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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풍전설 57화

무료소설 천풍전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309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천풍전설 57화

 

57화 

 

 

 

 

 

 

정신을 먼저 차린 것은 백초령이었다.

 

“어마, 이게 무슨 짓이야!”

 

그녀는, 자신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는 듯 날카롭게 소리치며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러면서도 풍천의 목을 끌어안은 손은 풀지 않았다.

 

“내, 내가 뭘?”

 

“이제 보니 못됐네. 엉큼하게 어디서…….”

 

침이 코앞에서 튀었다.

 

‘저도 가만히 있었으면서!’

 

풍천은 자신을 몰아붙이는 백초령이 얄미워서 허리를 안은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살이 진짜 부드럽다. 여자는 다 이런가?’

 

오히려 심장박동이 더 거세져서 찰싹 달라붙어 있는 백초령이 느끼지 않을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뭐 좋아, 이번은 용서해주지. 너무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실수한 거라 치고.”

 

백초령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고는 다시 겁에 질린 목소리로 좀 전에 못 다한 말을 이어갔다.

 

“근데 풍천, 우리 나갈 수 있을까?”

 

“나만 믿으라니까. 강호에서 나만큼 길을 잘 찾는 사람은 없거든?”

 

풍천은 자신 있게 말했지만 솔직히 자신도 조금 겁이 났다.

 

그래도 여자 앞에서, 그것도 찰싹 달라붙어 있는 백초령에게는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정말 풍천을 믿어도 돼?”

 

“그러어어엄!”

 

“정말이지? 나 떼어놓고 가지 않을 거지?”

 

“내가 왜 너를 떼어놓고 가?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라니까?”

 

“으, 입냄새.”

 

‘너는 안 나는 줄 알아?’

 

풍천은 백초령을 째려보았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으니 잔소리 들을 걱정이 없었다.

 

“험, 뭐 먹은 것도 없는데 냄새는 무슨…….”

 

“그 말 들으니 배고파.”

 

“나도.”

 

두 사람은 그때까지도 서로를 끌어안은 손을 놓지 않았다. 어둠은 부끄러움을 감춰주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수는 없는 일.

 

풍천은 아쉬움(?)을 접고 넌지시 말했다.

 

“너무 어두워서 청광석으로 앞쪽을 비춰야 할 거 같아. 두 개는 저쪽에서 잃어버렸고, 가슴 속에 아직 몇 개 남았는데…….”

 

순간 쑥, 백초령의 손이 가슴을 비집고 들어왔다.

 

풍천은 백초령의 손이 가슴을 더듬자 몸이 자신도 모르게 떨렸다. 그래도 기분 나쁜 느낌은 아니어서 견딜 만했다.

 

그녀는 가슴 안쪽을 마구 헤집더니 안쪽 깊숙이 넣어놓았던 청광석을 한주먹 꺼냈다.

 

갑자기 앞이 환해지며 서로의 얼굴이 보였다.

 

바로 눈앞에 풍천의 눈이 보이자 백초령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붉혔다.

 

“어머, 이제 손 놔.”

 

“어? 그, 그래. 너도 놔.”

 

“응? 푸, 풍천이 놔야 나도 놓지.”

 

빛은 다시 두 사람에게 부끄러움을 돌려주었다. 그리 반갑지 않은 선물이었다.

 

‘괜히 청광석 이야기를 꺼냈네.’

 

‘조금 천천히 꺼낼걸.’

 

 

 

3

 

 

 

청광석을 비추며 앞으로 얼마나 갔을까, 계단이 나왔다. 이전까지와 달리 제법 높은 계단이었다.

 

대충 높이를 짐작해본 풍천의 눈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말해봐야 믿지 않을 게 뻔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얼마나 올라왔는지 알고 있었고 지금까지 지나 온 길도 거의 다 기억하고 있었다.

 

‘초령이는 절대 안 믿을걸?’

 

보나마나 거짓말쟁이 취급하겠지.

 

그런 자신이 봤을 때 앞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지상까지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지금까지 삼 층을 올라왔어. 높이로는 대략 오 장쯤. 아마 이곳을 올라가면 일 장 정도 남을 거야.’

 

그럼 한 층 정도 남았다는 말이었다.

 

“풍천이 앞장서. 내가 뒤따라갈게.”

 

백초령이 슬쩍 팔을 치며 풍천을 앞세웠다.

 

“따라와.”

 

풍천은, 자신만 믿고 따라오면 지옥의 염라사자를 만난다 해도 안심할 수 있다는 듯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계단을 올라갔다.

 

하나, 둘, 셋…….

 

계단은 모두 스물두 개였다. 이전의 계단보다 두 배는 더 많았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 계단을 밟은 순간이었다.

 

철컹.

 

미약한 소리가 저 앞에서 울렸다.

 

독사와 마주쳐서 놀란 사람은 나뭇가지만 밟아도 놀라는 법. 풍천은 가슴이 철렁했다.

 

이번엔 또 누굴까?

 

“풍천, 왜 그래?”

 

뒤에서 백초령이 바짝 다가와 물었다.

 

이상했다. 백초령의 목소리를 듣자 곤두섰던 긴장감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어, 저 앞에 누가 또 나타나는가 싶어서.”

 

백초령은 앞을 두리번거리더니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 무슨 일 있어?”

 

“그냥 소리가 났을 뿐이야. 왜, 겁나?”

 

“누가 겁먹었다고 그래?”

 

자존심이 상한 백초령은 툭 쏘아붙이고는 청광석을 앞으로 내민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풍천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녀의 뒤를 바짝 따라가며 앞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십여 걸음 걸었을 때였다. 발밑에 뭔가가 보였다.

 

백초령은 청광석을 든 손을 내려 발밑을 살펴보았다.

 

부릅뜬 눈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엄마야!”

 

청광석을 들고 자신만만하게 걸어가던 백초령은 홱 돌아서더니 풍천의 가슴에 안겼다.

 

풍천은 엉겁결에 백초령을 끌어안고는 전면을 향해 청광석 하나를 던졌다.

 

청광석의 희미한 빛에 전면의 상황이 드러났다.

 

십여 구의 시신이 통로에 널려 있었다.

 

백초령이 본 것은 그 중 하나였는데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무서워할 것 없어. 죽은 사람들이야.”

 

“시체니까 무섭지!”

 

“무서운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이야. 죽은 사람은 두려워할 것 없어.”

 

풍천은 담담히 말하고는 시신들을 살펴보았다.

 

반은 신마성의 무사들이었고 반은 구룡회 각 세력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가 싸움이 난 모양이군.’

 

문제는 모두의 표정에 공포가 떠올라 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쫓겨 오기라도 한 것처럼.

 

‘정체불명의 그 흑의인들에게 쫓겼나?’

 

풍천은 몇 가지 눈에 보이는 사실만 가지고 대충 상황을 유추하고는 희망을 가졌다.

 

‘죽은 사람들에게는 안됐지만, 입구가 가까운 것은 분명한 것 같아.’

 

그때 백초령이 시신 중 아는 사람을 발견하고 뾰족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어마? 저 분은 혹시……”

 

“아는 사람 있어?”

 

백초령은 풍천의 품에서 벗어나 바로 앞쪽에 있는 시신 중 하나를 향해 청광석을 든 손을 뻗었다.

 

“맙소사! 정말 제검당의 부당주님이야.”

 

그녀는 청광석으로 다른 시신도 하나하나 비쳐보았다.

 

그녀가 찾아낸 신검문 사람은 모두 셋이었다.

 

풍천은 안타까워하는 백초령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그만 가자.”

 

백초령도 죽은 시신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일어선 그녀는 처연한 표정으로 풍천을 바라보았다.

 

“풍천, 이 사람들이 모두 나 때문에 죽은 걸까?”

 

풍천은 ‘그럴지도 모르지, 너를 구하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장난처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백초령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는 표정을 굳히고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미안해하는 건 이해하는데, 자책감을 느낄 것까지는 없어. 이 사람들은 그저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다가 죽었을 뿐이야. 그게 너를 구하기 위해서든, 아니면 보물에 욕심이 있어서든.”

 

“좌우간 내가 이곳에 잡혀 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잖아.”

 

“순진하긴, 네가 잡혀 오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벌어졌을 일이야. 그 일이 단지 너로 인해 앞당겨진 것일 뿐이지.”

 

“정말 그런 걸까?”

 

“그래, 그러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

 

백초령은 눈에 맺힌 눈물을 소매로 쓱 닦았다.

 

그러고는 힐끔 풍천을 쳐다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렇게 말하니까 풍천 같지가 않네. 억지로 무게 잡고 말하지 마. 이상하게 보이잖아.”

 

‘이게 진짜 나야, 나!’

 

풍천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무게 잡고 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백초령에게 그런 투로 말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냉정하게 말하지 않으면 백초령의 마음 한 구석에 어두운 앙금이 쌓일지 몰랐다.

 

풍천은 백초령이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다니는 걸 원치 않았다.

 

백초령은 밝은 표정 그대로가 좋았다. 자신을 닦달하지만 않는다면!

 

‘나를 꼭 우러러보지 않아도 좋아. 게으른 당나귀 취급만 하지 마란 말이야. 알았어, 백초령?’

 

풍천이 내심 그렇게 소리치며 백초령을 바라보는데 백초령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풍천은 거북이처럼 게으르면서 어떻게 그런 신기한 신법을 배웠어?”

 

하여간 말투하고는.

 

‘그런 신기한 신법을 펼칠 줄 알다니, 풍천 진짜 대단해!’ 그렇게 말하면 입술이 부르터?

 

‘눈물만 보이지 않았으면 확! 떼어놓고 가는 건데!’

 

풍천은 백초령을 가자미눈으로 째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만 가자. 누가 나타나기 전에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지.”

 

“어.”

 

백초령은 후다닥 풍천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시신이 몰려 있는 곳을 지난 그들은 다시 전면에만 신경 썼다. 그때였다.

 

그그그긍.

 

뭔가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뭔 소리지?”

 

백초령이 풍천의 팔을 붙잡고는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또 다른 통로가 열리는가 봐.”

 

풍천은 나직이 대답해주고는 전면을 노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전면 사 장 앞의 벽이 갈라지는가 싶더니 불빛이 칼날처럼 새어나왔다.

 

순간 풍천의 팔을 붙잡은 백초령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풍천이 멈추자 그녀도 걸음을 멈추고 풍천의 뒤로 몸을 숨겼다.

 

풍천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벽이 갈라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적과 마주치는 걸 피하겠다고 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어둠 속 미로로 들어가서 피냄새를 쫓아 헤매는 것보다는 전면에서 나타나는 자들을 상대하는 게 더 나을 것이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설마 그 시커먼 놈들보다 강하겠어?’

 

그렇게 생각한 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팔에서 백초령의 떨림이 그대로 느껴졌다. 대담한 척하지만 계속된 위기에는 백초령도 어쩔 수 없나보다.

 

‘너무 겁내지 마. 내가 지켜줄 테니까.’

 

이 기회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하게 알려주겠어!

 

그그그긍.

 

그 사이 석문이 반쯤 열렸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등잔의 불빛과 함께 몇 사람이 보였다.

 

그들을 살펴보던 풍천의 입에서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지미, 저 인간이 왜 여기 있어…….”

 

쩡.

 

검을 빼든 그는 백초령에게 슬쩍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여차하면 튀어야 하니까 떨어지지 마.”

 

백초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풍천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때 석문 안쪽에 있던 사람들도 풍천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으로 뛰어나왔다.

 

안에서 나온 사람은 모두 다섯. 그 중 하나가 풍천을 아는 척했는데 다름 아닌 등청이었다.

 

“오호! 이게 누구야! 흐흐흐, 네놈도 재수가 더럽게 없구나. 어떻게 운이 좋아서 여기까지 왔나본데 하필 나를 만나다니 말이야.”

 

‘알지 모르겠는데 말이야, 동광후도 그렇게 함부로 말하다가 내 손에 죽었거든?’

 

풍천은 그 말을 해서 등청의 핏대를 솟구치게 만들고 싶었다. 잘하면 머릿속의 핏줄이 터져서 쓰러질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고 노려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지금 상황에서 등청을 화나게 해봐야 좋을 게 없었다. 자신이야 상관이 없지만 백초령이 다칠지 모르는 것이다.

 

“이 안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건 알고 있수?”

 

“당연히 많은 놈들이 죽었겠지. 후후후, 구룡회와 남궁세가 놈들만 해도 이백 명이 넘을 테니까.”

 

“신마성의 무사도 제법 많이 죽었던데…….”

 

“보다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희생을 해야 하는 법이니라.”

 

등청은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웃으며 풍천에게 다가갔다.

 

풍천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등청의 말투가 너무 태연했다. 지옥사자 같은 흑의인들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저렇게 태연할 수가 없거늘.

 

혹시…… 아직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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