
간드러지게 대답하는 그녀의 얼굴에 복사꽃이 피었다. 입에서 복숭아향이 나는 듯했다.
‘입술까지 부딪쳤는데 뭐, 당연히 믿어야지…….’
아마 백무천이나 백서령이 봤다면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풍천은 그 모습을 보고 덜컥 겁이 났다.
‘얘가 왜 이래?’
아무래도 뜻이 잘못 전달된 것 같다. 자신은 그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위태곤에게 넘기는 일만큼은 절대 없을 거라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인데…….
아니나 다를까, 백초령이 물기 가득한 눈으로 말한다. 자신의 눈을 직시한 채 입에서는 복숭아향을 풀풀 풍기며.
“우리,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
그 순간 풍천은 혼자 도망치기는 다 틀렸다는 걸 직감했다. 그 어느 때보다, 그 어느 여인보다 백초령이 아름답게 보인 것이다.
처음 들어보는 닭살 돋는 목소리에 속이 갑자기 울렁거린 것도 백초령의 아름다움을 희석시키지는 못했다.
활짝 피어난 난초에 이슬이 맺힌 것 같다. 선녀도에 그려진 선녀가 따로 없다.
‘젠장! 내 눈에 뭐가 씌었나? 이 여자가 왜 이렇게 예쁘게 보여?’
바닥에서 출렁거리는 안개 때문일 거야. 불빛이 약해서 눈이 잠시 흐려진 거겠지. 한동안 업고 다녀서 그런 거겠지 뭐. 설마 정말로 예뻐서 그런 것이겠어?
하지만 보면 볼수록 그녀의 아름다움은 더욱 빛을 발해서 나중에는 심장 박동이 고막을 울릴 지경이었다.
‘후우, 가슴이 미쳤나. 왜 이렇게 두근거려?’
업고 있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보자 백초령이 붉어진 얼굴을 만지며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봐? 뭐 묻었어?”
흠칫한 풍천은 짐짓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음, 하, 하! 아, 아냐…… 죽긴 왜 죽어? 걱정 마, 우린 살 수 있을 거야! 나만 믿으라니까?”
이제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위로 올라가서 광장으로 통하는 석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아니면 이판사판 때려 부수든지.
밖에 적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을지 모르지만, 통로가 무너질지 모르지만,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 죽이 되건 밥이 되건 한번 해보자고!’
차라리 그렇게 마음을 정하니 속이 편했다.
4
풍천은 백초령과 함께 지하를 빠져나가서 다시 광장으로 통하는 석문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석문과 삼 장 가량 떨어진 곳에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멀리 떨어지지 않고 나란히 앉았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었다. 그냥 앉았다 싶었는데, 거리가 한 자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정좌를 한 풍천은 죄 없는 석문만 노려보았다. 백초령과 나란히 앉아 있으니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업고 다닐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자리를 옮기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 어색해서 그렇지,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직도 싸우겠지?”
백초령이 먼저 물었다. 공력이 약한 그녀는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어? 어, 그런 거 같아.”
풍천이 움찔하며 대답했다. 너무 가깝다보니 백초령의 입에서 나는 냄새가 더욱 확실하게 맡아졌다. 더구나 그는 개코가 아닌가.
‘뭘 먹어서 이렇게 냄새가 좋지?’
하긴 부자였으니까 좋은 것만 먹었겠지.
그가 백초령 몰래 코를 킁킁거리며 ‘다시 한번 입술을 부딪쳐볼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백초령이 물었다.
“풍천, 밖에서 나는 소리 들을 수 있어?”
“조금. 너무 울려서 무슨 말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어.”
그래도 다행이었다. 아직까지 소리가 들린다는 건 유령총에 들어온 사람들이 나름대로 강하게 버티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백초령 앞에서 자신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만 믿으라니까.”
그 한마디에 백초령은 보다 편해진 웃음을 지으며 바닥을 손가락으로 죽죽 그었다.
“풍천, 우리 언니 어떻게 생각해?”
“서령 아가씨? 그야 아름답고, 똑똑하고, 마음씨도 좋고, 최고지 뭐.”
풍천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도 ‘너보다야 훨씬 낫지.’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전만 같았어도 거리낌 없이 그렇게 말했을 텐데…….
백초령은 그런 풍천을 슬쩍 흘겨보았다. 속이 다 보였다.
“언니가 나보다 훨씬 아름답고, 똑똑하고 마음씨도 좋게 보여?”
“응? 아니, 뭐 꼭 그렇다기보다…….”
풍천은 슬쩍 백초령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이 그런데 뭐.
백초령은 모른 척 다른 질문을 했다.
“언니하고 사마 당주님하고 어떤 사이였는지 알지?”
“물론이지.”
“그럼 언니에게 정혼한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건 알아?”
“응? 그건 모르는데?”
처음 듣는 말이었다. 연서를 다 읽어봤지만 어디에도 그런 말은 없었다.
‘하긴 사랑하는 사람에게 연서를 보내면서 정혼자 이야기를 하는 여자가 어디 제정신이야?’
풍천이 쳐다보자 백초령이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나직이 입을 열었다.
“사실 언니는…….”
그때였다. 풍천이 손을 들어 백초령의 입을 막고는 고개를 돌려 석문을 바라보았다.
석문 가까운 곳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크기는 모기 날갯짓보다 작았지만 풍천의 예민한 감각은 그 목소리를 바로 잡아냈다.
“잠깐만 기다려.”
풍천은 백초령에게 나직이 말하고 석문으로 날아갔다. 그러고는 귀를 대고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좀 더 자세하게 들었다.
위태곤의 목소리가 석문을 통해 고막을 울렸다.
“사숙, 석문을 부수면 정말 기관이 발동해서 통로가 무너질 거라 보십니까?”
뒤이어 운조평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기자가 그리 말했으니 믿는 수밖에. 실지로 지하의 석문을 부수려 했을 때도 통로가 무너질 뻔했지. 벽을 뚫고 들어가려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아무래도 유령총을 만든 자들은 자신들의 세상이 강제적으로 침범당하는 걸 원치 않는 것 같다.”
“미로는 다르지 않았습니까?”
“그곳과 이 안쪽은 만든 사람이 다른 것 같다. 미로는 탑을 만들면서 새롭게 만든 것이고, 유령총을 여는 문은 그보다 훨씬 전에 만든 것이라고 마기자가 그러더군.”
“제길, 그럼 별 수 없이 놈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겠군요.”
“석문을 여는 기관이 고장 났으니 별수 없지. 그깟 놈 하나 때문에 목숨을 걸고 석문을 부술 수는 없는 일 아니냐?”
“상황은 어떻습니까?”
“아직 놈들이 안에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미로에 유령총이 있는 줄 알아.”
그때 위태곤이 의아해하는 투로 말했다.
“음? 이게 무슨 소리죠?”
말을 받는 운조평도 목소리가 굳어 있었다.
“아무래도 미로에서 변화가 생긴 것 같다. 나와 등 형님이 가볼 테니, 너는 시 장로와 함께 여기 있어라.”
“알겠습니다, 사숙.”
그 후로는 한동안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풍천은 더 이상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석문에서 귀를 떼었는데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밖에서 문을 여는 기관이 고장 났다고?’
기관은 안쪽만 고장 난 것이 아니었다.
맙소사! 그럼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봐야 헛수고라는 말이 아닌가?
“풍천,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어?”
백초령이 풍천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풍천은 백초령을 바라보았다. 차마 기관이 고장 나서 꼼짝없이 갇혀 죽게 생겼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미, 결국 모험을 해야 한다, 이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