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8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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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8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86화
86화
[쉿! 조용히 하고 몸을 숨겨요!]
풍천이 전음을 보내 해동산에게 소리쳤다. 해동산은 잔뜩 긴장한 채 납작 엎드리고 수풀 사이로 앞을 바라보았다.
저 앞쪽 어둠 속에서 그림자 몇 개가 움직이고 있었다.
은밀하면서도 절제된 움직임. 가볍고 빠른 걸음걸이.
해동산은 숨조차 죽이고 눈만 깜박였다.
‘엄청난 고수들이다!’
풍천은 곧 상대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숫자는 셋, 등왕각에 나타났던 정체불명의 고수들이었다.
잠깐 사이 그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저들과 마주칠지 모르는 상황. 풍천은 품속에 넣어두었던 천을 꺼내서 얼굴을 가리고 해동산에게 다시 전음을 보냈다.
[해 형, 등왕각에서 위태곤을 공격했던 놈들 같수. 내가 저놈들 따돌릴 테니 꼼짝 말고 이곳에 있어요!]
해동산은 쏙 빼고 있던 머리를 자라처럼 쏙 집어넣었다. 신마성주의 둘째 제자인 위태곤도 놈들에게 밀려 도망치지 않았는가. 자신은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잠풍이 저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해동산은 슬쩍 눈을 돌려 풍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풍천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 어디 갔지?’
그때 다가오던 자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그들은 뭔가를 발견한 듯 방향을 틀어 오른쪽으로 달려갔다.
풍천은 고의로 기척을 내서 청의인들의 관심을 끈 후 해동산이 있는 곳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청의인들을 유인했다.
청의인들은 손에 검을 들고 있었는데 달빛에 비친 검에는 거무스름한 피가 묻어 있었다. 싸움을 벌인 주체 중 하나라는 말.
문제는 그들의 상대가 누군가 하는 것이었는데, 일순간에 당한 걸 보니 신검문 사람들은 아닌 듯했다. 신검문 사람들은 그래도 고르고 골라서 온 고수들이니까.
풍천은 이백여 장을 이동한 후 제법 넓은 공터가 나오자 걸음을 늦추었다.
스스스.
뒤를 따라온 청의인들은 풍천을 삼재의 형태로 포위했다.
풍천도 검을 빼들고 몸을 돌렸다.
“등왕각에서 위태곤을 공격한 놈들, 맞지? 백초령을 납치한 놈을 쫓아온 건가? 오다가 신마성 놈들을 만나 싸운 거야?”
나는 너희들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 영락없이 그런 말투다.
청의인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눈빛을 주고받은 청의인들 중 하나가 땅을 박차고 풍천을 공격했다.
쉬이익!
풍천은 상대의 검이 곧장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청의인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청의인의 검이 그의 몸을 휩쓸고 지나가기 직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청의인은 자신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는 걸 알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방향을 틀며 풍천이 몸을 피했을 거라 짐작되는 방위로 검을 쳐올렸다.
동시에 다른 두 사람도 각각 한 방위를 맡아 움직였다.
반경 일 장이 완벽하게 세 사람의 공격권에 들어갔다.
세 사람의 판단과 대처는 너무 냉정해서 대하는 사람이 질릴 정도였다. 그러나 상대가 풍천이라는 게 세 사람에게는 불행이었다.
청의인들의 공세를 살펴보던 풍천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 이놈들! 그놈들이다!’
마침내 청의인들이 유령총에서 만난 살귀라는 걸 눈치챈 풍천은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허공에서 몸을 두 번 트는 걸로 세 사람의 공격을 무용지물로 만든 풍천은 자신을 가장 먼저 공격한 자를 향해서 검을 뻗었다.
‘일단 한 놈을 먼저…….’
풍천의 공격을 받은 청의인은 다급히 몸을 틀며 검을 내질렀다.
쩌저정!
청의인의 검이 한쪽으로 밀려나면서 실낱같은 빈틈이 보였다.
풍천은 상대의 빈틈을 향해서 좌수를 흔들었다. 서너 개의 손 그림자가 동시에 청의인을 덮쳤다.
당황한 청의인은 번개처럼 검을 휘둘러 손 그림자를 갈랐다. 하지만 천라신수의 위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갈라진 상태로 상대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퍼벅!
입을 쩍 벌린 청의인은 가슴에 둔중한 충격을 받고 이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나머지 두 청의인은 자신의 동료가 풍천의 공세를 몇 초 받아내지도 못하고 나가떨어지자 안색이 급변했다.
“네놈은 누구……?”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흘러다니며 살고 싶었는데, 네놈들 때문에 인생 망친 잘생긴 청년…….”
풍천은 엉뚱한 소리를 하며 두 청의인을 공격했다.
좌우가 넓게 트인 곳은 유령총의 좁은 통로와 완전히 달랐다.
더구나 풍천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고 지금은 밤, 풍천의 세상이었다.
풍천은 사람을 상대로 처음 펼쳐본 천라신수가 제 위력을 발휘하자 더욱 자신감에 찬 움직임으로 청의인을 공격했다.
청의인들도 전력을 다해 자신들의 재주를 모조리 쏟아냈다. 말하는 걸 보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지만, 손속만큼은 미친놈도 두려워할 만큼 섬뜩했다.
쏴아아아아.
검풍의 회오리가 세 사람을 중심으로 휘돌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풍천의 신형이 두 사람 사이로 스며들었다.
“조심하게!”
청의인 중 하나가 소리쳤다. 하지만 풍천의 움직임은 그들이 감각으로 잡아내기에는 너무 은밀하고 빨랐다.
“크억!”
한 사람의 입에서 밭은기침처럼 신음이 터져 나오고, 훑고 지나간 검기에 쩍 갈라진 가슴에서 핏물이 배어 나왔다.
가슴이 갈라진 자는 검이 지나간 곳을 향해 달려들며 소리쳤다.
“도, 도망쳐!”
가슴이 함몰된 청의인도 기를 쓰고 일어나 달려들었다.
“여기도 있다!”
그나마 온전한 청의인은 이를 악물고 신형을 날렸다.
동료를 구하는 것보다는 단천무령 셋을 단숨에 무너뜨린 자에 대한 걸 령주에게 알리는 일이 더욱 중요했다.
천하에 이런 자가 있다니!
만약 이자가 신마성의 사람이라면 계획을 수정해야 하는 것이다.
“흥, 전과는 많이 다를걸?”
천풍무영류를 펼친 풍천은 달려드는 두 사람을 휘감으며 검을 흔들었다.
검첨에서 스멀거리며 흘러나온 검기가 두 사람의 목을 스쳤다.
두 사람은 바람이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생전의 마지막 느낌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풍천은 두 사람이 쓰러지는 것을 보지도 않고 땅을 박찼다. 그리고 도주하는 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풍천의 신형이 어둠을 가르며 죽 늘어났다.
전력을 다해 몸을 날린 청의인은 뒷골이 서늘한 느낌이 들자 바닥을 차고 방향을 틀었다.
순간 그의 눈이 한껏 커졌다.
어둠 속에서 커다란 손바닥이 소리 없이 날아들고 있었다.
“차아앗!”
그는 손바닥을 향해서 검을 뻗었다.
시퍼런 검기가 서린 검이 손바닥 정 중앙을 뚫고 어둠을 갈랐다.
하지만 손바닥은 검기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고 그의 얼굴을 덮쳤다.
청의인은 급히 몸을 틀었지만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퍽!
어깨를 두들겨 맞고 이 장을 날아간 청의인은 바닥을 다섯 바퀴 구른 뒤에야 겨우 허리를 세웠다.
어깨뼈가 부서지며 검이 이 장 밖으로 날아간 상태. 하지만 그는 검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고 풍천만 노려보았다.
풍천은 자신을 노려보는 청의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내가 누군지 모르지? 알면 아마 심장이 펑 터질걸? 아니면 간이 바짝 말라붙든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점점 싸늘해졌다.
청의인의 두 눈에 의혹이 가득 떠올랐다.
“네놈이 누군데……?”
“나? 당신들에게 받을 빚이 있는 사람. 한 달 전에 내 동료들이 네놈들에게 죽었거든.”
“한 달 전? 그럼 혹시…… 유령총에서 살아 나간 놈?”
청의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풍천은 냉소를 띤 채 턱을 치켜들었다.
“뭐 그렇게 말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군. 근데 당신들, 어느 문파 사람이지? 솔직히 말하면 살려줄지도 모르는데.”
청의인은 입가의 피를 쓱 닦아내고 피식 웃었다.
“훗, 네놈이 나보다 강하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네놈도 곧 내 뒤를 따라오게 될 거다.”
모든 것을 포기한 눈빛. 목숨을 살려준다는데도 한 점 흔들림이 없는 표정.
그는 풍천이 말릴 새도 없이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기문혈을 깊숙이 찔렀다.
푹.
그리고 엄지손가락이 눈 옆의 기문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이 박힌 채 옆으로 쓰러졌다.
“이런…….”
풍천은 청의인이 망설이지도 않고 자결하자 눈살을 찌푸렸다.
무공만 강한 것이 아니다. 목숨조차 초개(草芥)처럼 버릴 정도로 철저한 신념에 의해서 움직이는 자들이다.
사교의 무리는 아닌 것 같거늘, 어떤 세력이 이토록 강한 신념을 지녔단 말인가.
‘이런 놈들을 상대하는 게 제일 어려운데…… 정말 골치 아픈 놈들이군.’
어쨌든 중요한 것은 유령총에 나타났던 살귀들이 남창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무슨 목적으로 남창에 온 걸까?
유령총에 들어갔던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지금쯤은 신마성의 간부들도 대부분 그 일을 알 텐데 말이다.
‘두고 보면 알겠지. 무슨 속셈인지.’
풍천은 세 사람을 근처에 있는 일 장 깊이의 골짜기에 던져 넣고, 양옆의 흙을 무너뜨려서 덮었다. 그리고 흔적을 대충 정리한 후 그곳을 떠났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으면 놈들도 당황하겠지.’
숲으로 돌아가자 해동산이 풍천을 보고 숲속에서 기어 나왔다.
“어떻게 됐나?”
“구만 리 떨어진 곳에서 저를 찾고 있을 겁니다. 그만 가죠.”
구만 리? 그만큼 멀리 떨쳤다는 건가?
해동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풍천의 뒤를 따라 강으로 향했다.
십여 구의 시신을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이백여 장 정도 갔을 때였다. 시신은 모두 신마성의 무사들이었다.
“후우, 어떤 놈들인지 진짜 무서운 놈들이군.”
해동산이 어깨를 움찔 떨며 중얼거렸다.
풍천은 그 말을 들으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남창에는 더 무서운 놈들이 있을 거요.’
제5장. 지붕 위의 결전(決戰)
1
풍천과 해동산은 묶여 있는 배를 아무 것이나 잡아타고 다시 감강을 건넜다.
강을 건넌 풍천은 눈에 불을 켜고 납치범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강을 따라가며 세세히 살펴봤는데도 납치범의 발자국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강변을 살펴보는 동안, 해동산은 인근에 사는 사람들을 붙잡고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가 강을 건너왔는지 알아보았다.
하지만 근 한 시진 가까이 물어봤는데도 봤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해동산은 풍천의 주장에 의문이 들었다.
“정말 놈이 강을 건넜을까?”
“돌아간 흔적이 없었어요. 헤엄쳐 건넜다면 몰라도 그런 것이 아니라면 배를 탄 것이 분명해요.”
“그럼 어디로 간 거지? 홍화루로 돌아가서 봉가를 족쳐볼까?”
“신마성에서 사람들이 나왔을 겁니다. 마주쳐봐야 좋을 게 없어요.”
해동산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신마성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은 그도 원치 않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선착장을 따라 내려오며 욕을 퍼부었다.
“어떤 개새끼가 내 배를 끌고 간 거야? 잡히기만 해봐라!”
흠칫한 풍천은 그자를 쳐다보았다. 수염이 더부룩한 장한이었는데, 말하는 걸 보니 도선을 운영하는 사공인 듯했다.
“이보쇼. 당신 배가 없어졌소?”
장한은 풍천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풍천의 옆구리에 매달린 검을 보고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그렇수. 저 위쪽에 매달아놨는데, 한잔 걸치고 왔더니 없어졌지 뭐요. 그래서 혹시 떠내려왔나 찾아보는 거요.”
“얼마나 되었소?”
“한 시진이 조금 못될 거요. 제기랄, 나는 배를 찾아야 하니 이만 가보겠수.”
풍천은 그 장한이 배를 찾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장한은 선착장을 모두 둘러봤지만 자신의 배를 찾지 못했다.
“아무래도 놈이 배를 훔쳐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간 것 같군요.”
해동산이 풍천의 말을 듣고 이마를 찌푸렸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후우, 별수 없죠.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알아보고, 안 되면 남창을 다시 뒤져보는 수밖에.”
“다른 곳으로 멀리 도망갔을 수도 있지 않은가?”
해동산이 나름 머리를 굴려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풍천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해동산을 흘겨보았다.
“그럴 거면 뭐하러 되돌아오겠수?”
해동산은 코를 씰룩였다.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만으로도 풍천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려, 나 멍청하다.’
풍천 역시 나름대로 불만이 많았다.
‘일일이 설명해주기도 귀찮은데, 여차하면 남창에다 떼어놓아야겠군.’
풍천과 해동산은 강을 따라서 내려가며 납치범이 남겼을지 모를 흔적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이동한 지 반 시진쯤 지났을 때였다. 저만치 앞쪽 선착장 근처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