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6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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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0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60화
60화
그는 슬쩍 고리를 잡아당겨 보았다.
스르르르.
고리에 매달린 사슬이 힘없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풍천은 구멍에서 다 빠져나온 사슬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사슬의 길이는 석 자 가량 되었는데, 역시나 이음매 부분이 늘어져서 끊어져 있었다.
백초령이 그걸 보고는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되긴? 꼼짝없이 갇힌 것이지!’
“왜 그걸 끊어?”
‘끊긴 누가 끊어? 이미 끊어져 있던 거지.’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그걸 알면 뭐하러 고민 하냐?’
미칠 일이었다.
‘제기랄!’
철컹.
풍천은 고리를 바닥에 던지고 안쪽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유등불빛을 따라 통로 저 끝에 암울한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희미한 빛이 아래쪽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곳. 그 안에서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했다.
백초령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유령총에 대해서 잘알아?”
“내가 어떻게 알아? 너는? 위태곤과 한동안 함께 있었을 텐데 뭐 아는 거 없어?”
“그 인간이 시도 때도 없이 아혈을 짚어놔서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했어.”
“하긴 너한텐 차라리 그게 낫지.”
“뭐가 나아?”
“아혈을 풀어놓았으면 속을 박박 긁었을 거 아냐? 그럼 위태곤이 가만 두었겠어?”
“어, 그렇긴 한데…….”
“또 모르지, 그 인간이 너를 좋아한다면. 어? 가만.”
풍천은 무심코 말하다가 백초령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런 눈으로 봐?”
“혹시 말이야, 그 인간이 정말로 너 좋아하는 거 아냐? 너를 잡으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들던데.”
“뭐?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 그 변태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근질거리니까!”
“변태? 왜 그자를 변태라고 부르지? 그 인간이 너한테 못된 짓이라도 했어?”
“그, 그런 거 없어! 그냥 내가 싫어서 그렇게 부르는 거야! 안 갈 거야?”
아니면 아니지, 소리는 왜 질러?
다시 현실로 돌아온 풍천은 통로의 안쪽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길이 없으면 어떡하지? 저 석문을 부수고 나가야 하나?’
석 자 두께의 석문이 아무리 단단하다 해도 마음만 먹으면 부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시간이야 조금 걸리겠지만.
그러나 밖에는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자들이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리고 더 마음에 걸리는 점은 밖에 있는 자들도 석문을 부술 능력이 충분히 되는데, 아예 시도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왜 저들은 석문을 부수려 하지 않는 걸까?
자신들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걸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저들이 유령적을 원한 것은 어딘가의 문을 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유령적이 가짜였기 때문에 저들도 문을 열지 못했다.
결국 통로가 막혀있다는 말. 그렇다면 저들로서는 급할 것이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나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아니면 굶어서 죽든가.
제길! 굶어죽는 건 진짜 싫은데.
‘에이, 일단 안쪽부터 살펴보고 석문을 부수는 것은 나중에 생각해보자.’
풍천은 의문을 구석에 처박아놓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초령은 뒤를 바짝 따라가며 풍천을 힐끔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있긴 있어. 내가 아무리 욕해도 실실 웃기만 하고…… 그 재수 없는 변태가 정말 나를 좋아하는 거 아냐?’
그녀는 절대 그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풍천이 알면 비웃을 게 뻔했다.
3
안쪽으로 이십여 장을 전진한 두 사람은 은은한 불빛이 아래쪽에서 흘러나오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부터는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야만 했다.
풍천은 백초령을 바라보았다. 겁에 잔뜩 질려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태연한 표정이었다.
“길이 지하로 이어져 있나본데, 내려가 볼까?”
백초령은 계단 쪽으로 머리를 쑥 내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질이 되어 보낸 엿새의 시간. 절망스런 상황에서도 악으로 버티면서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상황이 훨씬 나았다. 옆에 풍천이 있지 않은가.
그녀는 풍천과 나란히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했다.
‘이 무뚝뚝한 인간은 내가 저를 좋아하는 줄도 모를 거야.’
그렇다고 자신이 먼저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자의 자존심이 있지.
풍천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계단에 발을 디뎠다.
“조심해서 따라와. 방정떨지 말고.”
‘남 말하고 있네.’
백초령은 풍천을 흘겨보고 허리를 폈다.
“걱정 말고 앞장 서. 너보단 침착하니까.”
‘하여간 무슨 여자가 지려고 하지를 않아. 쳇, 내가 미쳤지, 저런 여자를 구하겠다고 여기까지 와서 이게 무슨 짓이야?’
입술만 부딪치지 않은 사이라면 한마디 해줄 텐데…….
풍천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백초령은 슬며시 풍천의 옷자락을 잡고 뒤를 따라갔다.
계단은 구불구불했다. 천연동굴을 가공해서 계단을 만든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생각했던 대로 미로와는 연결되지 않은 듯했다.
발자국 소리,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바람이 벽을 훑고 지나가는 소리, 뭔가가 바닥과 벽과 천장을 기어가는 소리, 동굴을 울리는 그 모든 소리가 계단을 따라 내려갈수록 더욱 음산하게 느껴졌다.
그나마 벽에 등잔불이 켜져 있어서 어둡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신마성에서 조사를 하며 등잔을 달아놓은 듯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한참을 내려갔는데도 끝이 나오지 않자 두 사람의 표정도 그만큼 더 굳어졌다.
“풍천, 대체 얼마나 깊은 걸까?”
“언젠가는 끝이 나오겠지. 왜, 무서워?”
“뭐 그건 아닌데…….”
아니긴?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돌아갈까?”
백초령은 고개를 저었다. 위로 올라가서 등청과 운조평 등이 들어오길 기다리며 초조하게 앉아있는 것보다는 내려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냐, 계속 내려가.”
풍천은 슬쩍 백초령의 표정을 살펴보고는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삼백 개가 넘어서 끝이 났다.
‘삼백서른세 개군.’
풍천은 계단의 숫자를 정확히 기억했다. 일부러 센 것은 아니었다. 그의 발이 버릇처럼 기억한 것일 뿐.
해결사에게 그 정도는 기본이었다. 남이야 별 시답잖은 재주라고 할지 몰라도 간혹 단순한 것이 목숨을 구해줄 때도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풍천은 백초령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알려줘 봐야 믿지도 않을 텐데 뭐.’
계단이 끝나자 다시 통로가 이어졌다. 통로는 뱀이 기어간 듯 구불구불했다. 너비는 이 장 쯤, 높이도 일 장이 훨씬 넘었다.
양각으로 새겨진 조각이 가득한 좌우 벽과 천장.
빈틈 하나 없이 새겨진 조각은 얼마나 많은지 ‘유령총 사람들은 조각하는 걸 무척 좋아하나 보군.’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조각의 내용은 결코 밝은 것이 아니었다. 누가 유령들의 무덤 아니랄까 봐 음산하고도 어두운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뚜벅, 뚜벅, 뚜벅…….
발걸음 소리가 통로에 울렸다.
걸음걸이마다 바닥의 뿌연 안개가 출렁였다.
뿌연 안개가 희미한 유등잔 불빛을 받으며 흔들리자 정녕 유령이 춤을 추는 듯했다.
풍천은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어디서 흘러나온 안개일까?
흘러나온 곳이 있다는 말은 이곳이 완전히 막힌 곳은 아니라는 뜻. 풍천은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통로의 굴곡진 곳을 막 돌아간 순간 풍천은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빌어먹을!’
백초령도 멈춰 서서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여기가 끝인가 봐.”
주위를 둘러보는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잘게 떨려나왔다.
통로를 막고 있는 거대한 석문이 보였다.
석문에는 첩첩산중에서 피리를 불고 있는 사람이 새겨져 있었다. 위에는 달이 떠있고, 피리를 부는 사람의 발 아래쪽에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과 신처럼 우러르는 사람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새겨져 있었다.
안개는 그 석문의 밑바닥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조각 속의 상황이 더욱 괴기스럽게 느껴졌다.
풍천은 석문의 앞쪽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운조평이 열려고 했던 곳이 저곳인가 본데?”
석문 밑에 눈에 익은 주머니가 떨어져 있었다. 옥적이 든 주머니, 가짜 유령적이 든 주머니였다.
백초령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맥이 쭉 빠졌다.
“결국 다른 입구는 없다는 말이네?”
“잠깐 여기서 기다려.”
풍천은 백초령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석문으로 다가갔다.
“풍천…….”
뒤에서 백초령이 나직이 불렀다. 평소와 달리 불안과 초조가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너무 걱정 마.”
풍천은 백초령을 달래기 위해서 나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것도 없는데 무서워할 게 뭐 있냐는 듯.
그럼에도 백초령은 기분이 이상했다.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어차피 열지 못할 텐데, 꼭 가까이 가봐야 돼?”
석문을 열지 못할 거라는 건 풍천도 잘 알았다. 힘으로 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신마성이 굳이 유령적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냥 돌아서기에는 아쉬움이 너무 많았다.
삼십 보 정도를 걸어서 석문 앞에 도착한 풍천은 바닥에 떨어진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옥적은 잘게 부서진 채로 주머니 옆에 소복이 쌓여 있었다.
‘덕분에 놈들을 잘 속여먹었는데…….’
쓴웃음을 지은 그는 고개를 들고 석문의 조각을 살펴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피리를 부는 사람의 조각이 실제 사람의 크기와 비슷했다.
그가 부는 피리는 옥적과 비슷해 보였는데 크기만 조금 달랐다.
‘저게 유령적인가?’
그럴 가능성이 컸다. 남자가 피리처럼 불고 있지 않은가.
만약 저게 진짜 유령적이라면 위태곤과 운조평이 속을 만 했다. 조각에 있는 피리의 길이를 실제 길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테니까.
‘재수가 좋았군.’
단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그게 그거지만.
빌어먹을.
입맛을 다신 그는 좀 더 위쪽을 둘러보았다.
피리 부는 사람 머리 위에 달이 떠 있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신월이.
풍천의 눈이 커졌다.
“어? 저건 들어올 때 본 것과 같은데?”
그랬다. 탑의 상단부에도 신월의 문양이 있었다. 다만 탑의 상단부에는 하나만 새겨져 있고, 석문에는 열다섯 개가 나란히 새겨져 있다는 게 다를 뿐.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저게 달을 뜻하는 거라면 신월이 점점 커져서 보름달이 되어야 하는데 크기가 그대로였다.
물론 다른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열다섯 개의 신월에 있는 구멍의 위치가 모두 달랐다.
풍천은 자칭 뛰어난 해결사답게 그 구멍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눈치챘다.
‘저 곡조대로 유령적을 불어야 하는 건가?’
유령적의 곡조(曲調)!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 알아가지고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운조평도 저 신월에 뚫린 구멍이 유령적의 곡조라는 걸 알았을 것이고, 곡조에 따라 옥적을 불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도 결국 문을 열지 못했잖은가 말이다.
유령적이 없는 이상, 곡조만 알아서는 소용없다는 말.
‘제길, 화중지병(畵中之餠)이 따로 없군.’
풍천은 입맛을 다시며 다른 조각을 살펴보았다.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래쪽에 있는 조각들은 탑과 통로에서 봤던 무수히 많은 조각들과 별다르지 않았다.
조각을 잠시 더 살펴본 그는 석문에 귀를 대고 주먹으로 두들겨봤다. 석문의 두께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툭, 툭.
주먹만 한 자갈을 부술 정도로 제법 세게 쳤는데도 둔탁한 소리만 났다.
‘대체 얼마나 두꺼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