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8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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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1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84화
84화
해동산은 백에 하나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동포동을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패는 것을 봤기에 토를 달지 않았다.
“험, 그럼 이제부터 내가 한번 알아보겠네. 여기에는 내 친구들이 몇 있거든. 그들에게 알아보라고 하면 개미가 몰래 문턱 넘어온 것도 알아낼 수 있네.”
“혹시 외상 깔린 친구들 아닙니까?”
“뭐 그런 사람도 두엇 있지. 하지만 동가처럼 매정한 사람들은 아니라네. 가볼까?”
해동산은 풍천이 더 질문하기 전에 홍등가 안으로 들어갔다.
풍천은 해동산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뒤를 따라갔다.
‘괜히 혹만 붙인 거 아냐? 지금이라도 혼자 다닐까?’
제4장. 추적(追跡), 멍청한 사람과 영리한 사람의 차이
1
“그래서, 하나도 처리하지 못했단 말이지?”
청삼 중년인은 어둠이 짙게 깔린 호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뒤에 서 있던 청의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령주.”
청삼 중년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신마성 내의 첩자에게서 위태곤이 백초령과 등왕각에 자주 간다는 것과 가는 시간까지 알아내 완벽히 준비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지면서 계획이 틀어졌다.
화청백이 신검문의 고수들과 그곳에 나타나다니.
유령총이 무너질 때부터 느껴지던 불안이 점점 커졌다.
‘우연은 한 번으로 족하다. 두 번의 우연은 우연이라 할 수 없는 법이지.’
마음이 무거워진 상관경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을 짓누르는 묵직함을 억지로 털어냈다.
‘후우, 흔들리지 말자. 내가 무너지면 천주님과 이공께서 직접 대공을 견제해야 해.’
잠깐 사이,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그는 수하의 보고를 받으며 품었던 의문에 대해서 물었다.
“청비, 백초령을 가로채 간 자에 대해선 짐작 가는 자라도 있는가?”
“그게…… 아무래도 천우 공자님 같습니다.”
포양호를 바라보던 상관경의가 천천히 돌아섰다. 호수처럼 깊던 그의 눈빛에 자잘한 파랑이 일었다.
“천우라고?”
“예, 령주. 신법과 금나수가 분명 본천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얼굴은 가려서 보지 못했지만 눈빛은 볼 수 있었습니다. 적대감이 아닌 호기심 가득한 그 눈빛은, 분명 작년 이맘때 봤던 천우 공자님의 눈빛이었습니다.”
“흐음, 천우란 말이지? 좋아, 그럼 형제들 셋을 보내 천우를 쫓아라. 분명 강을 건너서 북쪽으로 갈 거다.”
“존명.”
상관경의는 청비라는 자에게 명을 내리고 우측을 바라보았다. 덩치가 큰 중년인이 묵묵히 서 있었다.
“호량, 이제 곧 신마성이 움직일 거네. 우리가 나타났다는 걸 안 이상 고위급 고수들이 나올 거야. 한시도 눈을 떼지 말게.”
청비가 방을 나가자, 아교로 붙인 듯 하나로 달라붙어 있던 덩치 큰 중년인, 진호량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혁련 노물이 대대적으로 움직일 거라 보십니까?”
“혁련궁은 자존심이 강한 자네. 자신의 안방에서 제자가 공격받은 걸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터. 곧 강서 일대에 천라지망이 펼쳐진다고 봐야겠지.”
“천주께서 바라시는 게 그걸까요?”
천주께선 수십 년마다 행해지는 강호 청소를 할 생각인 듯했다. 불순물을 걸러내려면 흔들어서 채질을 해야 하는 법. 신마성이 대대적으로 움직이면 없던 이유도 생길 것이다.
‘그럴 때가 되긴 했지.’
하지만 상관경의는 진호량의 질문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그럴지도 모르네. 하지만 그에 대해선 우리가 신경 쓸 것 없네. 명심하게. 결정은 하늘이 내린다는 걸.”
“저도 압니다, 형님. 다만 왠지 모르게 씁쓸한 마음이 들어서 그럽니다.”
“지금까지 하늘이 내린 결정에 잘못된 게 있었나?”
“없었습니다.”
“그럼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고 따르게나. 우린 하늘에 모든 것을 바친 몸이 아닌가?”
“후우, 저도 그걸 모르지 않습니다만 이러다 대공의 뜻대로 흐르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불안합니다.”
상관경의의 눈빛이 보일 듯 말 듯 흔들렸다.
“절대…… 절대 그리되도록 놔두지는 않을 거네. 내 모든 것을 걸고 막을 거야.”
2
기루 두 곳을 들락거린 해동산은 세 번째로 홍등가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홍화루로 들어갔다.
풍천은 뒤따라가며 눈알을 굴렸다. 속이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이 오가고 있었다. 다른 기루보다 수준이 훨씬 높았다.
‘음, 그래도 몸매를 보나 얼굴을 보나 초령이만 한 여자는 없군.’
풍천이 나름 홍화루의 기녀들을 백초령과 비교하는 사이 해동산은 총관이라는 자와 입씨름을 했다.
총관이란 자는 제법 덩치가 좋았다. 초웅에 비하면 반밖에 안 되었지만.
거기다 얼굴과 목에 십여 줄기 칼자국이 그어져 있었는데, 어지간한 사람은 그것만 보고도 겁을 먹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해동산은 꿀리지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
“오늘은 놀러 온 게 아니라니까?”
“글쎄, 돈 갚기 전에는 안 된다니까.”
“봉가 안에 있지?”
“루주님은 바쁘시다니까?”
하지만 풍천은 입씨름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슬쩍 발을 내딛어 해동산 앞으로 나선 풍천은 총관의 머리를 붙잡고 한쪽에다 던져버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틈도 없이 총관은 일 장을 날아가서 기둥에 처박혔다.
우당탕!
해동산은 움찔 어깨를 떨고는 풍천을 바라보았다.
“이봐, 여기는 다른 곳과 조금 달라. 내가 말로 타이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일세.”
풍천은 해동산이 말하는 이유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달라봤자죠, 뭐.”
“그게 아니라니까. 여긴 신마성에서 운영하는 곳이야.”
이런 빌어먹을! 그 이야기를 왜 이제야 해?
풍천은 해동산을 쏘아보고는 몸을 돌렸다.
여기저기서 칼 든 놈들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이 개자식들, 죽여버리겠어.”
총관은 기죽기 싫었는지 나름 욕을 퍼부으며 몸을 일으켰다.
풍천은 힐끔 그를 쳐다보고는 발을 들어서 발바닥으로 냅다 총관의 안면을 차버렸다.
퍽!
“켁!”
총관은 몽둥이에 얻어맞은 강아지처럼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떼굴떼굴 굴렀다.
다가오던 자들은 망설임 없는 풍천의 행동을 보고 멈칫하며 서로 눈치만 봤다.
총관의 안면에 붉은 발자국을 만들어준 풍천은 그들을 안중에 두지도 않고 해동산에게 물었다.
“주인을 만나면 정보를 얻을 수 있겠수?”
“봉가가 인정머리는 없어도 이 바닥은 꽉 쥐고 있지.”
“그럼 안으로 들어가 봉가인지 붕가인지 만나 봐야겠군요.”
“저놈들은……?”
“해 형이 알아서 하쇼.”
풍천은 미련 없이 몸을 돌리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해동산이 뒤에 대고 버럭 소리쳤다.
“이, 이봐!”
칼을 들고 다가오던 자들이 씩 웃으며 해동산을 향해 칼을 내밀었다.
“일단 너부터 포를 뜨고 볼까?”
해동산의 눈썹 끝이 위로 슬금슬금 올라갔다. 그리고 눈빛도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순간, 그의 입에서 한기가 물씬 풍기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복수하기 전까지는 성질 죽이고 지내려 했더니, 이것들이 어디서·····!”
홍화루의 보표들은 해동산의 그런 표정을 보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지랄하네!”
“생긴 것도 꼭 자라같이 생긴 놈이!”
두 놈이 몸을 날리며 칼을 휘둘렀다.
“뭐? 자라아아? 그러잖아도 기분이 꿀꿀한데 잘됐다, 이놈들! 내 오늘 살수를 아끼지 않으리라!”
풍천은 해동산이 홍화루의 보표들과 한바탕 드잡이를 벌이는 동안 내원 깊숙이 들어갔다. 앞을 막는 사람이 있으면, 여자는 그냥 놔두고 남자만 두들겨 패서 기절시켰다.
그렇게 대여섯 명을 쓰러뜨리고 건물을 하나 지나가는데, 총관 못지않게 강렬한 인상을 지닌 중년인이 날아들었다.
“웬 놈이 소란스럽게 하는 것이냐!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마음이 급한 풍천은 중년인이 인상을 쓰며 달려들자 좀 더 강도를 세게 해서 두들겨 팼다.
퍽! 퍼벅! 퍼버벅!
“너 이 새끼…… 억! 가만두지…… 컥! 내가 누군지 알고…… 흑! 너 죽었…… 켁! 이제 그만…… 크억!”
그래도 한가락 하는 놈인지 맷집이 제법 세서 쉽게 기절하지 않았다.
풍천은 그 점을 가상히 여겨 더 이상 두들겨 패지 않았다. 대신 흐물거리며 쓰러지기 직전인 그의 멱살을 확 잡아당기고 물었다.
“봉가인지 붕가인지 어디 있어?”
“보, 봉가는 왜?”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시간 없으니까 빨리 말해. 말 안하면 저 바위에 처박아버리고 갈 거니까.”
힐끔 풍천의 눈이 향한 곳을 바라보던 중년인의 험상궂은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삐죽삐죽 칼날처럼 튀어나온 바위는 은자 한 냥이나 주고 사온 조경석이었다. 보기에는 멋졌지만, 그것에 얼굴을 부딪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당장 팔아버려야지.’
중년인은 그렇게 다짐하며 입을 열었다.
“그, 그게…… 내가 봉가…….”
풍천은 손에 잡힌 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얼굴의 기름기가 총관보다 조금 더 진하게 흘렀다.
“진작 말하지.”
풍천은 그를 한쪽에 얌전히 내려놓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흠칫한 봉태구는 두 손을 이용해서 뒤로 물러났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얼굴은 반반한데 성질은 완전 미친개가 따로 없군.’
풍천은 뒤로 물러나는 봉태구에게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여기 홍등가의 상황을 그렇게 잘 안다며?”
“그건 그렇다만…….”
풍천은 해동산에게 말한 납치범과 백초령의 인상착의를 말해주고 다그쳤다.
“찾아내려면 얼마나 걸리겠어?”
“내가 왜 그런 연놈들을 찾아…….”
‘연, 놈? 일단 팔다리부터 두어 개 잘라내고 봐?’
봉태구는 풍천의 눈에서 귀기에 가까운 푸른 안광이 흘러나오자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에…… 찾으려면 못 찾을 것도 없겠습니다만…….”
말을 하는 중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정말 미친놈이었어.’
풍천은 자신의 눈에서 그런 눈빛이 흘러나오는 줄도 모르고 더욱 싸늘하게 다그쳤다. 말을 살짝 돌려서.
“살고 싶으면 이 각 안으로 찾아내. 그놈이 신마성의 둘째 공자인 위태곤의 호위 무사들을 죽이고 사람을 납치했으니까.”
퉁퉁 부은 봉태구의 눈이 부엉이눈처럼 동그래졌다.
“그, 그게 사실이오?”
“당신하고 말싸움할 시간이 없다니까? 빨리 찾아내면 빨리 찾아낼수록 공이 커질걸?”
봉태구는 안간힘을 써서 몸을 일으켰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
“나? 위태곤과 잘 아는 사람. 납치당한 사람하고도 잘 알지. 걱정 마, 만일 당신 적이었으면 목부터 부러뜨렸을걸? 뭐해? 꾸물거릴 시간 없다니까!”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풍천이 위태곤의 친구쯤 되는 줄로 착각한 봉태구는 당장 말투부터 바꿨다.
“조,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공자!”
봉태구는 홍화루의 앞 건물로 뛰어갔다.
풍천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만약 해동산 때문에 일이 이상하게 흐르면 앞으로는 혼자 움직여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앞 건물로 가자, 해동산이 바닥을 기어가는 십여 명 앞에 앉아서 거만한 자세로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이집 주인하고 친구만 아니었으면 너희들 다 죽었어, 임마! 알아, 몰라?”
봉태구가 그런 해동산을 보고 버럭 소리쳤다.
“해가야! 이게 무슨 짓이냐!”
해동산은 봉태구와 풍천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그는 봉태구의 얼굴 상황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걸 알고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챘다.
“내가 저 친구하고 알아볼 게 있어서 왔는데 대뜸 칼을 뽑아들고 대들지 뭔가? 그래서 교육 좀 시켰지. 이곳이 신마성과 연관만 없었어도 지금쯤 붉은 바닥에서 머리가 굴러다니고 있었을 거야.”
봉태구는 열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뒤에 있는 풍천을 의식해서 더 이상 다그치지 않았다.
해동산의 말대로 홍등가에서 봉태구의 정보력은 대단했다. 그의 수하들은 정확히 이 각 만에 풍천이 원하는 자의 행적을 알아왔다.
“말씀하신 인상착의를 지닌 자가 여자와 함께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걸 사공 진삼이 봤다고 합니다, 루주님.”